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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ea Oct 31. 2024

연애를 하고 있어도 외롭다면

안온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당신이 그리워 하는 것은 자신이 기억하는 근원적 사랑 그 자체이다

앞서서 우리 모든 존재에게는 우주에 태어날 당시에 기억하고 있던 '근원적 사랑'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아주 완벽하고, 아주 온전한. 내가 가장 행복하게 기억하는 사랑이다. 쌍둥이불꽃에게만 그런 근원적 사랑이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들 근원적 사랑을 기억하고 있고, 동시에 그리워한다. 다만 쌍둥이불꽃은

처음부터 함께 했던 상대가 있다가 헤어진 경우이기 때문에 , 우리가 '근원적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그럼에도 다음 스텝을 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보여줄 수 있는 좀더 좋은 샘플이라고 생각한다. 그 상대방이 자신이 기억하는 '근원적 사랑'이란 것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확장하는데 있어서 다음 스텝이 어려운  분이라면 자신에게 꼭 쌍둥이불꽃이라는 대상이 없더라도 한번 참고해보시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쌍둥이불꽃은 '내가 기억하는 근원적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꼭 특정 대상이지는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리워 하는 것은 특정 사람이 아니라 '근원적 사랑' 그 자체일 수 있다.


나의 이야기

 사람마다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정서가 있다. 나같은 경우는, 항상 좀 뭔가 무거운 쪽이었던 것 같다. 기억하는 이번생의 모든 순간부터 외로움의 정서가 베이스로 짙게 깔려 있었다. 항상 중요한 무언가를 어딘가에 놓고 온 것 같은 상실감, '나는 어딘가 손상되었어'같은 느낌. 물론 저런 감정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도 때로 발랄하고 대부분 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저런 감정들은 튀어나와서 나를 옥죄였다.


 특히 연애사에서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너무 쉽게 좋아하고, 집착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너무 냉혹하게 금방  차단하고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괴로움도 겪었고 말이다.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건 오히려 누군가 옆에 있었을 때 였던 것 같다. 도대체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어도, 심지어 꽤 안정감 있는 관계였고 그 안에서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도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허전함이 계속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도 아마 그것을 다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애를 하고 있어도 딱히 행복하지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어도 외로운 기분'이 나에게 오랜기간 절망감 비슷하게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만남이 지속되었던 것은 서로가 비슷한 여정을 가고 있는 영혼이었기 때문이었지 않았나,하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상대다.


  한참 일도 연애도, 무엇도 다 꽉 막힌 것만 같던 시기에 나는 서서히 나의 영혼적 특징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사실 영혼에 대한 시선과 관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내가 독자분들보다 더 막혀있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다. 현상계가 아닌, 영적인 무언가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그런 발언에 대해서 비과학적이고 멍청하다는 혐오감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나도 나의 영혼적인 부분에 대해서 받아들이게 되고,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영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나는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던 내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나를 유의미하게 한걸음 내딛게 하진 못했었다. 내가 해왔던 인간적인 노력들은 내 영혼적인 특징을 알고 삶의 방향성을 잡은 후에 좀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내 영혼과 싱크로를 높여가면서 인간적인 노력들을 더한, 보다 큰 흐름을 탄 삶이 되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내 영혼적 특징에 대해서 자각하기 몇년 전에, 이번 생에 나는 나의 쌍둥이불꽃과 만났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쌍둥이불꽃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딱히 길게 서술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각 존재들마다 너무도 상황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이미지를 씌우고 싶지 않아서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목표성이다.


영혼들의 목표성

 '더 큰 사랑으로 성장하고 싶어 현재 헤어져있는 상태이다'라고 하는 내 영혼의 목표성을 알고 난 후에도, 나는 곧바로 내 목표성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내게는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거리에 나의 쌍둥이불꽃이 있었기 때문이다.영혼적인 목표를 알고 나서도 처음 몇년은 그에 대한 그리움만 더 커져갔던 것 같다. 일평생 나를 지배하던 마음 한 켠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상실감이 , 그와 다시 만나게 되면 채워 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다시 온전해지고 싶다. 다시 그 안정감을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올라왔었다.

