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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와가치 Aug 31. 2021

느긋해서 좋다.

베트남 이야기 2

베트남이 편안하고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느긋함'이다. 이게 성질 급한 사람에게는 속 터지는 일이지만 나 같이 게으르고, 좋게 말해 느긋한 사람에게는 스트레스 생길 일 없으니 좋다. 물건 배달 시간뿐만 아니라, 집안의 가전제품 서비스 약속 시간을 잡아놔도 제시간에 온 사람은 손안에 꼽는다. 수업 시간도 그렇고 커피숍에서 만남을 가질 때도 제시간에 오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일로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사람이 기계도 아닌데 어떻게 시간을 그렇게 딱딱 맞출 수 있겠는가.. 조금 더 기다려 주면 어때.

느긋한 성격이다 보니 기다리는 일이 그렇게 화날 일도 아니고, 느긋한 사람들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와 나는 각 계절이 두 번씩 바뀔 동안 연애를 했다. 그는 약속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철저한 사람이라 내가 커피숍에 도착했을 땐 어김없이 와 있었다. 나는 보통 10분씩 늦게 도착하지만 남자 친구는 단 한 번도 늦었던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늘 그렇게 나를 기다려 주는 남자 친구를 당연하게 여겼고, 그만큼 나를 사랑한다는 증명처럼 여겼다.


2년의 연애 기간을 마치고 결혼을 하기로 집안끼리 말이 오고 갈 때 남자 친구가 딱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고 했다. 결혼하면 시간을 잘 지키는 아내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잉? 그럼 그동안 나를 기다리는 게 힘들었던 거야? 그제야 대답하기를,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게 행복해서 그랬지만 아마도 우리가 결혼을 해서 함께 살게 되면 분명히 이 일로 부딪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부탁하는 거란다. 남편 말대로 실제로 결혼하고 나서 그 일들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같이 살다 보니 남편은 시간 개념이 지나칠 정도여서 강박관념이 있는 사람 같았다. 아내 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라도 약속이 생기면 두 시간 전부터 미리 준비를 다 해 놓고 시계를 확인하면서 다른 일을 봤다. 그리고는 약속 장소에 15분 전에는 가서 기다려야 편안해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남편이 그렇게 서둘러 움직이니 나도 덩달아 바빠져야 했고, 그게 은근히 나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곤 했다.


어린 학생 시절 남편은, 매일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등교하곤 했는데 누가 먼저 교문 안으로 들어간 흔적이 보이거나 교실 안에 누가 자기보다 먼저 와있으면  아주 기분이 안 좋았다는 거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가려고 아침마다 뛰어다녔다고 한다. 헐, 이해 불가다. 그래서 아침 일찍 가서 공부했냐고 물으니 아니란다, 일찍 가는 게 좋았을 뿐이란다. 참나, 왜 에너지를 그런 불필요한 일에 쏟을까?


어린 학생 시절 나는, 친구들이 등교를 마무리할 때쯤 그 마무리 그룹에 껴서 등교하곤 했다. 그래도 지각 때문에 곤란함을 겪은 적도 없고 지각 처리당한 적도 없었으니 내가 아슬아슬 살아왔대도 별로 문제가 없었다. 남편이 묻는다. 불안하지 않았어? 아니, 전혀!


결혼한 지 시간이 꽤 흘렀고, 우리 부부는 이제 누구와 약속을 잡으면 약속 시간 5분 전쯤 도착한다. 함께 살다 보니 지나치게 서두르던 사람은 아내의 영향을 받아 좀 느긋해졌고(서두를 때도 있긴 하지만), 나는 남편의 빠른 행동에 익숙해진 데다 늦어도 정각에는 도착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시간은 대략 늘 그렇게 된다. 



아무튼 나는 느긋한 이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좋다. 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나라 한국을 떠올리면 바쁜 회사원, 바쁜 엄마, 바쁜 학생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다들 부지런한 모습들이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니 젊은 학생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오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중에 한 학생이 항상 정각에 오는 거다. 우리 집으로 와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인데 늘  정각에 초인종을 누른다.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항상 정각에 도착할 수 있냐고. 그 친구가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선생님 아파트 1층에 일찍 도착해서 기다렸다가 시간 맞춰서 올라오는 거예요." 나는 그 친구의 말에 깜짝 놀랐다. 베트남의 이 찜통 무더위에 시간을 맞추어 기다렸다가 우리 집에 올라오는 거라니...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약속 시간 전에 오면 선생님 시간을 뺏는 거잖아요." 머리에서 땡~ 소리가 났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베트남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베트남 학생들에게도 선입견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은 "빨리빨리"라는 단어라고 알고 있다. 한국을 생각하면 행동이 빠른 사람들이 연상되고 모두 부지런하다고 생각된단다. 지금까지 내가 베트남을 느긋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 각자의 나라에게 서로 선입견이 있었던 거다.


베트남 학생이 선생님의 귀한 시간을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본 뒤로 나는 내 안에 있던 선입견들을 다 내다 버렸다. 시간관념은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다. 무더운 나라, 날마다 교통 체증이 심한 나라에서 서로 이해하고 상황에 맞추어 살아갈 뿐이지 결코 상대방의 시간을 함부로 무시하는 게 아니다. 단지 한국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많은 거고, 베트남에는 대체적으로 느긋한 사람들이 많은 거라고 표현해야 맞다.


혼자서 생각을 해봤다. 전체적인 그림에서 한국은 왜 바쁘고, 베트남은 느긋할까? 아마 그건 계절의 변화 탓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한국의 사계절은 좀 과장해서 눈 돌아갈 정도로 빠르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 오르는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초록빛 녹음 사이로 차를 쌩쌩 내달리며 바다로 떠나자, 그러다 돌아오는 길엔 빨간색, 노란색, 갈색 잎들이 하나 둘 떨어지는 풍경이 펼쳐지고, 눈 떠보니 온 세상이 온통 흰 눈에 덮여있는 겨울왕국 같은 장관이 펼쳐지는 나라. 눈 앞에 보여지는 풍경 때문에 마음도 덩달아 바빠지는 게 아닐까. 일도 많은데 사계절에 맞춰 옷장 정리를 하는 주부들의 고된 노동이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해마다 주부들이 하는 말,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해야지.". 봄이 오기 전에, 여름이 오기 전에, 가을이 오기 전에,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서둘러서 해 놓아야 할 일이 많은 나라다.


베트남의 남부는 우기와 건기 두 개의 계절이지만, 북부는 한국처럼 사계절이 다 있다. 북부의 경우에는 영상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습도가 높은 나라라서 나름 꽤 춥다. 중요한 것은 사계절 내내 자연 풍경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바라보는 내 집 앞의 풍경이 일 년 내내 똑. 같. 다. 그러니

봄이 오기 전에 뭘 해 놓을 일이 없고, 겨울이 오기 전에 한국처럼 월동 준비를 해야 할 일이 없다. 계절 탓이 클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느긋한 이 나라 사람들이 나는 이해된다. 


한국에서 바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계절에 쫓겨 다니던 삶에서, 이곳에 와서 일 년 사계절 내내 똑같은 풍경 아래 생활하다 보니 원래도 느긋했던 내가 진짜 나다운 모습으로 살고 있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으니 바쁘다거나 여유롭다거나 하는 것은 각자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일 것 같다. 


오늘도 역시 느긋하게 하루를 살았지만 내게 주어진 일은 미루지 않고 다 해냈다. 이젠 이런 삶이 익숙해져서 이곳이 계속 더 좋아지고 있지만 가끔 변화무쌍한 내 나라의 가을, 겨울 풍경과 알싸한 공기가 그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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