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lea Oct 22. 2024

선과 악, 유용한 사고틀일까 넘어야 할 경계일까

분리감 극복하기



 지구상에는 현재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인해 짐짓 평화로운 듯 보였던 지구 곳곳에 전운이 점차 감돌고 있다. 사실 싸움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 친구끼리 치고받고 싸운 다음에 묵은 감정이 풀어지고 관계가 돈독해지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그치만 상처뿐인 싸움도 많다. 이쪽에서 한방 때리면, 저쪽에서는 반격으로 쎄게 때린다. 각자 싸움의 명분은 있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극단성은 커져만 간다. 나중에 되면 명분 따위 중요하지 않아진다. 점점 그냥 개싸움이 되어간다. 


 왜 지구상에는 싸움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 걸까? 그냥 인간이란 존재는 원래 그런 걸까? 그런데 그렇게만 말하기에는 우리는 이미 여러번의 큰 전쟁을 겪었고 그로부터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유명한 이론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이 한마디에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강력한 제한성이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토인비의 말이 딱 맞다. 어떤 한 사상이나 세력이 등장한다. 그 사상이나 사회는 완벽하지 않고 어떤 부작용들이 항상 발생한다. 그럼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짐짓 그 문제점을 해결한 듯 보이는 어떤 사상이 등장해서 한 사회를 장악한다. 그때마다 기존 사회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은 '마침내 유토피아가 왔다'며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유토피아가, 유토피아였던 적이 있나? 이전 사회에서 이어지던 문제는 새로운 정권이 생겨나도 그 이름만 바꾼채 반복되곤 한다. 인류가 거기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있던가?


'오락 가락의 진폭'이란 관점에서 볼때, 인류는 거기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한번도 없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인류가 진화해왔다고 믿지만, '분리감'이라는 테마로 보면 인류는 계속해서 새로운 분리감을 창조해나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는 인류에게 희생과 사랑을 가르쳤지만, 그로 인해 '예수를 믿는 자'와 '안 믿는 자'라는 분리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 분이 그런 것들을 결코 원했을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리고 그 안에서도 수많은 분리감은 있다. 종교 안에서도 내가 더 적통이고, 너는 덜 적통이고, 쟤네는 이단이니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분리감들이다. 현재까지도 예수가 보여준 극단적 사랑과 그 반동은 이어져서 많은 갈등을 낳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뒤엎을만한 혁명들의 경우도 그렇다. 전제군주의 억압속에서 폭발해버린 러시아 혁명은 세상을 바꿔 줄 듯 보였지만 새로운 독재자들이 연이어 등장했고 지구는 두가지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또다시 휩싸였다. 어쩔 수 없었다. 지구가 원래 그런 곳이다. 우리가 가진 이원성이 현실로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우리의 에너지가 우리의 현실을 만드니까 말이다. 


 우리는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 짐짓 어려운 개념과 이상으로 수없는 토론을 반복한다. 또 그것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가진 한계에 대해 토론하고 나름대로 합의점을 찾아간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원적인 개념으로는 선과 악/ 좌파와 우파/ 남자와 여자/ 동양과 서양/ 남한과 북한 등등 엄청나게 많이 있다. 사회의 측면으로는 이러하지만, 결국 이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에, 이것을 개인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강력한 이원성으로 우리는 칠갑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강력한 경계가 사실 모든 이원성을 만들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상이나 이념 같은 것들은 우리의 경계가 만든 부차적인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사상과 이념에 대해 어려운 말로 토론하기 전에 우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앞서 말한, '나의 영혼과 합일되어 간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본다'라는 이야기도 된다. 앞서 우리가 우리의 영혼과 합일되어 가면서, 우리의 카르마인 우리의 두려움이나 제한성을 깨 나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것 또한 결국 '나'라는 경계를 깨 나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우리 각자가 가진 어떤 속박에서 자유로워 질 때, 우리는 좀더 행복할 수 있고, 이렇게 충만한 행복으로 바뀐 우리 영혼의 에너지로 이 지구의 에너지도 바꾸어 나갈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