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경주엘 갔어. 가는 길에 잠시 둘러본 작은 공원에 상수리 열매가 땅에 뒹굴고 있었어. 다람쥐도 살 것 같지 않은 곳에. 동그랗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상수리 열매가 너무 탐이 나는 거야. 그래서 그냥 주웠지. 이뻐서 주웠지만 마침 하고 싶은 것이 생각났거든. 흠이 있거나 벌레가 먹었을 것 같은 것들은 두고 동글동글 반질반질한 것들만 골라서 한 움큼 가져왔어.
나는 한 번씩 가벼운 산행을 할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우연히 다람쥐를 만나. 쪼르르 달려 다니는 그 녀석들이 너무 귀여워 가까이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 처음 석굴암에 갔을 때 그랬어. 석굴암을 가기 위해 걸어 올라가는 그 길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왔던 녀석들. 그 녀석들은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손만 내밀면 가까이 다가오는 거야. 그러다 그 손에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가버려. 강천산에 갔을 때도 그랬어. 여기저기 다람쥐도 많았어. 친해지고 싶은데 나는 아무것도 없었던 거야. 만연산에 갔을 때도, 운주사에 갔을 때도 나는 언제나 다람쥐와 마주치는데 그들을 불러 모을 간식조차 없었어. 그때 생각했지. 다음에 산에 올 땐 땅콩이라도 가져와야지. 상수리 열매는 그렇게 주워 모으게 된 거야.
어젯밤 문득 잠자리에 들기 전 경주에서 가져온 상수리 열매가 생각이 났어. 점점 말라가고 있는 저것들을 더 마르기 전에 다람쥐를 갖다 줘야 하는데.... 그럼 내일 가지 뭐. 마침 가을이 익어가는 찬란한 날들이잖아. 백수 스케줄표에 내일의 일정이 등록되었어. 백수도 출퇴근 시간이 있어. 남들 다 움직이는 시간을 피해 오전 9시가 넘은 시간 출근을 하고, 오후 2~3시 무렵 퇴근을 하지. 4시부터는 차들이 또 많아지더라구.
백수라도 신체 나이가 50이 가까워져서인지 오전 7시면 거뜬히 눈이 떠져. 알람을 안맞추고 잔게 언제부터였는지. 새벽에 눈 안 떠지는 게 어디냐며 기분 좋게 누워서 기지개를 켰지.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이 없네. 바람은 많이 불었어. 가을이잖아. 햇살이 좋으니 저 정도의 바람은 상쾌할 거야. 가볍게 옷을 입고 상수리 열매를 챙겼어.
목적지는 운주사였어. 계산해봤을 때 내 기준 다람쥐를 만날 수 있는 곳 중 가장 가까운 곳이었어. 내비게이션은 고속도로를 알려줬지만 국도로 가도 비슷한 시간 내로 갈 수 있지. 안내를 무시하고 내 맘대로 갈 길을 정했어. 빠르게 순환도로를 빠져나와 나주 남평을 지나면서부터 눈앞이 시원해지기 시작했어. 쭉쭉 뻗은 나무들 하며, 아직 추수가 안된 누런 들판들이며 내가 좋아하는 색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 바로 이거야! 기분이 좋아지며 절로 콧노래가 나오네. 하지만 음악은 틀지 않았어. 난 멀티플레이어가 아니어서 음악을 들으면 낭만적 상상을 할 수가 없거든. 그저 콧노래만 부르는 거야. 내 콧노래를 들으며 내가 지금 기분이 좋구나 알게 되는 순간 더 신나지는거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몰라. 나는 그래. 잘 모르겠으면 너도 해봐.
운주사에 도착했어. 운주사는 이제 막 가을이 불붙어 있었어. 가을산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구름 한 점 없는 시퍼런 가을 하늘이 있어야 해. 오늘이 그날이었어. 사진을 마구 찍어댔지. 이렇게 찍어대면 내 것이 될 줄 알고 말이야. 아직 운주사에 입장하지도 않았는데 주차장에서 이미 오랜 시간을 머물렀어. 괜찮아. 다음 일정이 없으니까. 충분히 가을이 준 선물을 만끽했지.
