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lea Oct 21. 2024

흑백요리사와 AI, 그리고 영혼의 상관관계



올가을은 흑백요리사 열풍이 대단했다. 시리즈를 몰아서 보는 일이 최근에는 잘 없었는데 한 회 한 회가 너무 재미있어서 이번에는 나도 새 에피소드 오픈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편집이나 구성 자체도 재미있었고 스케일이 커서 볼거리도 풍부했지만, 무엇보다 출연자들이 뿜는 에너지가 다채롭고 힘이 있어서 더 흥미롭게 봤던 것 같다. 



 사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파이널 경연보다는 두부요리를 계속해서 선보여야 했던 두부지옥 미션이었다.대결의 룰은 이러했다. 메인 재료는 두부 딱 한가지 뿐이다. 이 메인재료의 특징을 살려서 요리사들은 새로운 요리를 연속적으로 선보여야 했고, 매번 한 사람씩이 탈락했다.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도 같은 재료로 계속 요리를 하다 보면 갈수록 밑천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두부지옥 미션에서도 그랬다. 자신이 공부하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레시피는 점점 소진이 되어갔다. 게다가, 연속적인 대결로 요리사들의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던 상태. 실제로 화면을 봐도 '내가 두부인지, 두부가 나인지'모를 정도로 기진맥진해보였고 후반부로 갈수록  이성보다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잘 모른 채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출연자들 입장에서는 극악스런 대결이었겠지만  모두가 뛰어난 참가자들에게 재료를 한가지로 제한해두니 더 두드러지는 사람이 드러났다. 출연자들은





알고 있던 지식적 밑천이 바닥났다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라고 말했는데, 이 부분에서 많은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요리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말이다. 


지식과 영혼이 어우러져야 하는 AI시대

 사실 인공지능이 발달되면서 지식만으로 뭔가 승부를 볼 수 있는 시기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그런것들이 필요한 직군, 유효한 직군은 존재하겠고 지식의 습득 자체만으로 많은 것들이 보장되는 시대는 지났다. 의사도 병원을 차리면 경영능력을 익혀야 하는 세상이고, 우리가 좋은 직업이라 여겼던 것들 중에는 인공지능으로 이미 대체되고 있는 부분들이 상당하다. 


 어쨌거나 인류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능력치를 끌어올려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 자신의 능력치는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까? 공부를 더 하면 되는 걸까? 하지만 학습능력은 AI가 더 좋은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저 지식‘만’ 열심히 습득하는 것은 해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해법은 ‘자기 자신을 더 온전히 알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더 온전히 알아간다는 것’은 육체로서의 자신 뿐 아니라, 영혼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자각해가는 과정도 포함된다. 우리가 인간 이상의, 영혼의 존재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다시금 알아가는 과정이며, ‘영혼으로서의 나’ 와 ‘인간으로서의 나’가 합일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혼과 합일되어 뿜어져 나오는 힘

다시 흑백요리사의 두부지옥으로 돌아가 보면, 두부 지옥에서의 마지막 승자는 에드워드 리 쉐프였다. 지식으로 익힌 레시피는 모두 고갈되었고, 비몽사몽 혼미한 와중 그는 마지막 요리를 내놓았다. 요리 자체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그가 두부지옥에서 승리한 비결은 '혼연일체의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 에드워드 리 쉐프는 좀더 인간으로서의 자아나 에고 같은것들을 더욱 내려놓고, 그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좀더 합일이 되어 요리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이게 맛있을까, 이게 맞을까, 틀릴까'에 대한 판단을 차치하고, 그저 자신의 요리에 인간의 힘과, 자신의 영혼의 힘까지 더 끌어다 쓰는 것 같은 느낌. 자신의 숨어 있던 잠재력을 끌어와서 현실로 구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시피에 대한 믿음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잠재력과 창조력에 대한 믿음, 직관적인 이끌림을 의심하지 않고 현실로 만들어내는 힘이 더 돋보였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시대는, 자신의 잠재력과 창조력을 더 온전히 끌어다 써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잠재력과 창조력이란 곧 영혼의 영역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의 단 1퍼센트만 쓰고 간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우리 영혼의 극히 일부분만을 열어두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과 보다 더 싱크로율을 높여가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에너지를 현실로 구현해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우리의 영혼 자체도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공지능시대, 영혼과 싱크로 높여나가기 

