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곤란을 겪었다.
최근에 급작스러운 호흡곤란을 겪었다. 일하는 도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삶이 영혼과의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런 이벤트에는 너무도 놀라게 된다. 예기치 못하게 일어난 일처럼 말이다.영혼은 언제나 이렇듯 생생한 몰입감으로 숨어 있던 나의 모습을 자각하게 한다.
어쨌거나 이번 일을 겪으며 반성한 부분이 있다. 지금까지 어떤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을 봐도 '영혼의 큰 뜻이지' 라고 말하면서 크게 공감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을 내가 겪을 때 조차도 '영혼의 큰 뜻이지 '하면서 스스로 극복해내기도 했었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좀 가혹했던 것 같다. 사실 누구의 공감을 얻을 부분이 아니라고도 생각했었다. 온전히 스스로 겪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고, 어떤 극한의 두려움 뒤에 항상 큰 도약이 있었기 때문에 공감을 해 주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도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사람들 앞에서 이런 일을 겪었는데 아마 공감이 좀 어려운 종류의 어떤 것이긴 했을 것이다. 아마 쇼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그런데 평소에 다정하게 잘 지내던 사람들이 '그거 하나 못 이겨내고 일에 지장을 주나...'란 시선을 보내니 많이 슬펐다. 그리고 반성했다. 아 내가 그랬었지, 이젠 안그래야겠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스트레스는 영혼도 받고 있다.
사실 현대인들은 많은 정신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 아마 사람을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공황발작 같은 것일 텐데, 사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 정신적인 문제는 특별한 해법이 없기도 하다. 치료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딱 꼬집어 무어라고 진단을 내리기가 힘든 것이다. 3차원에서 그 어떤 해법을 찾기도 힘든 그런 때 사람들은 결국 무당을 찾거나, 종교에 기대게 되고, 어쨌거나 간절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가지 스트레스 요인들이 존재하겠지만, 자의적으로 통제하기힘든 문제들은 사실 영혼적인 스트레스가 많다. 영혼의 태생적 문제이거나, 전생으로부터 반복적으로 축적되어 온 기억들 때문이다. (물론 기억을 잠궈두어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히 MZ세대들이 공황장애와 불안장애등 정신문제를 많이 겪고 있는데, 나이를 불문하고 급작스런 그런 증상들은 영혼적인 에너지의 발현이다.
현실에서 이유를 찾기 어렵다면 나의 영혼을 들여다보자
우리가 보통 자신의 카르마, 즉 두려움을 극복할 때 삶에 우선적으로 자신의 카르마가 반영된 상태로 에너지가 전개가 되며, 자신의 삶에 드러난 카르마를 해결하는 형태로 카르마를 극복한다. 물론 극복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특정 '이벤트'를 통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천천히 확인하는 경우들도 있고, 그렇게 삶에 드라마 형태로 펼쳐지는 전개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그냥 그 에너지 자체를 급작스럽게 발현해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보통은 어느정도 삶을 살아간 다음, 삶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난 다음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렇게 되면 인간적으로 시간이 꽤 걸린다. 노인이 되어서도 모르고 죽는 경우도 다반사이니까 말이다. 젊은 세대에게서 그렇게 갑작스럽게 드러나는 경우는, 시간의 지체 없이 빠르게 자신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경우도 있는 듯 보인다. 또 그 두려움의 정도가 심하다면 그것을 빠르게 뛰어넘고 싶은 것이다.
영혼의 상태는 육체에 많은 부분 반영된다. 당연한 것이, 영혼의 에너지로 육체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천적 질환이 있는 경우는 영혼이 일부러 그렇게 계획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게밖에 창조를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혼의 에너지도 성장을 한다. 그 성장이란, 자신의 한계를 한겹 벗기고, 두려움을 극복해내는, 즉 카르마를 극복해나가며 성장할 수 있고, 카르마를 벗은 후에는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면서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영혼의 성장이 막히는 경우들이 있다. 인간은 그럴 때 늙는다. 왜 노인이 될 수록 남의 말 안듣고 고집이 세진다고 하지않는가? 사실은 더이상 남의 말도 듣기 싫고 내 한계고 뭐고 깨기 싫어질 때, 그때부터 에너지 유입은 줄어든다. 에너지가 새로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막혀서 늙는 것이다.
