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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와가치 Sep 02. 2021

그렇게 가족이 되다

과거 완료형 5

밤새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에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다. 드디어 오늘이 오긴 왔다. 가슴 졸이며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아기를 만나러 가기 위해 집에서 출발할 땐 그래도 괜찮았는데 입양 기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더니 도착해서는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가슴이 마구 쿵쾅거려 진정하기가 힘들었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 끝 대기실이라는 곳까지 가는 동안에도 '꿈이 아닐까?' 싶은 게 구름 위에서 헛발질하며 걷는 느낌이었다


시어머니께서 일찌감치 오셔서 우리 부부와 아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겨울이라 스팀까지 켜 놓은 대기실이었지만 그 안이 춥게 느껴졌다. 진짜 추운 건지, 떨리는 건지, 설렘인지 알 수가 없다. 


처음 상담하면서 만난 담당 복지사가 들어와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아기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담긴 서류를 우리에게 건네주면서 오늘의 아기 컨디션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기를 데리고 가기 위한 간단한 절차들을 마친 후 남편이 서류 위에 사인을 하자 복지사는 이제 입양 전의 절차가 모두 끝났다고 말해주고는 총총총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복지사가 작은 이불에 쌓인 아기를 안고 대기실로 다시 들어왔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우리들 모두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복지사가 아기를 안고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엄마부터 안아보세요." 

아기를 건네받는 그 짧은 순간, '엄마부터'라는 복지사의 말이 마치 국민훈장처럼 느껴지고 가슴으로 꽂혔다.

작은 이불 사이로 뽀얀 얼굴을 한 아기가 내 품으로 쏙 안겨졌다. '엄마'라는 단어도 황홀한데 옆에 계시던 가장 어른이신 우리 시어머니나 남편이 아닌, 내가 제일 먼저 아기를 안게 되는 엄마라는 특권이 이토록 가슴 벅찬 일인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이제 진짜 이 아이의 엄마가 되었구나.


아기는 흰 피부에 까맣고 큰 눈으로 나를 또랑또랑하게 쳐다보았다. 내 엄마가 맞아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래, 내가 네 엄마야.', 마음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내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머, 어떻게 해... 어떡해... 예쁘다... 어떡해 ... 어떡해..." 내 입이 고장 난 것 같다. 똑같은 말만 계속 되풀이되어 나온다. 눈물도 덩달아 따라 나온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아기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내 품에서 그다음엔 남편 품으로, 그리고 어머니 품으로 옮겨지며 아기는 그렇게 우리와 첫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기도부터 하셨다. 그래, 그러는 거구나.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내며

나도 어머니를 따라 감사 기도를 드렸다.


복지사가 "엄마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한다. "정말 그러네요." 어머니도 촉촉한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설마... 눈물이 진정되고 맑은 눈으로 다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게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 오는 

눈, 코, 머리카락... 그리고 남편 닮은 예쁜 귀와 긴 속눈썹도 신기하기만 하다. 


분유와 젖병, 기저귀, 옷 한 벌, 속싸개, 겉싸개를 준비해 오라고 미리 연락을 받은 터라 준비해온 것들을 복지사에게 건네주니 이미 여러 번 해본 듯한 능숙한 솜씨로 아기를 감싸고 있던 (입양기관용) 아기 이불과 옷을  벗기고는 우리가 준비해 간 기저귀, 옷, 그리고 속싸개, 겉싸개를 차례대로 아기에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갈아입힌다. 무슨 의전 예식을 진행하는 느낌이다. 그렇게 입양기관에서의 절차가 정말 모두 끝났다. 



건강한 아기였다. 도로가 혼잡하여 집으로 오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아기가 차 안에서 힘들어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출발하려고 차에 탄 순간부터 집까지 오는 동안 푹 자고 일어나더니 집에 도착해서는 우유도 잘 먹고 뒤바뀐 환경에도 편안한 표정이다.


우리 집 공기가 달라졌다. 몸집 작은 아기가 겨우 방 한쪽에 자리 잡고 누워있을 뿐인데 집안은 금세 아기 냄새로 가득 찼다. 아들 내외 집에서 주무시고 가신 적이 한 번도 없던 어머님께서 며칠 계시겠다고 하신다. 그렇잖아도 아기와의 첫날이라 이것저것 걱정되는 게 많았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아기를 보려고 저녁엔 친정 식구들이 다녀갔고, 교회 식구들도 다녀갔다. 궁금해하던 지인들의 전화는 계속 울려대고 주방의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아기가 입었던 옷과 손수건들이 소리를 내며 보글보글 삶아졌다.



앞으로 내게 삶은, 다른 집 엄마들처럼 아기를 키우면서 그저 평범한, 사소한 날들의 연속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 사소한 날들을 감사하다고, 정말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게 될 것인가. 아이를 키우며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으로 인해 내가 지치려 할 때, 나는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이 사소한 일상이 시작된 오늘이 나에게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앞으로의 일들은 까마득하고 멀게 느껴지지만, 지나간 과거는 이미 쏘아버린 화살처럼 그 흔적 조차 기억해 내기 어려운 시간의 조각들이 되어버리는 것. 앞으로 시간은 더 빠른 속도로 내달리겠지. 그러니 이 시간도, 앞으로의 모든 순간들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피가 하나도 안 섞인 세 사람이 부모와 자녀로 만나 온전한 가족의 모습을 갖추게 된 날이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시작한 날이다.  아가, 우리 가족으로 와줘서 고마워.  우리, 행복하자!


2001년 2월 23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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