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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Mar 08. 2023

매화향을 쫓다 문득

매화예찬

 제주도에서 한 달을 살았던 적이 있었다. 때는 3월 말 4월 초 정도였는데 한창 제주도에 봄꽃이 만개할 시기였다. 처음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던 건 봄꽃을 보러 가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는데 서둘러 내려간 제주행에서 뜻하지 않은 꽃 속의 제주를 경험했었다. 유채꽃이며 벚꽃이며 나서는 길마다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요즘 자꾸 그때가 생각이 난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걸어서 하고 있는 요즘, 길가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들을 보며 자꾸 추억에 젖곤 하는 것이다. 제주는 지금쯤 꽃이 봉우리를 잔뜩 부풀리고 있겠구나.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어 아직 무르익지 않은 봄날의 햇살을 무색하게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반짝반짝 빛이 나던 바다 윤슬에 시선을 뺏겨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오기도 했던 시간들도 그립고, 내일은 뭘 할까 여유롭게 일상을 계획하던 순간들도 그립다. 제주의 작은 책방에서 오전 내내 책에 푹 빠졌다 오기도 하고, 돌고래가 나타난다는 바닷가에서 하염없이 돌고래를 기다리다 결국은 맞닥뜨린 녀석들을 사라질 때까지 사진기에 담기도 했었다. 그 시절 내게 시간은 넘치고 넘쳤고 하고 싶은 것은 끝내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여유롭던 그 시절 제주를 추억하는 건 지금의 시간들이 힘들고 지쳐서인 건 아니다. 그저 꽃이 피기 시작한 봄날, 길을 걷다 코 끝을 스쳐가는 매화향에 제주의 시간들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구례에 있다. 제주처럼 한 달 살기 하자고 온 것은 아니다. 해보고 싶은 일을 쫓다가 찾아낸 일터가 구례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익숙하지도 않고, 작은 원룸에서 간단한 끼니 정도만 해결하며 사는 곳이라 아직 구례생활에 정이 가지는 않는다. 물론 내려온 지 석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정이 들고 말고 할 시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로 내려온 곳이기 때문에 일의 적응도에 따라 이곳의 친근감이 비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 해보는 일에 아직 익숙지 않은 것들 투성이어서 매일 긴장 속에 살고 있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로 우울해진 내 감정에 침잠해져 있기에는 지금의 봄날이 너무 화창하다. 심지어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한 구례는 한창 예쁘다. 어쩌면 4월 초까지 온 마을이 꽃대궐일 곳. 봄이 오는 길목을 산수유가 먼저 안내하고, 구석구석 매화나무가 화사하게 봄을 채운다. 개나리처럼 샛노랗게 유혹적인 빛깔은 아니지만 봄햇살처럼 은은한 산수유의 노란 꽃이 무척이나 소박하다. 매화든 산수유든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순간이 오면 이제 자신의 무대라며 벚나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순간도 올 것이다. 이곳 벚나무는 섬진강가를 빼곡히 둘러 서있는 것도 모자라 온 동네 구석구석을 채웠으니 봄날의 구례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벌써 기대가 된다.


 하지만 이런 봄의 꽃들 중 가장 반가운 꽃은 내겐 매화다. 내가 생각하기에 매화는 수줍은 연분홍 볼을 붉히는 벚꽃처럼 화사한 모양새는 아니다. 자줏빛 강렬한 홍매화라든가, 얼핏 푸르스름해 보이는 청매화도 있지만 벚꽃보다는 다소 화려해 보이지는 않다. 하지만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건 그들의 자태에 있지 않다. 매화는 결코 내 시선을 그들의 외양으로 잡아둔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알싸한 향이 훅 내게 스며드는 순간, 내 시선은 곧바로 매화를 찾는다. 그들의 존재감은 시선을 빼앗는 화려함이 아니라 은은히 번져오는 향기에 있다. 그 향기를 담아둘 수만 있다면 1년 내내 내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다. 나 혼자만 이 향기를 맡는 것도 아쉬워 간혹 매화향기 그윽한 곳에선 주변에 누가 있나 둘러보기도 하지만 이 작은 동네에는 불행히도 아직 이 향기를 함께 감동하며 나눌 벗이 없다.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다. 나는 가능하면 출퇴근길 왕복 50여분의 시간을 걸어 다니려고 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계절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조금이라도 친환경적으로 살아보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 시간 동안은 긴장된 일상이 조금씩 누그러트려지기도 하고, 간혹 바람에 실려온 매화향에 발길 멈추고 행복해지기도 한다. 봄이 오고 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반가운 일은 아니나, 봄날의 시간은 항상 어서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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