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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증후군 아들의 일상 - 1편

세상 떠들석하게 신고를 하며 태어난 작은아들

by 박종흠

나의 작은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났다. 태어난 지 벌써 22년째이니 올해 생일이면 만 나이로 22세다. 태어난 날 아침 병원에서 일어난 혼란스러운 상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분만예정일이 지났음에도 산통도 없는 상황이 며칠째 되어가던 어느 날 주치의 선생님께서 제왕절개를 하자고 제안해 주셨다. 그렇게 제왕절개 하는 쪽으로 의사결정이 되어서 난 아침부터 병원에 대기하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하는 시점에 급하게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의 외침이 병원 복도를 울려 퍼졌다. 급하게 분만 실로 뛰어가니 간략한 상황설명과 함께 바로 주차장으로 가자고 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구급차 1대가 대기하고 있고, 차에는 신생아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우리 작은 애다. 아기는 자가 호흡이 안되어서 산소호흡기를 부착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직감적으로 긴급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한시가 바쁩니다. 상세 설명은 이동하면서 해드릴 테니, 빨리 차에 타세요.”라는 병원 측의 이야기에 얼떨결에 차에 올랐다. 구급차는 긴급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상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제왕절개를 해서 신생아를 출산하였으나 아기가 울음이 없고, 자가 호흡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무슨 상황인지 작은 병원에서는 알 수가 없어서 인근 도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구급차는 신호도 무시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나는 구급차와 한 몸이 되어 그렇게 달려 큰 병원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되어서 도착 병원에서도 관계자분들이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TV 에서 긴급한 환자를 수송하는 모습을 보던 그대로였다. 구급차 침대에 누워있는 우리 애를 응급실의 침대로 이동한 후에 뛰다시피 하며 우리 애가 누워있는 침대를 밀고 병원 안쪽으로 달렸다. 구급차를 운전해 주신 기사님께 간단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나도 병원 안쪽으로 뛰어서 따라갔다. 응급실로 이동했다. 주치의 선생님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 하고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을 그냥 쳐다보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고, 어느정도 상황이 파악 되었는지 주치의 선생님이 보호자를 찾는다고 해서 진료실로 갔다.


아기는 자가 호흡이 안되어 우선 인큐베이터에서 2~3개월 정도 지내야 할 거 같다고 했고, 아마도 다운증후군이 아닐까 의심이 됩니다. 확인을 위하여 염색체검사를 진행하고 있고, 결과는 일주일 정도 지나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작은애 입원 절차를 마치고 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있는 병원에 들러서 아내에게 오늘 일어난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큰애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에 나올 때 아주 거창하게 신고를 했던 작은애는 그후 2개월 정도를 대학병원 인큐베이터에서 생활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작은애가 인큐베이터에 있는 동안 아내는 매일 병원을 방문해서 하루에 2번 주어지는 면회 시간에 애를 바라만 보고 있다 오는게 하루 일과였다. 작은애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무도 자신을 보러 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작은애가 매우 슬퍼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매일 작은애를 보러 갔을 거다. 엄연히 부모가 건강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말이다. 병원 측에서 필요하다는 물건이 있으면 기저귀, 물 티슈 등을 사다 넣어주고 오는 날의 연속 이었다. 휴일이면 가족 전체가 작은 애를 보기 위하여 병원을 찾아서 잠깐 주어지는 면회 시간에 맞추어 쳐다 보고 오곤 했다. 작은 애는 부모가 와서 보고 있는지도 모른 체 인큐베이터 안에서 손발을 꿈틀꿈틀 하고 있다. 작디작은 몸으로 “나 많이 아파요, 나 좀 안 아프게 해주세요” 라 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는 “ 빨리 나아서 집으로 가자” 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 빨리 집으로 대려 가야 할 텐데” 걱정이 되었다. 아이를 출산 했지만 한번 안아 보지도 못하는 부모 심정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가슴이 미어지는 상황이다.


그렇게 2달여를 인큐베이터애서 지낸 우리의 작은애가 드디어 집으로 왔다. 이후에는 부모인 우리는 온통 작은애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큰 애가 소외 받는 느낌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도 또한 부모로서 크게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 기억이 떠올라서 큰 아들이 성인이 된 지금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때 많이 외롭고 힘 들었지? 엄마 아빠가 너를 많이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 했어. 동생에 대해서 너는 걱정 하지 않아도 돼, 엄마 아빠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다 할 테니까” 혹시라도 큰 아들이 엄마아빠가 안 계시는 상황이 왔을 때 다운증후군을 안고있는 동생의 부양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지나 않을까? 부모가 동생만 바라보고 있던 그 당시에 소외된 상태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아직도 그 때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큰 애가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자라면서 성격이 너무 내향적 이고 말도 잘 하지 않아서 혹시나 그 때의 영향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지금은 성격이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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