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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Dec 13. 2022

동지를 지내는 방법

동지제와 동지 팥죽

 1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옛날엔 동짓날을 기점으로 해가 점점 길어지니 새로운 해가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로 ‘작은 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예로부터 명절처럼 지냈던 동짓날을 우리도 1년 중 가장 큰 명절처럼 지내고 큰 행사를 치뤘다. 동지를 넘기지 않는 가까운 주말을 잡아 온 조합원이 모여 송년회처럼 하루를 보내는데 그것이 바로 동지제이다.

     

 동지제로 온 조합원이 모이면 1년간 고생했다는 의미로 함께 모여 회포를 풀고 음식도 장만해서 함께 나눈다. 단순히 먹고 즐기는 날이라기보다는 아이들 재롱잔치도 보고 어른들도 각 반별(아이들이 생활하는) 장기자랑을 준비해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장기자랑을 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어떤 내용으로 무대에 오를 것인지 정하고 이후 한 두 번 날을 더 잡아 맹연습을 한다. 공연의 내용은 매우 다양한데 지금까지 해왔던 공연들을 보자면 아이들 음악을 하나 골라 그것에 맞춰 귀여운 율동을 선보이기도 했고, 각각 악기와 보컬로 나뉘어 노래 공연을 한다든가, 노래를 틀어놓고 가사에 맞춰 수어 공연 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은 단연 동극 공연이었다. ‘황금오리’,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줄줄이 꿴 호랑이’ 등 아이들 동화책을 각색해서 제법 그럴듯한 동극들을 준비하고 전문 배우들처럼 능숙하게 열연을 하기도 했다. 수많은 동극 공연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동극은 단연 ‘방귀며느리’다. 방귀라는 소재 자체가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것이기도 하지만 방귀며느리 역할을 맡은 한 부모가(주로 아빠들이 며느리 역할을 한다)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는지 그 동극을 보던 어른들도 공연 내내 배꼽 빠지게 웃느라 오랜만에 얼굴 근육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부모들 공연이 재밌기야 하지만 사실 동지제에 기대하는 부분은 아이들 공연이다. 동지제 즈음이 되면 아이들은 교사와 조금씩 연습했던 것들을 집에 가서 알리고 은근히 무대에 오르는 순간을 기대하기 때문에 아이들이건 부모들이건 자연스럽게 그 날의 공연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아이들 공연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어린이집처럼 의상을 맞추고 아이들 율동을 몇 날 며칠 연습해서 올리는 그런 공연은 아니다. 아이들이 1년 동안 교사와 생활하며 불렀던 노래, 함께 했던 손유희, 계절별로 배워봤던 전래동요나 라이겐(발도르프 교육기관에서 하는 원무) 등을 평소보다 좀 더 연습해서 무대에 오른다. 어쩔땐 가끔 간간히 아이들과 함께 했던 동극을 공연할 때도 있다. 아이들이 준비한 동극은 어른들의 공연과 매우 달라 극의 긴장이나 스토리의 치밀함은 없을테지만 아이들 움직임 하나하나가 귀여움이 뚝뚝 묻어나기 마련이라 별거 아닌 공연이더라도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아이들의 공연은 연습을 한다고 해도 실수가 많고, 심지어 무대에 올라 바위처럼 꿈쩍도 안 하는 애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부모들은 그저 자신의 아이가 무대에 오른 사실이 감격스럽고, 1년 동안 아이가 성장한 모습에 울컥 눈물을 쏟기도 한다.     

 

 아이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7살 아이들의 장구 공연이다. 우리 터전에서는 7살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몇 가지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장구를 배우는 것이다. 사실 장구를 치는 일은 7살이 하기엔 꽤 어려운 일이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함께 박자를 맞춰 하나의 장단으로 만들어내는 일이고, 오른손, 왼손이 각자 따로 장단을 쳐주어야 하는 일이고, 수많은 장단을 외워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7살이 되면 으레 배우는 것이라고 알아 장구를 배우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을 정도라 장구를 가르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심지어 부모들도 자신의 아이들이 7살이 되면 장구를 배우게 될 거라는 것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는 터라 매년 아이들에게 장구를 가르치는 시기가 되면 항상 딜레마에 빠진다. 장구를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마다 배우는 속도가 달라 습득이 늦는 아이를 채근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일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장구공연은 다른 7살 프로그램들과 달리 공연으로 평가받게 되어 아이들이 모두 비슷한 수준이 될때까지 가르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그쳐야 하니 교사로서는 고민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다 보면 어느새 동지제 무대에서 제법 완성도 있는 공연을 하게 된다. 허리 펴고 긴장한 어깨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삼스런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평소와는 달리 얼굴이 상기된 채 열심히 장구를 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 고생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간이 모두 보상된다. 아이들 하나하나 사랑스럽고 대견해서 새삼 두 달 뒤 졸업을 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워질 정도다. 