성장이라는 것이,특히 영혼의 성장이라는 것이 그냥마냥 쉽거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성장, 특히 영혼적 성장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그냥 조금 쉬면 사라지는 두려움이 아니라, 정말 곧 죽을것 같은 두려움이다. 진짜로 죽을 것 같으나, 사실은 죽지는 않는 류의 두려움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런 부분이 있다. 그러한 것들이 불안장애나, 심하면 공황발작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랬을 때, 해법은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냥 버티라, 참아라 라는 말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가야 한다. 그것은 '직장이 사라져서' '돈이 없어서' '점수가 낮아서'와 같은 이유들은 아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은 부분에서는 좀더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인간의 육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에 대한 상실감과 두려움, 의존성에 대한 두려움, 원하는 것을 원한다 말하지 못하는 두려움,카르마를 짓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신성에 대한 두려움, 자기자신의 존재함을 믿지 못하는 두려움 같은 것들이다.
사실 이번 생 안에서 어린시절이나 트라우마 등을 파악해가면서 자신의 정신질환의 원인을 찾는 시도들이 있는데, 그것이 일부 유효하지만, 때로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는 경우는, 그러한 것들이 영혼의 기억에서부터 발현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에너지는 인간의 에너지보다 크기 때문에(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사실 그 영혼이 품고 있는 두려움의 결이나, 깊이감, 그리고 그 정도는 인간의 에너지로서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황발작을 겪는 사람들이 흔히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것은 엄살도 아니고, 비유적인 표현도 아니다.
실제로 영혼이 인간을 통해 무언가를 극복할 때는 죽을 것 같다.
불안장애나 우울증,공황장애 같은 정신질환은 보통 '죽고 싶다'는 감정을 동반한다. 영혼적으로 도약하고 싶은 어떤 간절한 부분을 도저히 넘지 못하거나 그것을 뛰어넘을 때의 두려움이 너무도 클 때 영혼적으로는 지독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영혼 자체가 그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때 실제로 육체를 벗어버리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혼들은 '죽고 싶어'한다. 그 죽고싶다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라기 보다는 영혼적으로 새로 태어나기를 원하는 거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내가 죽도록 두려워하는 어떤 부분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그렇기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한 생 안에서 그것을 극복한다면, 사실 다시 태어나는 거나 다름이 없다. 예수가 부활이라는 것을 보여준 진짜 뜻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육체적 부활을 하는 어떤 신묘한 마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한 생 안에서도, 내가 죽을것 같이 두려웠던 어떤 부분에서 진짜로 확 죽어버렸을 때, 온전히 새 존재로 다시금 깨어날 수 있다는 거라는 것 말이다. 이순신장군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즉생이다.
진실을 말하면 내가 정말로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마주했을때, 만약 내가 그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했다면
(두려움의 본질은 위에 열거해두었다) '차라리 죽자'라는 마음으로 마주하면, 나를 지키고, 내가 마치 무너지거나 소멸될 것 같은 모든 두려움에 나를 던져버리는 것이 오히려 빨랐다.
이것은 '좌충우돌, 극단적이고 괴로운 일을 많이 겪으면, 고행을 하면, 깨달음에 이른다'라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결국 본질은 '내가 죽어도 이것만은 못 놓겠다'하는 것을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미안에 나왔듯 새가 자신의 세계의 전부였던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것과 다르지 않다. 내 세계의 전부였던, 하지만 아주 안전했던 한 세계를 깨고 나오는 병아리의 마음이 어떻겠는가?너무너무 무섭지 않을까. 그 작은 몸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나왔을 거다. 그러나 그 한겹을 깨고 나왔을때 눈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물론 그 세계조차 불확실함의 연속이지만 적어도 알 속에서 모든것을 차단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삶일거다.
혼자 도 닦는 시대가 아니다
사실 위에 써둔 것은 이전 시대의 구도자들이 했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에 스님들이나 도사들은 가족들 다 끊고 혼자 수행에만 몰입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이미 그런 방식의 종교들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사실 나와 가장 가까운 주변의 에너지를 조화롭게 창조하는 것이 난이도상으로는 최상이다. 그래서 가족 문제가 그렇게나 어렵고, 그렇기에 결혼을 엄두도 못내는 영혼들도 많다. 지금껏 외면해왔던 자기 자신의 에너지가 그대로 구현되는, 숨길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예전처럼 혼자 도를 닦는 시대가 아니라, 사회안에서 생활을 해가면서 이 모든것들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어렵다면 어려운 점이고,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점이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나의 새로워진 에너지가 사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균형과 조화는 우리가 새롭게 우리의 영혼적인 부분을 자각해 나갈 때 염두에 둘 부분이다. 균형과 조화 없는, 자기자신의 에너지만 닦는 것은 한편으로는 또다른 카르마를 만들기가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카르마를 깨나가면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균형과 조화도 고려를 해보는 것이 또다른 카르마 반동을 줄일 수 있다. 카르마는 결국에는 극단성의 발현이고, 그것에 대한 반동을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