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성 잡기
나의 영혼과 좀더 합일되었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한번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때부터가 시작이다. 인간의 영혼은, 말하자면 빙산의 일각과 같다. '내가 알고 있던 나'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자아적으로 발현된 '내가 알고 있던 나'보다 훨씬 극단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영혼과 친해지다 보면 내 영혼이 가진 극단성이 자아적으로 훨씬 더 크게 발현될 수 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가 어려운 이유가 그 때문이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인간적으로 어떤 사건들을 겪었고, 그에 대해서 충분히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쳐도, 그것이 '실제 내 것'으로 되기까지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 내 것'이라는 이야기는, 나의 깨달음이 나의 영혼에까지 닿아 내 영혼의 성격까지 개조된 상태까지를 이야기한다. 내 영혼의 에너지까지 바뀌어야 내 삶이 바뀐다.
영혼의 에너지 사이즈는 자아의 보다 수십배~100배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적인 나'보다 100배나 큰 '영혼적 나'의 오랜 습까지 바꾸려면? 실제 잘 고쳐지지 않는 나의 오랜 습을 의식적으로 잡아나가야 된다. '나 이제 좀 되었다'싶다 하면 비슷한 사건을 또 겪을 것이다. 그만큼 한 영혼의 습을 잡아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왜 그렇게까지 나의 극단성을 잡아나가야 하느냐고? 앞서 말했듯 인간은 보다 자유로운 창조력을 획득하기 위해 지구에 왔다고 했다.때문에 내가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카르마와 마주하게 된다. 내가 어느 부분이 약한지 알아야 나 자신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글에서도 밝현지만 카르마는 결코 원죄의 개념과 같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극단성이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한계, '나'라는 생각의 경계, 내가 가지고 있는 제한성, 내가 갖고 있는 무의식 깊은 곳의 두려움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네 삶이 한번씩 그토록 고달픈것은 우리가 각자의 두려움을, 카르마를, 경계를, 제한성을, 그만큼
간절하게 깨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갖고 있는 두려움이 많으면 내가 창조할수 있는 것들이 그만큼 제약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덜 행복하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한 예로, 날생선을 먹는 것을 무서워 하는 사람은 맛있는 회의 맛을 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것 처럼 말이다.
좀더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나'라는 경계를 깨 나가고 우리 모두가 깊은 사랑에서 출발한, 서로 연결된 한 몸임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빨리, 좀 더 와닿는 부분의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현재 시급히 인식을 달리 해야 할 것은 '카르마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와 같은 권선징악의 강력한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고, 카르마라고 생각했던 것은 우주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였던 것이지 선/악의 개념을 들이대는 것은 지구에 사는 우리들이 가진 대표적인 제한성의 틀이다. 그 굴레에서 누구도 죄인이 아닐 수 없고, 이분법으로 끝없는 분리감을 계속해서 창조해나갈 뿐이고 지구상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빛과 어둠은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라는 개념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 삶에 만연한 경계와 분리의식을 극복하는데 좀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영혼과 합일되어 가고 있는 당신께 다시 한번 강조드리고 싶다. 나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가진 강력한 사고의 틀이 무엇인지, 내가 가진 극단성이 무엇인지 살피고 살피고 또 살펴보시고 날뛰는 극단성을 잘 잡아가시면 좋겠다. 왜냐하면 극단은 또다른 반동을 맞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카르마의 역풍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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