인공지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많은 영화에서는 마치 기정 사실처럼'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잡아먹힐 것이다'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집어넣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디스토피아적인 상상 같다 여겨진다. 반면 '아니야, 인공지능은 인간의 친구야'라고 말하는 것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선같다 느껴진다.


  인간과 인공지능은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밤하늘의 우주를 살펴보면 빛과 어둠은 동시에 생성되면서, 전혀 반대성질이기도 하지만, 또한 서로를 더 분명히 존재하게끔 해 준다. 빛이 창조된 그순간부터 이미 어둠도 존재되었고, 더 밝은 빛과 동시에 더욱 깊은 어둠도 생겨나니까 말이다. 


 마치 이런 관계처럼, 인간과 AI는 서로가 서로의 발전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AI는 인간의 결과물과 생산물을 학습하며 그로부터 진화한다. 인간이 생산해낸 모든 것을 습득한 AI는 분명 인간보다 뛰어난 면이 있다. 


 지식의 습득은 AI가 이미 인간보다 빠르며, 앞으로도 더 빨라질 것이다.학습속도의 측면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에 비해서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인공지능은 지식을 습득할 뿐 아니라  인간과 비슷한 행동패턴과 사고 패턴을 익혀서 지식의 보관 창고 뿐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로서 점점 자리잡아가고 있다.  다가올 시대에 인간은 결국 본인의 능력치를 더 끌어올려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비단 AI 에게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지배되어서 끌려다니는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는 점점 더 영혼의 잠재력을 끌어다 쓰게 된다.


'인간이 인공지능 로봇에게 지배당할 것이다'와 같은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은 어디서부터 출발했을까? 그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이, 보여지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착각때문이다. 사실상 보여지는 능력치, 인간이 생산해놓은 능력치만 따지고 볼때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라잡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인간은 각자가 영혼으로부터 출발했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영혼이 있다. 그 어떠한 미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지구에 올 때 영혼으로서의 우리의 기억을 지워 두고 온다. 자신의 창조력에 대한 여러 실험과 그에 대한 발전을 위해 3차원에 온 것이다. 이 지구라는 공간은 자신의 에너지가 가진 특징을 물현화 할 수 있는 곳이라서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속속들이 잘 알 수 있는 공간이다. 다만 영혼으로서의 기억을 지워 두고 온 것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어떤 경험을 할 때 아주 생생한 몰입감을 통해 보다 완벽하게 뛰어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단지 미신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구에 온 이상 물질계에 몰입해서 사는 것이 우선 과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변했다.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더욱더 고도의 정신문명에 도달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시대 자체가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바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던 어떤 영역을 지구에 좀더 끌어 써야 할 때가 되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이미 각자의 영혼의 힘으로 굴러가고 있다. 우리의 가족, 생활환경, 배우자 등등 우리가 내렸던 수많은 결정들은 각자의 영혼적인 목표성과 계획에 따라서 달라진다. 우리가 미처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던 때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과 이미 소통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 삶은 영혼의 성격이 반영된 산물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자기자신이기도 한, 자신의 영혼과의 소통이 그리 원활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구에는 지구의 법칙이 있고, 흔히 에고라고도 불리우는 인간의 생존본능과 관련된 많은 물질세계의 한계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인 영혼과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과 좀더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고, 싱크로를 높여가려는 노력을 할때, 인류가 지금까지 생산해왔던 문명보다 한차원 더 높은 정신문명으로 우리는 향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잠재력 이라고도 하고, 무의식이라고도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나는 분명히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영혼이 있으며, '나도 몰랐던 나'를 좀더 알아차릴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성'이 있는 우리 각자의 존재들이 가진 잠재력이자 새로움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 각자가 영혼임을 깨닫는다' 라고 하면 어떤 강력한 각성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릴수도 있겠지만, 영혼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강력한 각성으로 한번에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영혼과 합일되어서 영혼의 잠재력을 끌어다 쓴다고 해도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영혼 자체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며, 영혼 자체에도 강점이 있지만, 숨겨두었던 두려움이나 약한 부분이 오히려 삶에서 더 부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인간이 자신의 영혼과 합일되어 갈 때 어떤 것들이 나타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자신의 영혼과 점점 더 합일되어 갈 때 펼쳐지는 것들