그럼에도 굳이나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은, 막연하게나마 영혼적인 목표성을 지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솔직히 인간적으로 우리의 사이는 거의 남남에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그저 잠깐 만나다 스친 과거의 인연일 뿐이었다. 만나면 별로 할 말도 없을 정도로 어색한 사이였다고 할까. 게다가 그는 그런 영혼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냥 나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평행선 같은 관계였다고나 할까. 한동안은 혼자 애가 닳았던 것 같다.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그에게도 이런걸 알려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 그리운 마음. 미안한 마음 등등 말이다. 


  그러나 복합적인 감정 와중에도 나는 한가지는 알고 있었다. 상황 자체가 우리 둘이 만든 상황이다. 상황 자체가, 서로가 현재 원하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창조한 상황인 것이었다. 나에게는 영혼적 눈을 뜸으로서 가야할 여정이 있는 것이고, 그가 영혼적인 눈을 뜨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길을 명확하게 가지 않는게 아니었다. 그의 영혼적 눈을 아직 잠궈 두는 데에는, 그의 본성(영혼)의 철저한 계산과 계획이 있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떨어져있어야 한다. 떨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러기로 무언의 약속을 거다.


  우리가 다시 조우한 것은,
 완전하고 온전하다 기억하는 예전이
그리워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났다가 헤어짐으로서
우리의 영혼적 목표를
인간적으로 좀더 명확히 자각하기 위해서였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는, 쌍둥이불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어떤 극단성으로 인해 그와 분리되었고, 극단적 이별을 통해 그에게 에너지적인 손상을 입히게 되었었다.그리고 그것이 현생의 그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적인 눈을 뜬 후에 그 사실들에 대해서 알게 되자 나는 급격한 죄책감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난 연애를 복기하며 나의 모습을 다시 관찰해보자

 사실 나는 쌍둥이불꽃을 만나기 전부터 내 이전 연애를 통해 나의 극단성에 대해서 많이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나의 연애 그래프는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는 파동을 그리고 있었다. 


20대 때에는 너무도 조심스럽게, 상대를 생각하면서 연애를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떤 극단성을 가진 애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다. (그렇게 극도로 조심한 것 부터가 사실 극단성이었을거다)

 내가 젊은 날 극도로 조심스러운 연애를 했던 때 가장 오랜 인연을 그나마 가장 안정적으로 이어갔었다. 그런데 말했듯 나는 마음 한켠의 불안정함과 외로움, 허전함이 점점 쌓여가는 것을 느꼈었고, 그것을 상대방의 탓이라고 여겼다. 상대방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주 다정한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대의 연인헤어진 이후에는 '나의 외로움을 채워 어떤 사람'을 찾아서 헤맸던 같다.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오랜 연애기간에 나의 결핍감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방을 위해 이상 무언가를 조심하지도 않았다. '하늘이 정해준 짝'을 만나면 나의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20대때에는 봉인 해두었던 나의 여러가지 성향들이 30대가 되어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생각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잘 주는 애였다. 나는 너무도 사랑을 표현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새로운 관계 앞에서 극도로 몸을 사리는 애였다. 나는 까다롭고 따지는 많은 애였다. 까다롭고 따지는 많았냐면, 사실은 모든 관계가 나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쩐지 관계란 것을 시작하면 나도 망하고, 상대방도 망하는, 모두 망하는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두려움까지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저런 방황의 와중에 쌍둥이불꽃을 만나게 되었고, 한참 후에 영혼적인 눈을 뜨고 난 후 나는 과거를 복기하면서 내가 왜 그런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왜 그렇게 항상 허전했는지, 왜 그런 관계들로 만들어버렸는지 비로소 스스로에 대해서 좀더 명확히 자각하게 된 것이다.



