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여자가 들려주는 둘의 영혼적인 삶과 전생의 이야기
2.여자가 들려주는 둘의 영혼적인 삶과 전생의 이야기-2
그래서 생이 거듭될수록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어떤 영혼의 목표치는 더 높고, 더 정교해지기 마련인데, 한편으로는 풀기 어려운 실타래 같은 것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고 해야 할까.
예를 들어, 어떤 어떤 영혼적 존재가 ‘ 이번에 선택한 지구의 삶에서의 나는 타인에 대한 의존성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라고 선언하게 되면, 그에 걸맞는 상황들이 지구의 삶에 육화해서 창조되게 된다.
그런데 그에 걸맞는 상황들이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때로 고통을 동반하기도 하고,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었음에도 자신이 왜 그런 경험을 창조(겪게 되었는지)하게 되었는지 그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 고통스런 경험이 고통스런 기억으로만 각인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앞서 예를 든 ‘타인에 대한 의존성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라는 선언을 한 존재가 지구에 육화를 했다고 치자. 그 존재가 타인에 대한 의존성에서 자유롭고자 선택한 상황이 사랑하는 존재와 이별을 겪는 것이라고 치자. 그 이벤트를 겪고 나서 스스로 ‘아 나는 타인에 대한 의존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 상황을 겪었구나’ 라고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사실 대부분은 이별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을 거다. 그리고, 대부분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채 정화되기도 전에 한 생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음 생에도 비슷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다. 거기에는 약간의 깨달음과, 고통스런 경험치로 인해 정화되지 않은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서 때로 꼬여버린 실타래 같은 에너지로 남아있기도 한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자신의 목표치를 위해 스스로 그런 계획을 한 것이라면, 왜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일에 대해서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는걸까?’ 그러니까, 앞서의 예로 들자면, 의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삶을 계획한 존재가, 왜 이별을 그저 고통으로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영혼들이, 지구의 삶을 계획할 때 영혼적인 시야를 많이 가려놓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이라는 것을 안다면 지구에서의 생생한 몰입감이 떨어지게 되고, 그러자면 온전한 깨달음도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 경험을 하더라도, 막상 영혼 자체도 자신의 두려움을 한번에 깨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부분보다 훨씬 크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의 영혼에게(제한적으로) 인도를 받고 있다. 자신의 영혼과 합일된다고 해서, 인간사에서 갖는 모든 어려움이 뿅 하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불완전하듯, 영혼들도 모두 각자의 숙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분명 인간 자신보다는 훨씬 크지만, 크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크다는 거다. 자기가 현재 발휘하고 있는 지혜보다 영혼이 훨씬 더 큰 지혜를 갖고 있을 수 있고,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두려움 보다 훨씬 큰 두려움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이 거기에서부터 나왔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바뀌기 위해서는....그 사람의 영혼의 성격까지 개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크기를 인간의크기보다 100배 정도로 본다면...‘아 내가 조금 변했구나’에서 훨씬 더 나아가 그것이 뼈에 새겨질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유의미한 변화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가능하며, 그것을 실제로 이뤄 낸 존재도 많이 있다.
아무튼 대부분 지구인들은 인간적인 시야 안에서 살아가고, 자기 자신의 영혼과도 아주 제한적으로 소통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자기 자신의 영혼과 합일점이 꼭 필요한 때가 온다. 인간적인 현상으로는 더 이상 다음 스텝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그저 꼭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알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혹시나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자꾸 신호를 보내는 그런 순간이 와도, 너무 놀라지 마시길. 당신은 미친 게 아니니까.
그래서.....나의 쌍둥이불꽃과 나의 이야기를 해 보자면...
태초에 한 몸으로 태어났던 우리는 정말로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더 할 나위 없다’는 단어가 꼭 맞을 만큼. 말 그대로 우리는 서로가 우주의 전부였다. 진실로, 그때는 우리 둘만으로도 너무나 충만했기에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한동안은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그 시간이 무한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곧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우리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 그 이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로가 세계의 전부였던 것이 아니었던 걸 알았던 그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절망감, 그리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교차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서로가 우주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었다. 우주는 빠르게 팽창하고 있었다. 와중에 더 더 깊은 어둠들도, 더 더 빛나는 빛들도 창조되었다. 우리의 불꽃이 점점 미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불꽃이 더 작아지기 전에 성장해야 했다. 더 이상 둘로는 충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갈라섬을 선택했다.
우주는 점점 더 진화했다. 더 밝은 빛이 생겨났고, 동시에 더 깊은 어둠이 창조되었다. 빛과 어둠, 각자의 깊이가 동시에 반대쪽의 깊이감을 창조하듯이, 우리 사이도 각자의 특성이 강해지면서 점점 각자만의 성격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세상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한쪽이 한쪽을 보완해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깊이감이 서로를 깊어지게 하듯이, 또 서로를 보완하듯이. 하나가 온전하려면 한쪽이 한쪽을 보완하는 성질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 한쪽이 사방팔방으로 튀려고 하는 성향이 강해질수록, 한쪽은 그것을 붙잡는 성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한쪽의 극단성이 강해지다 보니 우리는 서로를 보완하기 위해서 더욱더 극단성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깊은 어둠 옆에서 빛이 더 밝아지듯이. 더 밝은 빛 옆에는 필연적으로 더 깊은 어둠이 생겨버리듯이.
사방팔방으로 튀려고 했던 것은 사실 내 쪽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려 애를 쓴 것은 그였다. 내가 사방팔방으로 튀려 했던 것은...사실 우리 말고도 더 큰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우리의 세계가 언젠가부터 너무나 하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큰 우주 위에, 더 큰 우주가 있다. 더 위대한 우주 위에, 더 위대한 우주가 있다. 이 세상의 다양함과 온전함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나같은 존재는 너무도 하잘 것 없이 느껴졌다. 나의 한쪽 역시 하잘 것 없이 느껴져버렸다. 나는 우주의 여러 스승을 보았고, 통치자를 보았다. 세상에는 더 고차원의 꺠달음과 진리가 있었다. 그 진리의 아름다움에 내가 없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런 위대한 존재. 더 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존재. 지금의 세상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우리도 우리의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보자, 하고, 나의 한쪽을 열심히 설득했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사실, 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에너지였다. 이렇게 하면 너에게도, 나에게도 좋은거야. 저 큰 우주는 이렇게 만들어졌대, 우리도 더 큰 세상을 만들어보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이런게 우주의 아름다운 이치래, 이게 내가 알고 싶던 더 큰 진리였어.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더 큰 진리에 대한 갈망은 그에 대한 속박과 강요로 이어졌던 것 같다. 본디 유지하려는 관성이 강했던 나의 쌍둥이불꽃은 - 하긴 사방팔방으로 튀는 내 에너지를 감당하려면 그도 점점 유지하려는 성향을 강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갈수록 복지부동이 되어갔다. '도대체 우리에게 부족한 게 무어냐'는 것이었다. 전방지축 같던 내 에너지를 아버지같이 감당하던 그였다. 그럴수록 나는 더 그악스럽게 그를 가르치려고 들었고, 당연하게도 그는 더욱 귀와 입을 닫았다. 그는 언젠가부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