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먹는 아이들
오늘 반찬엔 도토리묵이 나왔다. 쌉싸레하고 몰캉몰캉한 식감이 그만인 반찬이다. 어른들이야 이맘때가 되면 멋들어진 단풍 구경 후에 땡기는 음식이기도 하고, 일부러 이런 씁쓰레한 맛을 찾아서 먹을 때도 있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이 이런 맛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오늘 이 반찬을 맛있게 먹어 줄 아이가 얼마나 될지 슬쩍 가늠해 보았다. 무엇이든지 잘 먹는 아이들 몇 명을 제하고 나니 시우와 소유가 눈에 보인다. 낯선 음식이 나오면 가장 힘들어하는 녀석들이었다. 이럴땐 특별한 교사의 능력이 필요하다.
“우와~ 오늘은 다람쥐가 좋아하는 도토리로 만든 음식이네!”
이렇게 감탄사를 요란스럽게 던져놓으면 아이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보게 된다.
“나, 도토리묵 좋아하는데.”
입맛 까다롭지 않은 도이가 한마디 거든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너도 나도 좋아한다고 한마디씩 거든다. 이런 분위기가 될 줄 알았다. 여기에 살짝 조미료만 치면 된다.
“이모는 도토리묵 먹고 용진산 가서 다람쥐랑 친구해야지~”
말도 안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의외로 아이들에겐 통하는 작전이다. 나중에 커서 토끼가 되겠다는 아이들인데 다람쥐랑 친구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다람쥐랑 친구하고 싶은 아이들은 도토리묵을 자기가 더 많이 먹겠다고 한바탕 소란스럽다. 슬쩍 시우와 소유를 보았다. 소유는 이런 소란 속에 자연스럽게 합류했지만 시우는 반응이 미지근하다. 모든 아이들에게 밥을 배분하고 시우를 옆에 앉혀놓고 같이 밥을 먹었다. 먹는 반찬마다 감탄사를 남발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상이다. 중간 중간 아이들이 밥 먹는 속도가 느려지면 ‘한숟갈 뜨고~’를 곁들여가며 즐겁게 밥을 먹었다. 아직 도토리묵에 손을 대지 않은 시우를 보며 마지막 일갈을 했다.
“오늘 시우는 이 도토리묵을 하나만 먹을거야. 어떤 맛인지 알아보는거야. 용기를 내보자.”
편식이 심한 아이들에게 새로운 음식을 먹는 일은 용기를 내는 일이다. 더러는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으며 그것이 아이의 경우라면 더더욱 쉽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경험을 해보게 격려하는 일은 교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험해보지 않고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특히 성장기 아이들에게 모든 경험은 중요하다. 오늘 시우는 도토리묵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 경험해보는 날이다. 마지막까지 도토리묵 하나를 남겨두고 다른 반찬에 밥을 먹는 시우를 보며 용기를 낼때까지 지켜보며 기다려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그 와중에 도토리묵을 더 많이 주라고 하기도 하고, 밥을 더 퍼서 먹기도 했다. 오늘도 배식통의 밥과 반찬은 게눈 감추듯 사라지고 말았다. 심지어 바닥난 반찬통을 보며 더 달라는 아이가 있어 부엌에 가서 *맛단지에게 더 있는지 물어보라고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잽싸게 반찬통을 들고 뛰어나가더니 반찬 몇 개를 더 들고 왔다. 아무래도 맛단지 교사가 자신이 먹을 점심 반찬으로 놔둔 것을 가져온 듯 반찬의 양도 얼마 되지 않았다. 결국 맛단지가 먹어야 할 반찬까지 뺏어먹은 아이들이었다. 분주하게 밥을 다 먹은 아이들의 도시락 정리하는 것을 챙기고 시우를 보니 마지막 도토리묵을 숟가락에 들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나의 응원이 더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힘내라! 힘내라!”
교사가 옆에서 응원을 하고 있으니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응원을 시작했다. 용기를 내는 일은 응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이었다. 조금 망설이던 시우는 숟가락을 들어 도토리묵을 입에 쑥 넣었다. 교사를 비롯해 모든 아이들이 시우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우와! 시우 대단하다. 어쩜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어? 이제 용진산에 가면 다람쥐가 시우를 보고 반가워 할거야. 도토리묵도 용기를 내서 먹을 줄 아는 친구가 왔다고 말이지.”
우물우물 대충 씹어 삼켜버린 시우의 표정으로는 구체적인 도토리의 맛이 어땠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에 다시 도토리묵이 나올 때는 지금보다 더 용기를 내는 시간이 짧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보다 다람쥐와 친구할 수 있다는 것에 아이는 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시우의 식판을 깨끗이 비워주고 책상 밑에 떨어진 밥알이며 반찬들을 싹 다 치우고 나서야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아이들은 이미 각자의 놀이로 매우 분주했다. 내가 의자에 앉아 잠시 쉬는 걸 본 몇몇 여자아이들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각자 하던 역할놀이가 조금 시들해진 모양이었다.
“나뭇잎 탁본 해볼까?”
교사가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 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들이때 주운 나뭇잎이 제 역할을 할 때가 된 것이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급식을 도맡아 일해주시는 분을 맛단지 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