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력밥솥에 밥을 안쳤다. 현미쌀을 넣고, 언제 적부터 있는지 모를 쥐눈이콩을 섞어서 박박 씻었다. 그런 다음으로는 지인으로부터 받은 호박을 썰었다. 이 호박으로 무엇을 해 먹을까 며칠째 고민했었는데 첫 번째로 부침개를 해 먹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 장을 봐 둔 부추며 당근을 좀 섞었다. 밀가루를 찾아보니 거의 다 먹어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가루 종류도 섞어볼까? 찹쌀가루도 넣어보고, 감자전분도 조금 섞어보았다. 냉동실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콩가루도 조금 넣어보았다. 도대체 이렇게 마구잡이로 섞어놓은 가루들로 어떤 맛을 낼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해졌다. 준비된 재료들을 모두 넣어서 섞어보니 콩가루 때문인지 색이 누르스름 해졌다. 부쳐놓은 모양새가 밀전병 같기도 하고, 장떡 같기도 한 게 당장 맛을 보고 싶을 만큼 먹음직스러워졌다. 혼자서 먹는 음식이니 기름을 조금 넉넉히 둘러서 바삭하게 만들어보았다. 예전에 딸과 함께 살고 있었을 때는 조금 더 건강하게 먹자고 부침개를 부치더라도 기름은 조금만 둘렀었다. 재료들이 다들 건강한 것들이니 기름 조금 더 두른다고 크게 상관없을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프라이팬에 기름을 휘휘 두 바퀴나 돌렸다. 자글자글 익는 냄새에 신이 나 콧노래까지 절로 나왔다.
상을 차리고 보니 11시 반이나 되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먹자고(그렇게 마음먹은 시간이 11시이지만) 10시 반경부터 밥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부침개까지 부치다 보니 시간이 꽤 되었나 보다. 이렇게 아침을 건너뛰고 이른 점심으로 한 끼를 시작한 지는 2년 정도 되었다. 일부러 오전엔 공복시간을 만들어 보고자 시작한 일인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서 꾸준히 지켜오고 있는 습관이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배가 고픈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럴 땐 물을 한 컵 마시면 다시 아무렇지 않아 지게 된다.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서 오전 공복이 가져오는 가뿐한 느낌이 좋아 간혹 아침을 먹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집이 아닌 곳에서 하루를 시작할 때) 나는 먹지 않겠다고 그 자리를 피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하루에 3끼를 챙겨 먹으면 오히려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 번은 하루에 한 끼만 먹어보기도 했는데 밥을 먹지 않으면서 생기는 자유가 있어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밥을 준비하는 시간, 밥을 먹는 시간이 고스란히 내게 자유시간으로 오는데 그 시간만큼의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를 매우 바쁘게 지내느라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것 없는 백수로 지내면서도 밥을 먹지 않는 시간 동안 주어진 자유가 생각보다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굶고 있다가 먹는 식사는 매우 꿀맛 같았는데, 재료가 주는 온전한 맛을 누리게 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고, 먹으면서 이루어지는 내 몸의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엔 먹는 것에 매료돼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제대로 느끼기 힘든 적도 있었는데 한끼만 먹다 보니 그것이 소중해 매우 먹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집중하니 먹는 도중에 내 배가 찼다는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을 타이밍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예전에 식탐이 많던 시절처럼 아직도 음식을 만들 때 양껏 만드는 습관이 있는데, 그렇더래도 먹을 수 있는 만큼 먹고 남기기도 한다는 것이 내게는 변화라면 변화이기도 했다.