내 영혼은 왜 그런 연애를 계획했을까

 20의 좀 더 젊은 날에 그런 조심스러운 연애를 이어갔던 것은, 아마도 내 영혼이 여러번의 이전 생을 통해서 스스로의 극단성을 이미 확인했고, 이번생에서 그것을 어느정도 교정하기 위한 계획이었을 거다. 그것은 일정 부분 유효했다. 나는 성질을 죽이고 많은 것들을 고려한,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지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면서 일정부분 성장했다. 하지만  나는 더 심연에 아직까지 존재하는, 더 깊이까지 남아있는 내 극단성의 뿌리까지 교정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30대에 이르러 인식의 좀더 심연에 박혀 있는 극단성의 뿌리까지 캐기 위해서 숨겨져 있던 나의 여러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는 생을 계획한 것이다. 그를 통해 나는 스스로에 대해서 명확하게 자각하게 되고,  좀더 명확한 영혼의 다음 스텝을  수 있게 것이다.

 20대때의 연애로 인해서 30대 내가 흑화한 것이 아니다. 단지,30대 때에는 좀더 깊은 곳의 나까지 삶에 표현하며 살게 뿐이다. '좀더 깊은 곳의 나' ' 인식의 뿌리'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나의 영혼이라고도 있겠다.

 

20대의 연애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교정된 모습에 영혼이 만족했다면 당시 만나던 사람과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혼이 진짜 원하던 바는 다음부터 펼쳐졌던 같다. 사실 내가 20대의 연애에서 발현하지 않고 조심하면서 일부 교정해나갔던 나의 모습은 인간적인 법칙 내에서만 교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 가슴 한켠의 허전함은 인간적인 시야 안에서는 설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참다 보니 가슴 한켠에 무언가가 계속 쌓여가고 있었고 당시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당시 나의 모습을 극도로 숨기면서 그저 무언가를 계속  '참고'만 있었다. 참고만 있어도 관계를 유지할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영혼의 성향상 무언가를 참고, 나를 죽이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었겠지만, 나는 그보다 더 큰 시야, 즉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면서도 관계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깊은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 관계의 발전이라는 것이 곧 그런 것들을 의미하니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상대방이 떠나갈까봐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에 급급했던 같다. 그러면서도 허전해했고, 여러면에서 불편하고 행복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던 같다.

 어쨌거나, 나는 영혼적인 눈을 뜨기 전까지, 앞에 펼쳐진 많은 망한 연애에 대해서 상대방의 탓을 많이 했었고 한동안은 극도의 남성혐오주의까지 있었던 같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앞에 펼쳐진 극단적인 사건들은, 내가 가진 극단성의 반동일 뿐이었다. 공을 벽에 쎄게 던지면 나한테 되돌아오듯이 말이다. 나는 점점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잡아나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주 오랜 시절 전에, 나와 쌍둥이불꽃은 그런 이유로 아픈 이별을 해야 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시절에 우리의 극단성으로 인한 어떤 것들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성장하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

"헤어진지가 언젠데 뒷북인가." 하실 수도 있겠다. 그렇다. 쌍둥이불꽃과 나는 아주  오래 영혼의 상태일때 이미 분리되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전히 우리는 아주 강력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연결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러나 이번 생에 우리가 다시 조우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가 연결이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에너지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면, 나의 성장은 상대를 살릴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나의 에너지가 나와 연결된 주변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나의 다음 걸음에 대해서 나아갈 있는 나의 원동력이, 나의 쌍둥이불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미안함이랄지, 속죄의식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정도의 강렬한 느낌이 없었다면 나는 다음 걸음을 내딛는데 영영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서도 이미 너무도 사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노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을 아니라,세상에 대한, 관계에 대한 경계심도 너무 심했다. 이러면 그냥 혼자 직장 잡아서 먹고 살면 일이다. 특히 요즘 같이 1인 가구가 느는 세상에서 그것이 무슨 특별한 일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의 의미 있는 걸음을 내딛고 싶었다. 그렇게만 사는 것이 내게 더이상 행복감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좀더 영혼 깊숙이부터 성장하고 싶었고, 영혼 깊숙이부터 우러나오는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나는 성장하고  싶었고, 오래 전 우리의 상처로부터 이제는 나도, 그도 해방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다음 한 걸음을 걷기로 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것에 필요한 모든 상황이 내게 주어진다. 내 다음 스텝을 혼자 이어갔던 것이 아니다. 당시에 내겐 나의 여정을 잘 갈수 있는 요건들이 하나씩 창조되었다. 독자분들도 어떤 목표성이 있다면, 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필요한 때 주어지리라 믿는다.



