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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Oct 28. 2022

어여쁜 가을의 빛깔을 닮아가요(1)

나들이

 오늘도 날씨가 매우 맑다. 며칠째 선선한 가을 날씨가 나와 아이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침 등원 길 버스 안 아이들이 오늘따라 조용하다. 원래는 두런두런 말소리도 들리고 장난을 치느라 과하게 떠들다가 교사한테 혼도 나는 게 일상적 버스 안 풍경이었다. 잠이 덜 깬 이른 아침임에도 무슨 할 얘기들이 그리 많은지 재잘재잘 잘도 떠들던 아이들이 오늘따라 웬일인가 싶었다. 몸을 돌려 아이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니 다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제법 우수에 싸인 눈빛으로 앉아있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서 유난히 눈부신 형형색색의 가을들판에 시선을 뺏겨 수다를 떠는 것도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오늘은 어디로 나들이를 갈지 생각하고 있나? 

  버스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 속에 알록달록 예쁜 나무들이 유난히 눈에 박혔다. 그러자 번뜩 오늘 아이들과 가고 싶은 나들이 장소가 떠올랐다. 단풍이 든 나뭇잎들이 아직 수분이 마르지 않아 잎 표면이 단단한 이때쯤 하면 딱 좋은 것이었다.      


 ‘오늘은 27세손으로 나들이를 가야겠어.’   

  

 27세손이란 동네 뒷산에 있는 가족묘를 일컫는 말이다. 이 씨 집성촌인 동네라 동네 뒷산에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조성해놓은 곳인 것 같았다. 22세손부터 27세손까지 모셔놓고 입구에 있는 기념비에 긴 문구를 새겨놓았는데 온통 한자 투성이라 그나마 읽을만한 글귀인 숫자만 콕 집어 간략하게 우리들끼리 27세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 어느덧 *터전에서 부르는 정식 명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곳은 봉분이 없이 비석과 상석만 있고 넓게 잔디밭을 조성해 차례지내기에 좋아 보였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넓은 잔디밭은 사실 뛰어놀기도 좋았다. 아이들은 그 넓은 잔디밭을 매우 좋아해서 매일 가는 나들이 코스 중에서도 인기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묘를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아이들이 반가울 리가 없었을 것이다. 조상을 모시는 곳이니 신성하게 여기기도 할 것이고 일부러 비싼 돈 들여 조성해놓은 잔디밭이 망가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가면 어서 와서 놀라고 친절히 말씀해주신다. 잔디의 쓸모는 모셔놓는 것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신 듯했다. 아이들을 좋아하셨고 아이들에게 친절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사인사를 잊지 않았다. 명절만 되면 꼭 선물을 들고 찾아뵙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 때는 아이들에게 상석과 비석은 건드리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한 후에 놀았다. 내일도 또 와야 하는 소중한 놀이장소이기에 아이들도 대부분 교사의 말을 잘 따랐다. 인과관계만 잘 설명해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지켜야 할 선을 잘 넘지 않는다. 기특한 아이들이다. 교사로서도 이곳은 참 맘에 들었다. 주변엔 텃밭이 있어 가끔 고구마를 줍기도 하고, 냉이가 나오면 냉이를 캘 수도 있어 수확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주변에 숲이 조성되어 있어, 간혹 거친 남자아이들은 사냥놀이도 하고, 전쟁놀이도 하며 맘껏 신체를 움직여 놀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좋은 곳이지만 여름엔 조금 습해서 모기가 많고 태양을 피할 수 있는 나무가 적어 놀러 가기 힘든 곳이다. 이제 선선한 가을이 되었으니 슬슬 27세손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오전 간식을 먹고 아이들과 나들이 장소를 정하는데 오랜만에 아이들 마음과 내 마음이 맞았다. 나들이를 어디로 갈 것인지 묻기가 바쁘게 아이들은 27세손을 가겠다고 앞다투어 말했다. 나들이 장소를 정하고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준비된 아이부터 교사 옆으로 와서 나가기를 기다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지막 아이가 준비를 끝내자 나는 나들이 가기 전 약속을 큰소리로 아이들과 합창했다. 


 “나들이를 갈 때 *이모랑 몇 발자국?”

 “다섯 발자국!”

 “오늘 동생 특공대는 지민이, 재우!”


 오늘의 동생 특공대로 뽑힌 지민이와 재우는 한쪽에서 서로 까불고 있었는데 동생 특공대라는 말이 들리자 정자세를 하며 제법 늠름하게 동생들을 지켜보았다. 장난기가 어마어마한 녀석들이지만 동생을 돌보는 일을 맡기면 어느새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 반은 5살부터 7살까지의 아이들이 12명 정도 되는 통합반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체력이 천차만별이어서 나들이를 나가면 앞장서는 아이와 뒤처지는 아이의 간극이 매우 크다. 그럴 땐 7살 아이들에게 어린 5살 동생들을 돌봐주는 임무를 주기도 하는데, 아무리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라도 동생을 챙겨야 하는 임무 때문에 쉽게 먼저 달려 나가지 않는다. 7살 아이들은 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귀찮아 하기보다는 형님이 되었으니 응당 해야 하는 일로 여기며 이러한 임무가 주어졌을 때 특별히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큰 성취감을 얻는다. 이러한 일들은 동생들이 매년 자라면서 지켜봤던 일들이라 그들 또한 7살 형님이 되면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긴다. 동생들을 챙기는 일은 그렇게 대물림되는 우리만의 전통이기도 했다.     


