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중년 2
미루고 미루다가 백신 접종을 받았다. 한국이었다면 그나마 덜 걱정되었을 텐데, 그렇잖아도 날마다 시끄러운 백신 접종을, 그것도 남의 나라 베트남에서 맞으려니 마음이 복잡했었다. 고혈압과 함께 감기약 부작용도 약간 있는 내 상태도 걱정이 되었고, 또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좋지 않다고 하여 멈춘 상태인 A 백신을 베트남에서는 다수가 접종 중인데 어지간하면 대학생인 큰딸에게 접종시키고 싶지 않았다. 작은딸은 아직 나이가 안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드니 언제부터 예방 접종이 이렇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까.
엄마보다도 대범한 큰딸은 "위험하면 베트남 사람들이 맞겠어? 다 그게 그거지. 엄마는 혈압이랑 감기약 부작용 때문에 걱정이 되는 거라면 엄마는 맞지 말고 나 혼자라도 맞고 올게. 아니면 이 기회에 엄마가 한국에 다녀 오든가. 한국에서 맞고 오면 더 좋고." 한국에 있는 남편도 딸과 같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을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내가 미루고 있던 터였다.
해외로부터 들어오는 입국 비행기를 여전히 통제 중인 상황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돈도 많이 드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한국에 나갔다 들어올 때 기간이 남아 있는 비자조차도 인정해 주지 않고 베트남이 평소에도 까다롭게 구는 비자를 새로 발급 받아야 한다는 정보는 내 머리를 자동으로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었다.
이 와중에, 덜컥 맞기에는 부담스러운 그 백신이 현재 베트남으로 엄청 들어오고 있으며, 그 백신 뿐만 아니라 중국, 태국,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수입된 다양한 백신들도 마구 들어오는 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오니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또한 베트남 정부에서는 예방접종 카드제를 곧 시행할 예정이라 앞으로 통행이나 기관 등의 출입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백신 접종을 권유가 아니라 압박하는 듯한 뉴스를 매일 하루 종일 내보내니 날마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외국에 산다면 그 나라의 규칙에 따라야 하는 게 맞는 것이니 어차피 맞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내가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딸의 상황을 잘 아는 지인의 소개로, 한국에서 많이 접종 중인 B 백신 정보를 듣고(어느 병원에서 접종 중인지 본인들이 알아서 찾아다녀야 한다) 신청서를 제출했고 다행히 1차 2차 모두 접종을 잘 마쳤다. 그런데 우리의 2차 접종이 끝나자마자 B 백신이 엄청 들어왔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자기들이 원하는 백신 종류를 선택해서 접종 받기 시작했다. 에고, 그동안 우리는 뭐 하러 그렇게 마음 졸이고 수소문하고 다녔는가. 숙제 하나 해치워서 마음이 한결 가벼우니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딸과 함께 서로를 위로했다.
무서운 소문들이 많이 돌아서 오랫동안 겁에 질려 있었는데 막상 접종실에 가서 의자에 앉으면 담담해졌다. 1, 2차 모두 간호사가 약 병을 들고는 이 약의 이름은 무엇이며, 유통기한도 말해 주고, 약이 들어있는 주사기를 보여주며 이만큼의 주사액을 놓을 거다,라고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데 베트남에 와서 이런 감동은 처음이었다. 베트남 병원도 이렇게 좋아지고 있구나. (베트남 병원은 의사들이 환자들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1차 때는 언제 찔렀는지 모를 정도로 아프지 않게 주사를 잘 놔줬는데 2차 때는 주사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윽! 하고 소리가 나올 만큼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접종 때마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게 이런 거구나.
1차는, 약간의 어지러움(감기약을 먹으면 평소에도 이런다)과 다음 날 접종한 왼쪽 팔이 뻐근하게 아픈 정도였어도 참을만했다. 큰딸은 전혀 증세가 없다고 하면서 감기약 부작용이 있는 나에게 와서 열도 체크하고 머리도 만져보곤 했다. 2차 때는 접종 순간부터도 그리 아프더니 다음 날부터 몸살 난 것처럼 온몸이 쑤시고 미열도 나고 오한까지 왔다. 새벽에 너무 아파서 깨어나는 바람에 약을 먹어야 할 정도였다. 큰딸은 2차 때는 약간의 몸살 기운이 있긴 하지만 약을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라면서 먹지 않았다. 엄마가 걱정이 되는지 1차 때처럼 수시로 안방을 들락거리며 내 상태를 살펴 주었다. 3일째 되던 밤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고 5일쯤 지나자 그제서야 살 것 같았다.
백신 접종은 같이 했는데, 빌빌대는 엄마가 어떻게 될까 봐 큰딸은 엄마의 상태를 살피며 수시로 열도 체크하면서 괜찮은지 계속 확인하러 왔다. 온라인 수업과 학원 수업 때문에 바쁜 동생 식사까지 챙겨 먹이느라 종종걸음을 하고 다니는 큰딸을 보고 있자니 그저 고맙기만 했다. 분명히 내가 엄마고 어른인데, 최근 들어 내가 더 큰딸에게 보호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는데 백신 접종 후로는 더해졌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체력을 길러서 엄마가 여전히 쌩쌩하고 아직은 보호받을 처지는 아니라는 걸 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이제는 엄마보다도 무거운 물건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딸들 앞에 나는 매일 연약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함께 대화 나누다가 종종 옳은 소리 하는 딸들 앞에서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사소한 실수들에 종종 내가 작아지곤 하는데 어째서 이눔의 건망증까지 날로 심해지고 있는지 엄마로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약함과 허당끼만 계속 들통나고 있다.
우리 딸들이 아기들이었던 게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냐 그래... 요 며칠 딸들에게 보호 받고 나니 내가 갑자기 몇 년 폭삭 늙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