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해보면 나는 정말이지 한걸음 움직이가 싫었고,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몰랐었지만, 내 영혼은 결국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는 성장하고 싶었고, 내 성장으로서 나와 연결된, 나와 한 몸과 다름 없는 존재였던 내 쌍둥이불꽃을 회복시키고 싶었다. 더 나아가서는 이제는 완전히 '쌍둥이불꽃'이라는 태생적 이슈를 벗어나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라는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이해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성장이 멈추어있었고, '함께 함'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 '함께 함'에 대해서 대단히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러나 나의 쌍둥이 불꽃을 위해서라도, 나는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는 것을 택해야 했다.
두렵지만 한발 나아가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
영혼의 욕구와, 인간적 시야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다음 한 걸음을 가기가 어려워한다. 여기에서는 연애에 국한해서 다루지만, 사실 연애 뿐 아니라 모든 영역이 그러하다. 우리가 영혼적인 시야를 잘 알아차리기가 힘든 이유는, 영혼은 자신이 두려워 하는 것을 자아를 통해 체험함으로서 뛰어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두려워 하는 것들은 피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곧 죽어라 피해다녔고, 혹은 너무 두렵기 때문에 내 삶 안에 애초에 포함시키지조차 않았던 것들이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뛰어넘어야 될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인간적으로 나는, 외로워 죽을 것 같지만 딱히 누군가와 관계 맺지 않아도 나만의 안전한 보호막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는 있다. 외로워서 죽는 게 낫지 관계성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어떻게든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거다. 외로움은 더 증폭될 것이고 인간적인 나는 견디다 못해 소개팅이든 뭐든 하겠지만 '얘는 이래서 안되고 쟤는 저래서 안되는 굴레'에 빠지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도망칠 합리적인 이유를 최선을 다해 (나도 모르게)만들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고는 싶지만, 나의 두려움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도망치고 싶어진다. 우리의 안전지대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결심했다.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보기로 했으니까.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두려워 하는 이유
앞서 내가 아주 길고 길게 우리의 영혼적 역사와, 나의 흑역사를 언급 한 것은, 우리가 관계에 있어서 어려운 부분이, 인간적인 이유 뿐 아니라 그런 영혼적인 히스토리가 있을 수 있고, 그 영향이 생각보다 클 수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영혼의 태생적 특징이나 각자 전생의 히스토리의 영향은 있겠지만,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부분은, '우리는 우리가 기억했던 근원적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며, 그를 통해서 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이게 사랑이야'라는 강한 관념이 언젠가부터는 나의 족쇄가 되고, 내가 더 다채로운 나의 삶을 창조하는 것을 막아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 내가 어떤 굴레에 빠져 있는 것 같다면, 그로부터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많은 영혼들, 존재들이 바라는 방향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두려워 하는 이유가 있다.
1. 내가 새로움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근원적 사랑', 즉 나 자신을 한번 깨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두려울 수 있다. 나를 부정당하는 느낌까지 들 수 있다.
2. 반복되는 극단성의 반동을 더이상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다.
1번에 앞서서는 우리가 앞서 자세히 살펴보았고, 이제 2번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 모두는 대부분 특정부분의 극단성을 지니고 있으며, 비슷한 말로는 카르마라고도 한다. 카르마에 대해서는 흔히 기독교적인 관점으로는 죄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는데, 이를테면 덕업을 쌓으면 천국에 가고 악업을 쌓으면 지옥에 간다는 개념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이분법적인 시야 안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용서하기도, 또 타인에 대해서 이해하거나 용서하기도 어려워진다. 쉽게말하면 내 사랑의 경계를 깨기가 어려워지고, 내 사랑의 크기를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카르마와 같은 것을 선이나 악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런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극단성'과 같은 표현을 나는 선호한다. 사실 어떤 현상을 정의롭게, 혹은 부정하게 보는 것도, '이것이 사랑이야'에서 나온 강력한 사고의 틀이다. 우리의 판단을 한번 더 거친 현상인 것 뿐이다.
내 극단성(카르마)는 무엇일까?