주머니에 넣은 상수리 열매가 달그락거리자 오늘의 임무가 생각났지. 운주사 입구 쪽으로 마침내 향했어. 입장료가 있었어. 삼천원. 백수 입장이라 약간 비싸다 싶었지만 오늘의 임무를 위해서 아낌없이 털었지. 드디어 먹이 들고 다람쥐를 만나는 최초의 순간이야. 항상 운주사에 들어서면 입구 쪽에서 쪼르르 달려 다니던 다람쥐가 있었어. 사람을 만나면 순간 멈추었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우다다 도망가던 녀석들이었어. 그런데 오늘따라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아니면 추워서 움직이질 않는 건가?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만날 수 있을까? 그럼 천천히 경내를 돌아보고 와보자 했어. 곧은 길이 앞에 보였어. 중간중간 산으로 향하는 계단들이 보이는데 오늘의 목표는 산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정면만 바라보았어. 아직 가을색을 입지 않은 나무들도 많았어. 낮은 곳엔 여뀌며 쑥부쟁이, 구절초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어. 바람이 일렁이면 부드럽게 흩날리는 금빛 억새가 시선을 빼앗기도 했지. 그리고 돌탑, 돌부처들. 운주사는 다른 절과 달리 대웅전에 다다르기도 전에 수많은 부처들을 만나. 어쩜 그리 단단한 화강암들을 나무인형 깎듯 무심히 툭툭 만들어 두었는지. 세월이 깎아준 건지, 석수들의 섬세한 터치인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돌탑이며 돌부처의 선들은 유려하고 부드러워. 단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고 각자의 개성으로 하나하나 모두 시선을 끌지. 나무 관세음보살만 외치면 부처가 되는 불교의 대범한 이념으로 나는 이미 천불천탑을 맞이하며 부처가 되었어. 절로 몸을 수그리고 합장을 하게 되더라고. 저리 단단한 돌덩어리들을 보고 있는데 내 마음은 어쩜 이리 화평하고 부드러워진 것일까.
그때였어.
‘소소소소......’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가녀린 이파리를 떨어대고 있는 은사시나무. 그렇게 커다란 나무가 가녀려 보일만큼 오소소 떨고 있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청량한 거야. 내 가슴에 시원한 바람길이 생겼어.
나는 오늘 무심히 운주사를 찾았는데 이러려고 내가 왔나 보구나. 그러니까 바람을 맞으러 왔던 거야. 처음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내 계획과는 다르게 운주사는 뜻밖의 선물을 주네. 사실 가을날 아침 산사에서 맞는 바람은 조금 선뜻하기는 했어. 자꾸 햇빛이 있는 양달로만 내 발길이 향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 길 어디에든 바람이 자꾸 따라왔어. 발밑에선 쑥부쟁이가 바람결에 귀엽게 리듬을 맞추기도 했고, 붉게 물든 단풍잎 사이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들을 바람이 요리조리 흔들어 주기도 했어. 빛이 반짝거리도록. 대웅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흔들거리고 땡그렁 청아한 소리도 들려주었지. 심쿵! 난 바람을 아주 좋아했구나.
결국 돌아 나오는 길에도 다람쥐는 마주치지 못했어. 혹시라도 나 없는 사이 다녀갈 다람쥐들을 위해 구석구석 상수리 열매들을 던져두고 올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어. 풍경소리며,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며, 빛을 부수어트렸던 바람의 장난기까지 내 가슴에 깊숙이 한껏 보듬어 가져왔거든. 올 땐 상수리 열매뿐이었는데 갈 땐 가져가는 게 너무 많네. 친정 갔다 온 기분이랄까.
돌아오는 길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온통 노오래. 들판도 나무도 모두. 시퍼런 하늘이 노랑을 품으니 너무 부드러워졌어. 세상이 포근해진 기분이야. 이제 2주 후면 이 풍경들이 완전히 바뀌어 있겠지. 아쉽지만 속상하진 않아. 오늘 내가 모든 걸 만끽했으니 올해치는 이걸로 된 거야. 가을은 또 올 거고.
아~ 오늘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