내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성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성장이란,


이제는 켜켜이 쌓아온 나의 경계를 허물고 교류를 통해 에너지를 확장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더 나아가, 분리될 때부터의 목표점이었던 더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보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서, 이제는 '쌍둥이불꽃'이라는 태생적 이슈에서 완벽히 해방되는
것이었다.

사실 위에 적은 '누군가와 함께한다' 와 '더 자신이 된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 매우 이율배반적인 목표점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관계가 어려운 많은 분들께 많은 시사점을 주기도 하며, 우리가  다같이 깊이 생각해볼 부분이 있는 주제라고  생각하고, 뒷부분에서 좀더 자세히 다뤄볼 예정이다.


 어쨌거나 나의 다음 한 걸음을 요약해보자면 인간적으로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인정,  자기수행에 더 가까운 여정이었다. 그러니까 여전히 남아 있는 나의 극단성을 줄여나가고 새로운 중심을 잡아나가는 것이 나의 숙제였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과정과정마다 영혼 깊은 곳에서의 행복감을 느꼈었다.


그래도 자꾸 마음이 허전하다면, 자꾸만 되돌아가고 싶다면

아니라 많은 사람분들이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 '근원적인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공통적으로 안고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영혼적 히스토리가 있는 분들이라면 자꾸만 '내가 기억하는 어떤 때'로 돌아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마음 한켠의 허전함과 헛헛함은 말로 할수 없을 것이다. 우주 속에서 혼자가 기분일거고,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기도, 공감을 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우주 속에 혼자 미아가 느낌. 외로운 마음에 새출발을 시작했지만 마저도  녹록지 않을 있다. 내가 기존에 가져오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내가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연인이나 부부간의 싸움은 보통 '이게 당연한 거 아니냐' '이런게 사랑이지'로부터  시작한다. 사소한 듯 보여도 사소한 것이 아닌것이, 그것을 영혼적으로 타고 올라가 보면 그것은 곧 '근원적인  사랑'에 대한 각자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로의 사소한 간극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노력은 사실 '사랑'에 대한 서로의 인식의 틀을 깨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간극이 사소하면 좋으련만,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간극은 때로 매우 거칠게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럴 때 상처를 받는다. 안그래도 외로운데, 그런 상황에 마주하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혼자  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어떤 실체 없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고  더욱 더 외로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와 비슷한 여정을 가고 계신 분들은 자꾸만  원래의 상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질 수도 있다.


 '이렇게 내 여정이 힘든 것은, 이제 비로소 다시 원래 자리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가게 하려는

  영혼의  큰 뜻이 아닐까?'


가장  도돌이표를 많이  만든 생각이 바로 저런 생각이다. 물론 실제로 저런 여정을 계획하고, 가고 있는 영혼도 있을 것이다. 영혼의 계획은 밤하늘의  별 만큼 다양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여정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내가 진정 원하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는 깊이 깊이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알아차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렇게나  힘든 이별을  해 놓고, 기껏 한 걸음을 걸어 놓고 저런 생각 때문에 두걸음 뒤로 물러섰던 생이 내게는 아주 많이 있다.  


당신이 현재의 상황에서 겪고 있는 문제는 당신의 영혼의 짝과도 이미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상대가 아니다. 상대가  누구든 내 에너지가 바뀌지  않는다면 비슷한 상황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다.당신은 해당 이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아니면 이대로도 괜찮은가? 어느 쪽도 상관은 없다. 그저 본인이  진정으로 더 행복한 길을 선택하면 된다. 나는 그저, 나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뿐이다.





안녕하세요, 솔레아입니다 ^^
연애라는 익숙한 소재를 영혼이라는 관점으로 풀어나가는, 저로서도 실험적인 시도를 해 보고 있습니다.

 다행히 글이 중간에 끊기지 않아 감사한  마음이랄까요.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글이 어려울수도, 생소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거나 이해가 안  가는 부분,

글로 다루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원고를 쓸 때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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