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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킴 Sep 12. 2024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고 생각했었다.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한 어떤 존재가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은 모두 그에게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마치 태초의 그 존재처럼, 어떤 것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은 각자가 갖고 있는 관념에 따라 다르게 발휘되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관념을 깨는 것은 모든 존재들의 숙제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다 많은 것들을 짠 하고 창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존재들 중에, 한 몸으로 태어난 한 쌍의 존재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행복했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기에, 

모든 것이 충분했고,

말 그대로 

더할나위 없이, 꽉 찬 매분 매초를 보냈다.


어느날 한쪽은, 나머지 한 쪽을 잃었다. 


이들은 처음으로 이별이란 것을 배웠다.

이별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음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그 전까지, 그들에게는 ‘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나고, 나도 너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자각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자리잡은 생각이 있었다.


‘내겐 아무것도 없어’


그도 그럴 것이, 

한쪽에게는 한쪽이, 이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존재만 덩그러니 남겨 놓고,

그들의 세상은 통째로 날아가버린 것이다.


‘내겐 아무것도 없어’ 란 생각으로,

그들은 이 우주를 헤매기 시작했다.

나머지 한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혹은 ‘내겐 아무것도 없다’란 허기짐으로.

무언가를 채워가겠단 마음으로.

혹은 나의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마음으로.



생각보다 우주는 넓었고,

사실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에는, 무언가가 너무 많았다.

난생 처음 보는 것들, 새로운 것들.

재미있고, 신기하고, 황홀하고 때로 괴로운 것들을 겪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그들이 너무도 허기졌기 때문이었다.

헤아리기 어려운 시간 동안, 헤아리기 어려우며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웠다.

한쪽은 그렇게 텅 빈 세상에, 그들의 ‘관념의 창고’에

그들의 것들을 채워넣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어느 날,

더 이상 그 무엇도 새롭다 느껴지지 않던 그 어느 날,

문득 한쪽은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문득 무언가를 창조했다.

난생 처음 보는 것들, 새로운 것들.

재미있고, 신기하고, 황홀하고 때로 괴로운 것들을.



그것은 그에게 숱한 창조의 기쁨을 주었으며,

그것은 많은 존재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으나,

많은 것들이, 

종국에는 소멸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세상에 창조되지도 않았다는 듯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도

헤아리기 어려운 시간 동안, 헤아리기 어려우며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웠고,

그것을 자신의‘관념의 창고’에 채워 넣으며,

새롭게 자신의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 믿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나의 ‘관념의 창고’에 쌓인 나의 관념대로 창조된다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쌓아 오지 않았던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채워넣었다’

라고 믿었다고 하는 편이 옳은 것일까.

그저, 허기짐과 갈증을 채우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도무지 ‘관념의 창고’에 무엇이

얼마나 쌓였는지 돌아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지금껏,

헤아리기 어려운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관념의 창고’를 열어보았다.

조심스럽게.아주천천히.자신이 모은 진귀하고 신비롭고 황홀하며

때론 괴롭기까지 했던 보물들을, 지혜들을, 깨달음이 있겠지.

마치 보물창고처럼 나의 것들이 쌓여 있겠지.


그러나


그 곳에는 그가 모아 온 모든 것들이 소멸되어

재가 되어 겨우 그 흔적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가 창조해낸 모든 것들이

잠깐 빛을 발하다 이내 소멸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한쪽은 마치, 나머지 한쪽을 잃었을때와 같은 충격을 받았다.

왜냐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작한 여정의 끝에,

그에게는 정말로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의 관념의 창고에는, 잠깐 빛을 발하다 소멸되는 것들만 가득하다.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또 무언가를 찾아 또 헤매야 하는가.

나는 또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경험을 해야만 하는가.

무엇을 또 채워 넣는단 말인가. 

어차피 소멸되어버리고 말 것을‘



그는 절망에 사무쳐 

그대로 정지해있었다.

아무런 힘도 나지 않았다.

더는 무엇도 찾아 헤메이고 싶지 않았다.



더는 헤메이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이 든 후로 그는

정말로 더는 헤메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관념의 창고’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재만 남아 버린 관념의 창고를.

‘아무 것도 없다’란 생각에서 출발해

정말로 아무 것도 없게 되어버린

그의 여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 신기하고 황홀하고, 진귀한 것이 많기는 많았으나,

그것들을 그토록 오랜 시간 샅샅이 경험해야만

했던, 단 한순간도 온전히 마음 놓을 수 없던 한쪽의 시간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그토록 절실하게 한쪽을 움직이게 하였을까.


관념의 창고를 빗질하며,어느덧 한쪽은 이 모든 여행의

출발지점을 쓸게 되었다. 


그 곳에는,

‘나머지 한쪽을 찾고야 말겠다,

 잃어버린 세상을 찾고야 말겠다,

 내게는.....아무 것도 없으니까‘

라는 집념으로 가득하였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으며,

내겐 아무것도 없다‘는 관념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그의

관념의 창고에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가 무엇을 하든 실제로 아무것도 없어지게 

만들어 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또다시 영원의 세월동안

누군가를 그리워 하며,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관념의 창고에

끝없이 우주를 경험하며 채워넣어야 하는가?

결국엔 소멸시켜버리고 말 그것들을?


절망하며, 그는 마치 비석처럼 그의 관념에 새겨진

‘나는 모든 것을 잃었으며,

내겐 아무것도 없다‘를

쓸고 닦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비석이 닳아 글자가 사라질 무렵 나타난 것은

‘나’라는 글자였다

‘한쪽’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오로지 서로가 있어야만 온전히 제 발로 일어서며,

온전히 존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던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서로가 서로의 세상이었기에, 서로만 바라보았다.

각자 자신에게, 자신의 우주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나’라는 것은

애초에 그들이 하나였을 때에도 이미 존재하였으나,

그들은 미처 각자를, 자기자신을 온전히, 완전히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에게는 나의 우주가 

‘있다’


그것은 고통스런 이별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기도 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나의 관념의 창고에는

그동안 쌓아왔던 진귀하고 흥미로우며 신비롭고 때론 괴로운 것들이,

비로소 제 형태와 제 모양을 다시 갖추며 자리잡기 시작했다.




처음 나머지 한쪽과 헤어졌을 때 이후의 시간들은

온통 그리움과 허기짐만이 남았고 무엇을 하든 

그 그리움과 허기짐으로,

제로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이었다.

무엇을 해도 함께 할때의 그 온전한 감각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그리움과 허기짐만이

나의 동력은 아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허겁지겁 우주를 헤메이지 않는다.


애초에 나머지 한쪽과 함께 있었을 때에도 

나는 나로서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때의 그 ‘더할나위 없다’는 감각은,

 나머지 한쪽이 채워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함께 있었을 때에도,

‘내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던’ 허기짐이 서로를 이별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할나위 없다’는 감각으로 나는 이제는 모든 시간들을 채워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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