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을 따르는 여정

허성애 민화 평론

by 김윤경

그림이 갖는 치유의 효과는 단순히 “기분이 좋아진다”는 수준을 넘어, 인간의 감정·기억·신체 감각까지 깊게 작용한다. 그림은 언어 이전의 영역에 닿아 있는 것으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 상실, 기다림, 고요 같은 감정이 형태·색·공간으로 정제되어 내면에 응축된 감정이 안전하고 자연스럽게 표출되게 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기억을 직접 마주하면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이 그림 속 빛, 사물, 풍경으로 옮겨질 때 우리는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다. 이 거리감은 고통을 무디게 하고,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바꾼다. 이러한 미적 경험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심리적 정화를 느끼게 된다. 허성애 작가에게도 그림은 뜻하지 않았던 교통사고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심신의 고통을 경감시키며 다시금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허성애 작가는 주로 민화를 그리고 있는데 그림을 그리게 된 극적인 계기와는 달리 자신의 그림에 대해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에게 그러했듯 그림의 치유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관객 개개인에게서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 속 내밀하고도 보편적인 정감이 관객 고유의 기억을 소환하여 자연스러운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좋은 그림의 속성이라 생각하는 허성애 작가가 민화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민화’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공이나 일반 민중이 그린 생활 속 그림이며 궁중이나 사대부의 회화와 달리 삶의 바람, 기원, 유머 등이 자유로운 형식으로 드러난 것, 작가 개인의 개성보다 공동체의 염원과 정서를 앞세우는 익명성에 기반한 장르이다. 원근법이나 사실성보다 소박하고 자유로운 표현방식으로 그림 속 상징과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 민화는 일정한 소재의 묘사와 오방색을 중심으로 한 선명한 색을 통해 길상(吉祥)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호랑이와 까치를 통해 권위를 드러내고 액운을 물리치며 꽃과 새를 통해 자연의 조화, 부부의 화합을 비는 것이다. 이 밖에도 학문을 익혀 자신을 완성하게 하는 책가도, 장수를 비는 십장생도, 효도, 충절, 신의 등의 가치를 일깨우는 문자도 등 민화에는 보편적 인간이기에 추구하는 소망과 덕목 등이 투사되어 단순한 그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에 와서는 전통 민화의 상징을 바탕으로 현대적 색감과 구성을 가진 창작 민화로 재해석되어 현대 민화는 개인의 내면, 정서, 기억 등을 담아내는 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였다.

좋은 그림은 작가의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보는 이 각자의 기억, 어릴 적 창문 너머 혹은 동화 속 풍경, 저녁의 노을빛, 누군가를 기다리던 순간 등의 다양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그 사각형 안에 조용히 마법처럼 자리한다. 엷은 분홍, 보라색을 띤 수국꽃과 그 주위를 맴도는 나비, 연둣빛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한 쌍의 새, 정갈한 물결 문양과 구름 문양, 서로를 바라보며 나는 두루미와 붉은 해. 모두 허성애 작가가 그림을 통해 받은 치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도상들이다. 그림의 치유는 위로하거나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그저 그 자리에 색과 형으로 존재함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을 바꿔 놓는다. 그러한 형과 색은 어느덧 복과 평안을 기원하는 강한 상징의 매개체가 되고 말로 하지 못하는 소망을 전하는 중대한 사건이 된다. 결국 그림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을 더듬는 일인 것이다.

허성애 작가는 오랜 시간 ‘민화’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삶과 감정을 조용히 비추어 왔다. 그에게 민화는 전통이기 이전에 자신의 언어이다. 정해진 규범과 상징 안에서 출발하지만 그 속에 항상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스미는, 반복되는 형상, 색을 통해 관습을 전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작가는 자신만의 시간과, 호흡, 그리고 삶의 태도를 축적시킨다. 그는 과거의 민화를 단순히 재현하기보다 민화가 갖는 자유로움과 솔직함을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묻는다. 작업 과정 속에서 익숙한 상징은 그의 사유를 만나 개인적 서사와 교차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화려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말을 걸어오는 그림. 허성애 작가가 그림을 통해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보편적이고도 특수한 ‘민화’라는 오래된 그릇에 담아 온 그의 시간, 마음, 그리고 숨결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 앞에서 그러한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특별한 미적 경험을 다. 작가의 치유의 시간이 축적된 그림을 통해 우리 자신의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을 따르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 그 속에서 결국 작은 소망과 위로를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마법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화가, 미술번역가 김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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