당신이 현재까지 발휘하던 당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낀 상태이고, 본인이 더 원하는 삶을 창조하고 싶은 상태라고 하자. 그런 소원이 생겼다면 당신의 삶에서는 그와 관련된 사건들이 펼쳐질 것이고, 그 과정과정이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사실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영화나 만화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강력한 영적인 신비체험을 할수도 있고, 딱히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본질이다.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자신으로 또렷하게 살아가기 위해 잊고 있던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 뿐이지, 신비로운 영적 능력을 가졌는지 안가졌는지는 솔직히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지양하는 쪽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러나 그런 체험을 설령 하게 되더라도, 다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영혼적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완벽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으로서의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영혼이 그런 식으로 자아에게 신호를 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나의 영혼과 좀더 합일되어간다는 것은, 육체에 영혼의 에너지를 좀더 싣는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여러가지 변화를 겪을 수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변화일수도 있고, 정신적인 변화일 수도 있다. 내가 영혼적인 나와 싱크로율을 높여간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숨겨진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숨겨왔던 나의 능력치를 다시 쓸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고, 덮어두었던 나의 상처와 슬픔을 다시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힐링' ;정화' 이런 표현들을 많이 쓰는데, 우리가 앞으로 나의 영혼과 합일되어 가는 과정과정이 모두 힐링이고, 또 정화가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과 영혼이 가진 시야의 차이

 

 많은 영혼들은 창조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지구에 온다고 했다. 그러자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계라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이 두려움을 가장 크게 느끼는 지점이다. 이 부분을 뛰어넘자고 보면 그와 관련된 사건들을 겪게 되는데, 자신이 왜 그런 사건을 겪었는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으면 인간적으로는 그저 상처의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한 영혼이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고 싶은 존재였다면 그 존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별을 자꾸 경험할 수도 있고, 내가 온전한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영혼이라면 그 사람은 누가 자꾸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영혼적으로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지만, 우리는 모두 영혼의 시야를 닫아 놓고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인간적 시야로는 이것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경험들이다. 또 나의 영혼 자체가 그런 목적성이 있어서 그런 삶의 계획을 했다손 쳐도, 애초에 영혼부터가 해당 부분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싶은 존재였기 때문에 반복적인 그런 경험을 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깨지 못하고 여전히 해당 부분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인간된 우리가 '나의 영혼이 왜 그런 계획을 했는지' 그 참 뜻을 온전히 깨닫는다면, 그리고 그 깨달음이 자신의 영혼에까지 닿는다면 우리는 해당 두려움에서 자유로움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해당 두려움으로 비롯한 사건은 더는 발생하지 않는다.


  설령 비슷한 듯 보이는 사건이 또다시 일어났다고 해도, 그것은 또다른 원인의 해프닝일 수 있다. 혹은 해당 두려움에 대한 자아의 온전한 깨달음,  겉핥기 식이 아닌 자신의 두려움을 뿌리뽑는 정도의 깨달음을 원하는 영혼이라면 해당 부분에 대해서 어떤 사건들을 좀 더 창조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영혼과 인간 사이에는 시야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일지언정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