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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ea Oct 29. 2024

영혼의 기억은 우리의 연애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1

영혼 깊숙한 상처를 치유하기


우리는 왜 연애가 어려울까?'


 '요즘 사람들은... ㅉㅉ ...너무 재고 따져서 문제다'


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사실 그렇게 무수하고 촘촘하게 많은 조건들을 재고 따지면서도 결혼도 연애도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무서운 것이다. 무섭기 때문에 만나면 안 될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지만 그것이 인간사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듯 보이는 조건이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냥 합리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얘는 이래서 안되고, 쟤는 저래서 안된다. 그런데 그렇게 요리조리 아무리 재고 따지고 거르고 손절을 쳐도


  내가 절대 용납 못할거 같은 조건이 하나씩은 꼭있다


내가 새로운 사랑으로 나아가보자 하는 영혼이라면, 난이도(?) 차이는 있겠으나 나에게 어려운 관문인 듯 느껴지는 지점이 하나씩은 있는 상대를 마주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대한테 끌리기도 한다. 영혼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서로 참고 양보하며 살아라'하는 말도 꼭 틀린 것은 아닌 것이다. '내가 절대 용납 못할거 같다'하는 나의 강력한 틀을 한번 깨 보고 싶기 때문에 그런 상대를 만난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우리 독자들은 그에 앞서 일단 연애 자체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시작이 되더라도 더 감정이 생기지 않아서 금방 헤어질 수도 있고 말이다. 또 깊이감 없는 만남만 자꾸 만들어지면서 마음의 공허감이 점점 커지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영혼의 기억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앞서 영혼들에게는 각자 분리됨이나, 상실의 경험이 있다고 했다. 절대자로부터의 분리의 경험은 기본적으로 있고, 또 영혼적으로 내가 아주 깊은 관계성을 갖고 있던 존재로부터의 분리감 등이 있을 것이다. 특히 쌍둥이불꽃처럼 한 에너지체로 태어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거의 쌍둥이불꽃에 준할 정도로 깊은 관계성을 지닌 존재와의 상실감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극복했느냐가 문제다.


 영혼의 사이즈는 인간의 자아보다 훨씬 더 크다. 그래서 나의 삶에 아직 그런 두려움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영혼의 아주 뿌리 깊은 곳에,  이별에 대한 공포감이 아직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잔존해서 계속해서 나의 삶에 그러한 것들을 표현하게 된다. 그렇게 잔존한 에너지들이 윤회를 통해 반복되다 보면 그 이별의 기억이 그저 상처로만 각인되는 경우도 참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채 정리되지 못한 채 켜켜이 쌓인 감정들이, 현재 나의 다음 한 걸음을 주춤하게 만드는 경우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저 버티라, 견디라, 시간이 가면 다 잊힌다'와 같은 말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그 상실감이 여전히 큰 존재도 있을 것이고, 많이 지나왔지만, 보다 완벽한 극복을 위해서 이번 생을 계획한 존재들도 있을 것이다.


왜 이별을 하게 되었을까

서로의 완전한 선택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서로의 완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을 것이며, 지금도 못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한 선택이라고 해도, 그 후폭풍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좋아 선택인 것이지, 에너지 결이 갈수록 너무 달라져서 도저히 같이 못 있게 된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한쪽의 극단성이 강해지면, 극단성으로 인한 반동도 당연히 생길 수 밖에 없다. 그 반동을 통한 갈라짐은 스스로의 극단성을 통해 창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충격은 너무도 컸을 것이다.

어떤 존재와 딱 붙어서 지내던 존재가, 처음으로 우주에 홀로 존재한다. 마치 우주의 미아가 된 기분일 것이다. 내가 그 존재와 함께할 때의 그 충만감은? 나는 과연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혼자 살아나갈 수 있을까? 괜히 헤어졌다, 무섭다, 차라리 그냥 소멸되어버리고싶다 등등 강력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사실 한 에너지체였던 존재들은 헤어짐 자체가 굉장한 충격이다. 마치 아이가 엄마의 몸에서 출산될때 엄마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듯이 말이다. 아기가 죽을 힘을 다해 용을 쓰듯이 말이다. 내 품의 어린아이이던 자식이 자아를 갖고, 고집을 갖고, 최초로 말을 안듣고 떼를 쓰다가 급기야는 엄마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게 될 때의 충격처럼 말이다.