 *나들이 장소에 도착하니 각자 하고 싶은 놀이들을 찾느라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그전에 아이들에게 과제를 주었다. 나뭇잎을 많이 주워오라는 과제였다. 27세손 주변에는 벚나무, 소나무, 오동나무, 감나무, 일부러 식재해 놓은 나무, 전부터 잘 자라고 있던 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주변에 있다. 나무들마다 낙엽이 막 지기 시작해서 아직 나뭇잎이 바싹 마르지 않아 아이들과 탁본 놀이를 하기에 적합해 보였다. 아침 등원때부터 구상했던 것이 바로 탁본놀이였다. 나는 이맘때쯤이면 아이들과 나뭇잎을 주워 나뭇잎 탁본 놀이를 많이 했다. 아이들에게 색을 아름답게 경험해보게 하는 좋은 체험이기도 했고, 멋진 탁본을 뜨기 위해서는 적절한 손가락 힘 조절이 필요한데 그것을 해보기에도 그만인 일이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놀이를 얼른 시작하고 싶어 보이는 대로 나뭇잎을 가지고 왔는데 실상 아이들이 가져온 나뭇잎들은 멀쩡한 것들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온 나뭇잎들이 조금 나아 보였다. 후다닥 과제를 끝낸 아이들은 머나먼 놀이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처음부터 나뭇잎을 모으는 일에 아이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결국 내가  주워야 할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오늘 너희들은 나뭇잎 탁본을 할 거야'라는 걸 알리는 행위는 해낸 셈이다. 


 아이들이 각자의 놀이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교사는 잠시 여유로워진다. 그 틈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27세손 주변도 샛노래져가고 있었다. 푸르던 잔디도 말라가고 있고, 마른 솔가지들도 떨어져 쌓여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벚나무 잎은 조금씩 붉어져 존재감을 뿜어냈다. 내가 찾던 맞춤한 이파리들이다. 가끔 벌레가 잎을 갉아먹어 구멍이 뚫린 잎들도 있었는데 구멍 뚫린 잎을 탁본해도 재밌을 것 같아 가져온 가방에 다른 잎들과 함께 담았다. 잎들을 찾아다니면서도 가끔씩 고개를 들어 내 시야 안에 우리 반 아이들이 전부 들어오는지 확인을 했다. 가끔 안 보이는 아이들은 찾아내어 보이는 곳에서 놀라고 당부를 했다. 항상 하는 말이라 아이들은 알겠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가서 놀았다. 위험하게 노는 아이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놀이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이 있는지 보기도 했다. 오늘도 역시나 친구들보다는 교사 옆에 붙어있는 하랑이가 보였다. 하랑이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뭇잎을 줍기도 하고, 내 손을 잡기도 했다. 여럿이 어울려 노는 것보다 혼자 사색하는 걸 좋아하고, 그림 그리고 책을 보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다른 여자아이들과 같이 놀아보도록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어 보았는데 역할놀이에서 하고 싶은 것이 없었는지 다시 교사 옆으로 와서 졸졸 따라다녔다. 억지로 놀이에 참여시킬 순 없으니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랑이는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빠 이야기, 언니 이야기, 기르는 강아지 이야기...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끊어야 할 타이밍을 잘 찾아야 하는 게 중요하다. 마침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 하랑이와 함께 노래를 불러서 아이들을 모았다. 


 ‘어여쁜 친구들 모여보세요~ 이제는 돌아갈 시간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면 멀리 있던 녀석들도 돌아갈 시간인걸 알고 자연스럽게 모인다. 매번 노래는 마법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일상이다. 교사 주위로 모이니 아이들에게 더워서 벗어놓은 겉옷을 챙기게 하고, 가지고 놀던 나뭇가지들은 ‘안녕~’ 인사하고 제자리에 돌려주도록 하고, 잔디와 흙 범벅이 된 옷들은 털어보게 했다. 돌아갈 때도 동생들을 잘 챙기고 ‘다섯 발자국’ 원칙을 다시 한번 얘기해보며 천천히 터전으로 돌아왔다. 놀이의 여운이 아직 남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며 내일의 놀이를 계획했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오늘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두 잊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나들이를 가자고 할 녀석들이란 걸 안다.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피식 웃어대고는 즐겁게 터전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무슨 맛있는 반찬이 나왔을까? 내 생각을 알았는지 한 녀석이 ‘이모 배고파요.’ 한다. 


 “너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놀았으니 오늘은 밥을 세 그릇은 먹겠다.”

 “아닌데? 네 그릇 먹을 건데?”


 옆에 아이들까지 이제 몇 그릇 먹겠는지 서로 이야기하느라 아우성이다. 오늘도 밥통 빵꾸나게 딱딱 긁어야 할 모양이다.





*어린이집을 일컫는 말로 터전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아이, 부모, 교사가 함께 삶을 꾸리는 터전이라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교사를 '이모' 또는 '코알라(내 별명)' 식의 별명으로 부른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매일 오전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간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아이들은 바깥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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