    

 이렇게 아이들 공연과 부모 공연을 마치면 터전으로 돌아와(공연장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장소를 매년 섭외하는데 근처 초등학교 체육관이 지어진 이후로 계속 그곳에서 행사를 주로 진행했다) 내년을 위한 소원을 적어 달집에 걸어놓고 태우는 의식을 진행한다. 작년엔 코로나가 얼른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 같이 모여 예전처럼 어울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많은 소원이었는데 그 덕분에 올해 거리두기가 느슨해진건 아닐까 하는 비과학적 사고를 잠깐 해보기도 했다. 모든 순서가 마무리되면 다 같이 음식을 먹는데 이렇게 다 함께 나눠먹는 음식은 특별히 매우 꿀맛이다. 함께 했던 공연을 곱씹어보고 재밌었던 일들을 서로 얘기하면서 또다시 웃고, 아이들 공연에서 받은 감동을 또 같이 풀어내면서 1년 동안 몸고생 마음고생하며 살았던 것에 대해 보상받는 기분으로 그날을 즐긴다.      


 이 날 다 같이 나눠 먹는 음식은 당연히 동지팥죽이어야겠지만 몇 년 전부터 좀 더 간단한 음식으로 대체되었다. 동지팥죽을 끓이자면 팥을 모아야 하고, 새알심을 만들어야 하고, 동지제 공연도 못 보고 팥죽을 계속 저어줘야 하는 노동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동지팥죽을 대신해서 간단하게 시루 팥떡을 나눠 먹자고 이야기가 나오면서 서서히 팥죽 먹는 일은 생략되었다. 팥죽 대신에 또 다른 푸짐한 음식이 있어 모두들 많이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교사들은 동짓날 아이들과 팥죽을 먹지 않고 넘어가면 왠지 서운하다. 굳이 동지제날 먹어야 하는 일은 아니라서 동짓날까지 기다려 아이들과 팥죽을 먹을 계획을 한다. 새알심 빚기는 아이들과 하는 요리활동 중 가장 난이도가 낮은 활동이다. 그저 찹쌀 반죽을 동글동글 둥글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꼭 둥그렇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 고사리손으로 빚어낸 모든 반죽이 다 허용된다. 화전을 만들 땐 둥글린 반죽을 납작하게 펴서 그 위에 예쁘게 꽃을 올려놓아야 하고, 송편을 빚거나 만두를 빚을 땐 둥글린 반죽의 속을 파서 소를 넣어야 하는데 그런 일에 비하면 새일심 만드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새알심 만들기는 온 터전 아이들이 다 같이 할 수 있어 3살 아이들도 열심히 새알심을 만든다. 

 새알심 만들기를 재밌게 했다면 아이들에게 팥죽 먹이는 일의 70%를 한 것과 같다. 막상 팥죽을 아이들 앞에 두면 새로운 음식을 두려워하거나, 편식이 심한 아이들은 썩 먹음직스럽지 않은 색감 때문에 쉬이 숟가락을 들지 않는다. 그럴 땐 ‘아까 우리가 만든 새알이 들어가 있네’로 시작하는 사탕발림이 조금 효력이 생긴다. 자신이 만든 새알심은 왠지 믿음이 가고, 맛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겐 또 백발백중 코알라의 옛날이야기가 힘을 발휘한다. 

    

 “옛날 옛날에~”     


 역시나 아이들은 소란스럽게 떠들다가도 교사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옛날이야기는 어느 애니메이션, 어느 영화 못지않게 아이들의 집중력을 높여준다. 특히 도깨비 이야기는 매우 신나는 소재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 아이들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붉은 팥죽이 도깨비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절로 팥죽을 뜨게 만드는 힘이 된다. 조금 망설이던 아이들도 옆에서 형님들이 ‘그거 먹어야 나쁜 도깨비가 안 오니까 꼭 먹어야 해.’ 한마디만 거들어주면 적어도 그릇 안에 든 새알심은 모두 먹게 된다. 떡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쫄깃쫄깃한 새알심의 식감에 더 달라고 하기도 한다. 동짓날 이렇게 든든하게 팥죽을 먹고 나면 그해 겨울은 어떤 잡귀가 와도 끄떡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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