극단성이라 함은 다른말로는 카르마라고도 한다. 한 쪽의 극단성은 다른 반대쪽의 반동을 만들어낸다. 마치 어떤 스프링을 한쪽으로 계속 누르다 놓으면 반대 방향으로 튀어오르는 것과 같다. 공을 벽에 쎄게 던지면 나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면 '선''에 대한 인식이 촘촘하고 타이트한 사람은, 일상에서 수많은 마음의 걸림을 마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무결하고 촘촘한 기준 안에서 얼마나 불편한 감정이 자주 생겨나겠는가? 결국 그런 고도로 높은 기준에서 가장 힘든것은 나의 마음이다. 특정 사건이 발생하지 않아도,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반동을 나는 이미 받고 있는 것이다. 반대의 인식을 가진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반동이 일상에서 사건으로 발생하는 경우들도 있다. '선'에 대한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은 자신의 신념하에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경우도 잦을 것이고, 별 것 아닌 일도 굉장히 정의롭지 못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반동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극단성으로 인해서 내가 맞는 역풍이다. 위의 예로 들자면 '불의로 느껴지는 듯 보이는 어떤 사람과의 갈등' 같은 일들이다. 그런데 사실 더 큰 시야에서 볼때, 그 '불의로 느껴졌던'사람은 딱히 별 문제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문제라면 자신의 그런 극단적인 무결함에 대한 욕구인 경우도 아주 많다. 이 역시, 반대의 인식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 반동을 겪을 것이다.
우리는 과학시간에 작용-반작용 이라는 것을 배웠다. 한 벽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견고한 벽을 내가 손으로 밀어보면, 벽과 내 손바닥 사이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내가 벽을 미는 힘이 강할수록 벽이 나를 미는 힘이 강하다. 겉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무런 일이 없어 보여도 말이다. 세상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주 견고하고, 두터운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강하게 세상을 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두꺼운, 견고함은 결국 나 자신과 세상의 경계를 의미한다. 비대해진 '나'를 뜻한다. 그 견고한 극단성의 반동은 내가 받을 수 밖에 없다. 어떤 사건이 없더라도 나의 몸과 마음이 힘들거나, 혹은 반동되는 사건이 내 앞에 펼쳐진다.
사실 그런 반동되는 사건들조차 '모든 것이 가능한' 우주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을 겪지 말아야 하고,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그러나 반동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대부분 내 반동의 굴레에서 돌고 도는 삶을 살고 있다. 지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극단이, 또다른 극단과 쌍을 이루어 창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더 쎄게 때려봤자 더 큰 반동만 창조 될 뿐이다.
언뜻 정반대인듯 보이는 양쪽의 본질을 살펴보면
'내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있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 간의 싸움이 일어났을때, 그에 대한 논리와 시시비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책들과 사상이 탄생하는가를 살펴보면 말이다.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할 때, 굉장히 논리적인 잣대를 들이민다. '대의'라는 말을 자주 쓰고, '정의'라는 말도 자주 쓴다. 하지만 그것을 파고파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의 신념이다. 그것을 달리 표현해 보면, 우리가 처음에 언급했던 '우리가 태초에 사랑이라고 믿었던 어떤 것'이다.각자가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렇기에 그것들이 무의미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견고한 논리와 시시비비만큼 견고한 반대의 극단성이 창조되었던 것은 아닐까? 견고한 극단성을 창조하며 우리는 또다른 견고한 극단성을 동시에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빛과 어둠이 서로를 존재하게 해 주듯이 말이다.
'자신의 신념을 견고히 지키기 위해, 그 벽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가 모든 싸움의 본질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싸우는 상대는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 틀이, 내 신념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주는 거울 말이다. 상대에게 '너는 말이 안통해'라는 말이 나온다면, 내가 그런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우리가 반복해왔던 성장 방식 -이쪽과 저쪽을 오락가락하기
우리가 싸우고 있는 대상과 '각자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면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가 싸우고 있는 대상과 비슷한 삶을 내가 이전의 생에서 반복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오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면 쉽다. 착하게만 살며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던 사람이 갑자기 흑화하는 경우도 있고, 범죄만 저지르던 사람이 성인처럼 살아가는 경우들이 있다. 이는 우리의 영혼들이 전통적으로 택해왔었던 성장의 방식이기도 하다.우리가 흔히 '이렇게 해 봤는데 잘 안됐으니 다음엔 정반대로 한번 해보자'하는 선택을 하는 것 처럼, 영혼들도 여러번의 윤회를 할 때 자신의 에너지에서 창조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을 창조하고 세팅하며 경험해보고 성장을 한 것이다. 극과 극의 반대를 경험을 해 보면서 스스로의 에너지를 보완해나가는 거다.