예전엔 백수가 되면 나는 밥 한 끼 챙겨 먹지 않고 살거라 생각했었다. 딸이 어렸을 적 주말마다 아빠 집에 가게 되면 나는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등이 아프도록 누워 살았었다. 일주일 내내 직장 생활하며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쉬고 싶다는 생각이 온통 내 몸을 지배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프면 밖에 나가서 무얼 사 오기도 했는데 사 먹는 음식들이라는 게 몸에 좋을 리는 없어서 먹고 나서도 썩 기분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폐인이 되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딸이 돌아오고 다시 일주일이 시작이 되면 오히려 더 규칙적으로 사니 몸이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혼자가 되는 것은 폐인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은 흘러 딸이 미성년 딱지를 떼고 스스로 경제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 독립을 했다. 드디어 나 혼자 사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나는 그와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 폐인 되기 딱 좋은 상태가 된 것이다. 백수에게 가장 많은 것은 시간이지만 가장 적은 것은 돈이다. 가진 것이 없다 보니 방탕한 생활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내 생계를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직접 밥을 해 먹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백수가 되기 전부터 아침을 거르던 식습관을 유지하고 있어 하루에 두 끼만 해결하면 되었다. 나는 먹는 일을 즐겁고 행복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두 끼를 맛있게 먹기 위해 매일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나는 채소를 좋아하고 잘 먹는 편이라 재료 선정부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당근, 오이, 파프리카 등의 생으로 먹을 수 있는 채소는 조리도 하지 않고 그냥 잘라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당장 허기가 질 때 딱 먹기 좋은 재료들이었다. 조금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샐러드드레싱을 곁들이면 된다. 양배추, 새싹채소, 데친 연근 등은 다양한 드레싱소스를 준비해서 함께 먹는다. 가장 복잡한 요리는 나물류인데, 그것은 다듬는 과정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는 머윗대나, 고구마대 등의 나물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먹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겨야 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뒤따른다. 난 또 좋아하는 음식을 위해 그 수고로운 과정을 즐겁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먹는 음식들은 내가 만들었지만 어쩜 그리 맛있는지 혼자 먹기엔 매우 아깝다며 스스로 감탄하며 먹기도 했다.
혼자서 먹기 위해 나처럼 이런 수고를 감당하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사는 현대인들이 온갖 밀키트들이 화려하게 즐비한데 굳이 채소를 다듬고, 씻고, 데치고, 볶고 하는 모든 과정들을 애써 선택해서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은 거다. 그런 사람들이 보면 나라는 사람은 참 비효율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내 주변에서는 내가 사는 것을 보고 부럽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구나 백수가 되고 싶은 바람은 가슴에 품고 있을 테니 그러한 시선들 속에서 가끔 우쭐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럽더래도 나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나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더 당당히 백수라는 내 위치에서 일상을 채우는 내가 자랑스럽다. 나는 나의 백수생활이 생산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중에 가장 염두에 둔 것이 먹는 것에서 파생되는 무수히 많은 쓰레기들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요리가 싫다고 배달을 시키면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기고, 밀키트를 사서 먹자면 비닐 쓰레기가 생기고, 간편한 인스턴트 음식들을 사서 먹는 일도 수많은 쓰레기가 생기는 일이다. 가장 쓰레기가 덜 나오는 일이 포장이 덜된 채소들을 사서 집에서 직접 조리해서 먹는 일이라는 것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러면 사실 돈도 엄청 적게 든다. 이것이야말로 백수의 삶에 품격을 더하는 일이다.
밥이 다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갓김치를 기본 반찬으로 두고, '내 맘대로 부침개'를 메인에 두었다. 새콤한 참깨 드레싱을 얹은 데친 연근을 곁들이니 내게는 근사한 한 끼 식탁이다. 맛이 궁금했던 내 맘대로 부침개는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양파를 많이 넣어서인지 달큼한 맛이 자꾸 씹혀서 계속 손이 갔다. '있는 가루 몽땅 반죽'은 생각보다 이질감이 들지 않았고 기름을 많이 둘러서인지 바삭한 식감까지 갖추고 있어 훌륭했다. 양을 조금만 한다고 했는데도 부침개가 세장이나 나와서 결국 마지막 장은 남길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않겠다고 꾸역꾸역 먹었을 테지만 오늘은 배가 부른 느낌이 충만해서 남겨뒀다가 조금 출출한 시간이 되면 간식처럼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동시에 오늘 저녁엔 남겨둔 호박에 멸치를 넣고 조림으로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에 조리과정을 천천히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