 그 충격은 금방 극복될 수도, 생각보다 오래 갈 수도 있다. 어쨌거나 헤어짐을 택한 존재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길을 잘 나아가는 것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다. 각자의 존재로서 온전히 한 존재로 서게 되는 것, 그렇게 성장함으로서 자신의 반경 안에 누군가를 품어볼 수 있게 되는 것.그 자체가 성장이가 치유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여정에 가는 걸음걸음마다  매번 새로이 해 보는 것이라서 도전이기도 하고, 또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때문에 특정 부분은 뛰어넘는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어려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움으로 나아가는데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살피기에 앞서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그 헛헛한 마음에 대한 위로와, 또 상실감에 대한 위로의 에너지를 보내드리고 싶다. 나 또한 오랫동안 겪었던 괴로웠던 감정들은 현재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우주의 선물 같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오랫동안 헤맸던 터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남이 있는 순간 이별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이해


이별 후에 어떤 여정을 가는지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쌍둥이불꽃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이별을 겪으신 분들이 알게 되는 가장 큰 우주의 선물은 '만남과 동시에 이별은 생성된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 그것이 이 세상에 대한 많은 이해를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은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의 깊이감을 더해주는 것 처럼 말이다. 빛이 밝아지는 동시에 어둠이 깊어지고, 어둠이 깊어지면 빛은 더 밝게 빛난다. 이런 상호연결성, 둘은 반대이면서 또 결코 반대가 아니라는 점이 우리가 극복해나갈 많은 힌트를 이미 던져주고 있다.


 '반대이면서 또 결코 반대가 아니다,
성질의 차이는 극명히 존재하나 서로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해 준다'


이것은 쌍둥이불꽃 그 자체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며, 이 우주의 큰 원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앞으로 계속해서 극복해나갈 것들이 위에 언급한 문장이다. 어려운 말로 이원성의 극복이라고도 한다. 이원성을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로움을 위해서이며, 사실 많은 존재들이 원하는 방향성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이원성을 극복해야 한다'라는 생각에서까지도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각자 속도는 다를 테지만 말이다.

 


 연애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무슨 우주이야기인가..하실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 모두 우주적인 존재들이며, 그 영혼의 에너지로 이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영혼을 하드캐리 하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영혼들은 자신이 어려워하는 지점을 뛰어넘기 위해서 이 삶을 계획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뛰어넘어 깨달음을 얻는다'하는 것은 스님이나 신선 같은 구도자들만이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구도자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들은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보다 한계 없이 자신의 삶을 펼쳐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구도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동굴을 파고 들어가 면벽 수도를 하거나, 묵언 수행 등 속세를 떠난 듯한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일체의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끊어버린 형태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가장 가깝고도 밀접한 에너지를 개선하고, 새로워진 에너지로 내 삶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고난도의 창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밖에서 적당히 인간관계를 잘 하던 사람도, 나랑 아주 밀접한 사람과는 갈등을 빚는 경우도 아주 많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호인인 사람이 가족과는 심각하게 사이가 안 좋은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표리부동해서가 아니라, 원래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에너지의 뿌리를 개선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서 그렇다.


 인간의 인식과 에너지는 여러가지 층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 인식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스스로 파악하기가(흔히 메타인지라고 부른다) 어렵기도 하고, 스스로를 파악했다고 할 지언정 온전한 자기 인정까지는 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연애라는 테마로 우리의 영혼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연애나 가족 관계 등은 온전히 내 에너지로 이루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디 묻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숨길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영혼의 성장 과정을 굉장히 압축적으로 품고 있기도 하다. 한 존재가, 부모로부터 떨어져나와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고, 부모 아닌 또다른 존재와의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간다고 하는 것. 이렇게 인간의 삶에 우리가 태초에 영혼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이 함축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연애사에서 그렇게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재미를 느끼기도 하며, 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영혼과 우리인간은 아무리 하나의 존재라고 해도 시야의 차이가 존재하기가 쉽다. 그래서 영혼이 가고자 하는 큰 방향을 알아두면 우리의 연애도 굴레를 벗어나기가 좀더 쉬워질지 모른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은 비단 연애에만 국한되었다기 보다는 어찌 보면 자기계발서나, 영성에 가까운 책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다루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관계에 대한 방법론을 다루기 보다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굴레를 벗어난 좀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혼에 각인된 이별의 상처는 우리에게

