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시작을 'AI와 함께하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란 주제로 시작했었다. 그리고 나는 저 주제를 위해서 앞서 긴긴 글을 썼다.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가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사실 우리 고민의 본질은 AI가 아니라 결국 '창조력'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요약하자면 우리의 고민은 예전부터 저것이었다. 단지AI라는 도구의 발달로 그것이 좀더 촉발되었을 뿐이다. '지식의 습득'이 인공지능에게 밀릴 수 밖에 없는 시대다. 거기다가 AI는 인간의 영역이라고만 여겨졌던 창작도 꽤 잘한다. 아마 갈수록 감정 비슷한것도 고도로 흉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많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흐름이다.
다시 자문해보자, 우리는 코로나를 비롯해서 수많은 외부의 요건들로 인해 우리의 행과 불행이 갈리고 흔들리는 삶을 살았다. 여기에 인공지능까지 가세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뭔가 묘책은 없는 걸까?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학위를 더 따고, 스펙을 더 쌓고, 영어공부를 더 하고,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일까? 그런 것도 물론 많은 방법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그것만이 길'이라는 것은 좀 너무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싶다. 지식만으로 뭔가 승부하려는 시도는 한계가 너무 많아질 수 있다.
답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너무 뻔한 답이라고? 그렇지만 이제는 '나'에 당신의 영혼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영혼과, 자아가 모두 함께 원하는 것'을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 당신이
'진정'원하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어렵다. 사람은 대부분 나의 익숙한 습과 관성에 머무르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안정감을 행복이라 여기기도 하고, 또 그 안정감 자체가 진짜로 필요한 존재라면 정말로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아주 깊이, 잘 살펴봐야 한다. '내가 지금 원한다고 여기는 것이, 나의 영혼 뼛속 깊숙이 진짜 원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나의 영혼도 나인데, 왜 나와 시야의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몇 번 설명한 바가 있다. 인간의 의식보다 자신의 영혼은 훨씬 더 크다고 했다. 영혼의 영역은 빙산의 일각에서 수면 밑에 잠긴 엄청나게 큰 부분이라고 했다. 지구체험을 위해서 일부러 닫아놓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구의 삶에 몰입하다 보면 자신의 영혼의 울림은 잘 듣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영혼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영혼들이 바라는 것은 밤하늘의 별의 갯수만큼 많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이라면 '자유로움'을 바라는 영혼일 것이다. '자유로움','영혼'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어떤 인간적인 사회성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신이 원하는대로 유랑하며, 여행하는 그런 삶을 떠올리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영혼이 원하는 자유로움'이란 '나의 속박'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의 속박'이란 대부분 '내가 나 자신이라 믿었던 그 모든 것'일 수 있다. 사실 그것들을 한 번에 깨나가기란 어렵겠지만, 우리는 일상의 많은 순간에 이러한 것들을 마주한다. 내가 정말 혐오하고, 싫어했던 인간형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그런 포지션의 인간이 되어버린다던가, 정말 싫은 사람과 함께해야만 하는 상황들에 마주한다던가 하는 상황들 말이다. 또 내가 승승장구,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람이 어느날부턴가 예전에 사용하던 그 어떤 성공방식을 적용해도 더는 먹기지 않는다던가, 하는 상황들처럼, 나의 속박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지금까지는 나를 지켜주었지만, 어느 시점에는 벗어 던져야만 삶이 다음 스텝으로 전개되는 경우들이다.
그래서 영혼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고의 시간과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내가 너무나 싫어하고 혐오하는 인간형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된 사고의 틀, 인식의 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도덕적 관념 때문일 수도 있고, 전생의 트라우마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결국 불편한 건 내가 된다. 내가 싫어하는 게 적고, 내가 세상만물을 마주해도 별다른 반발심이 들지 않고 그저 어울려 지낼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내가 할수 있는 영역과 폭이 그만큼 넓어진다는 거다. 선택지가 무한히 커질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과정에서 상당한 마찰과 불편함을 마주할 수가 있는데, 당신은 이것을 '나와,나의 영혼 모두가 진실로 원하는 상황이니 이 상황을 잘 살펴서 나의 자유를 찾아보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짜증부터 날 것이고, 내가 피하고픈 상황일 수도 있으며, 자꾸 저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인생 자체가 불행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우울감이 심하게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내 앞에 어떤 반복적인 테마로 사건이 발생하고, 내가 화가 많이 나고, 이성을 잃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나와,나의 영혼 모두가 진실로 원하는 상황이니 이 상황을 잘 살펴서 나의 자유를 찾아보자'라고. 잘 안된다. 어렵다. 그 어떤 깨친 사람도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부분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그러나 해당 부분을 자아가 지혜롭게 알아차리고, 인간적 삶으로서 표현해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느덧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에너지로 자리잡을 것이고, 당신은 해당 부분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것밖에 못 하던 사람이,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내 시야가 넓어지고, 세상에 대한 나의 이해가 넓어지고,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며, 또 그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깊은이해가 가능하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커질 수 있다.
선택지가 무한히 커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곧 영혼이 원하는 자유이고, 곧 내 창조력이 커진다는 이야기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영혼적인 자유이기도 하고, 그 자유로워진 에너지로 내 창조력을 키워서 내 삶에 물현화 하는 것이다.
우리 자아와 영혼이 결국 원하는 것은 '창조력'그 자체를 키우는 것이다. 창조력은 단지 돈 자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창조하는 좀더 광범위한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나와, 내 영혼이 동시에 원하는 것을 잘 살펴보고, 나의 창조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바라는 방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