그런데 우리가 양쪽 극단을 오고 가는 삶을 살면서, 혹은 이번생에서 나와 반대 극인 사람과 함께 하면서 우리가 결국 가보고 싶었던 길은 무엇일까? 그저 경험해본 것으로 만족하는 것일까?각자의 차이를 확인하고 너는 너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려고 했던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그 양쪽을 아우르는, 한차원
높은 시야와 지혜를 가지고 싶었던 걸거다.
우리가 진정 나아가 보고 싶은 사랑 말이다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 이상의 사랑 말이다.
이것은 결국 이쪽과 저쪽을 오락가락하는 진폭을 줄여나간다는 방향성을 의미한다. 내가 할 수 있는것이, 이쪽으로 살다가, 어쩔수 없이 저쪽으로 튀어가서 살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매우 자유롭지 못한, 굴레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주 안에서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한 것은 없고, 저런 경험치가 필요한 존재들이 있다.하지만 이미 저런 경험을 반복한 영혼들 같은 경우에는 그 경험의 극단성을 아무리 늘려나가도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있다. 단지 극단적 경험으로 인해 정화해야 할 감정이나 손상된 에너지가 더 커지기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했을때 더 이상 저런 극단적인 성장 방식이 크게 이득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이제는 카르마 반동의 진폭을 줄여나가는, 그러니까 양쪽을 아우르는 더 큰 사랑이라는 지혜를 획득해나가 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사실 그냥마냥 극단적인 경험치를 늘려나간다고 해서 내가 강해지고,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여기저기 부딪히다가 얻어걸린 듯 보이기도 한다. 극단성을 통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은 예전의 구도자들이 많이 행했던 방식이라서 그 습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남아있다. 하지만 극단성 그 자체가 어떤 깨달음을 준다기 보다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한 지점'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을 뛰어넘는 것이 그 존재에는 가장 큰 도약을 안겨준다.
사실 내 경우도 보면'가장 두려워 하는 한 지점'에는 막상 다가가기가 무서워서 요리조리 피해다니면서 다른 여러가지 어려움을 뛰어넘어보면서 나름대로의 성장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시험으로 따지면 어렵지 않은, 할 만한 과목을 아주아주 열심히 해서 100점 가까이 맞게끔 노력하고, 가장 약한 과목은 책을 펼치기조차 무서워서 도망다니다가 결국 그 과목의 최저점수를 못 맞춰서 한 단계를 못뛰어넘은 세월이 길었다는 느낌도 든다. 막상 두려움에 직면해보았을때, 나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고, 해당 부분에 있어서는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상쾌함과 자유를 느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예전과는 다른 연애를 해보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나'에 대한 관찰과 자기 인정이 필요하다. 사실 내가 어떤 극단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의 삶을 통해서 이미 여러번 투영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름대로 인간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시시비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옳고 그름을 따지다 보면 싸움이 끝도없어진다. 그래서 상대방과 그런 것들을 따지며 싸워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복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한지 말이다.
자유롭지 못한 부분은 '이건 꼭 이래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내가 집착을 갖고 있는 모든 부분이다. '이건 꼭 이래야 한다'의 상태로 머물고 싶은 영혼이라면 그대로 살아도 딱히 별 문제 없이 살 수도 있다. 이번생은 그렇게 그냥 살아보겠다 하는 것도 그 영혼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좀 변화해보고 싶은 영혼이라면 비슷한 이슈로 반복되는 트러블을 겪기가 쉽다. 자기 자신이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TV에서 보는, 부부관찰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양상들은 사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아주 간절한 외침일 수도 있다. 화면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메타인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아주 큰 용기를 필요로 하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을 복기해야 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향해서 더 온전한 사랑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내가 사랑에 대해서 나의 시야를 넓혀간다는 것은, '그동안 용서하지 못했던 나'를 용서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를 더 깊이 사랑해가는 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과거시대에는 절대선이라 여겨지던, 강한 종교적 신념이 있었다. (요즘까지도 뿌리깊기는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강한 종교적 신념은 강한 억압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신성모독은 곧 죽음을 뜻하는 두려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에서 생긴 경계를 깨고, 그 너머의 다양함을 사랑하는 시도를 해나가고 있다. 물론 억압의 반동인 방종까지도 함께 창조된 듯 보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의 신념과 경계를 깬다는 것은, 마치 신성모독으로 사형이나 파문을 선고받은 한 신자가 느낄 법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너머에 존재 자체로서 좀더 우리 자신을 크게 받아들이고 깊이 받아들이는, 더 깊은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내 경계를 깬다는 것은 사실 억울하다거나, 남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더 충만한 나 자신으로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 타인을 좀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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