어떻게 발현될까


1.이성에 대한 강력한 불신과 적대감, 혹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경계심과 방어막


 아무리 각자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원해서 헤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이별의 크기가 누구에게든 같은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얼마나 그러한 것들을 원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자각하기 전까지 이별은 그저 상처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쌍둥이불꽃이었거나, 그에 준하는 존재와의 이별이었을 경우에는 그것이 나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을 수 있다. 특히 쌍둥이불꽃같은 경우는 태생이 한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한쪽이 뜯어져나갈때 한쪽이 받는 충격과 공포가 상당히 컸을 수 있고, 또 그것은 거의 나를 죽일 정도의 공포로 느껴졌을 수 있으며 그것은 한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그 상처가 각인되어서 타인과 깊은 관계맺기가 두려울 수 있다. 나를 예로 들면 어떤사람과 감정이 깊어지기 시작하면 도망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기를 너무나도 소망했던 것 같다.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도망치는 것은 내 쪽이었다. 스스로의 영혼적인 특성을 알기 전까지, 저 굴레는 너무나 나에게 괴로운 굴레였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또 내 영혼에게는 거의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다가왔던 듯 하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라고까지는 느끼지는 못했지만, 내 근간이, 정신이 흔들리고, 내가 사회적으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실체 없는 두려움을 느꼈었다.

 실제로 그런 생을 살기도 했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 때문에 내가 무너졌다'라는, 기억이 영혼에 남아서 계속해서 비슷한 사건들을 삶에서 창조했을 것이고, 관계에 대한 공포의 기억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부터 불쾌한 경험들은 또다시 경험했을 수 있다. 계속되는 굴레에 빠지는 것이다. 이번 생에서도 그것은 극단적으로 반복되었고, 내 관계에서 반복되는 패턴들을 어느정도 읽어낼 수 있었을 때 나는 내 영혼의 태생적 특징인 쌍둥이불꽃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삶에 드러났던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분리되어있는 쌍둥이불꽃은 극단성을 띈 이원적인 존재들이다. 나와 한 쌍을 이루고 있었던 한 쪽으로부터 받았던 상처는 (사실 알고 보니 못지않은 상처를 내가 주었었다.), 나와 쌍을 이루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적대심이나 방어감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내가 여자로 육화했을 때에는 남성성에 대한 깊은 적대심이 있었을 것이며, 내가 남성으로 육화했을 때에는 여성성에 대한 깊은 불신과 적대심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관계라는 것이 두려워진 나머지, '나'라는 경계로 꽁꽁 방어막을 두르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쌍둥이불꽃의 한 쪽에게, 나머지 한 쪽은 한 세상의 전부와도 다름없다. 그래서 둘의 충격적인 이별은 세상과 깊은 관계를 맺기를 어렵게 하거나,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느끼게 했을 수 있다. 사실 한 존재의 이별에 대한 기억은 비단 연애에만 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한 존재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맺기를 하는지와도 연관이 깊을수밖에 없다.



적당히 거리 둔 관계에서는 잘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사실 내가 마음 속 깊이 이성이나 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있는지, 알아차리기 힘들 수 있다. 나만 봐도 대인관계에서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젊은 시절 연애할 때는 나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면서 연애를 했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관계에서는 자신의  드러나지가 않는다. 특히 요즘 사회에서는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미덕이기도 하고, 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자신만의 동굴로 자꾸만 되돌아가버리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우리가 연인이나, 부부, 가족끼리 싸움을 할 때


'내가 밖에서는 안그러는데 너한테만 이런다, 집에만 오면 이런다, 너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사실 ' 너 때문에 내가 이런 성격이 된 것'이 아니다. 원래 내재되어 있던 것이 드러난 것 뿐이다. 밖에서의 관계에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자신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나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를 거울처럼 비춰주기로 한 관계성 안에서는 자신의 모든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 사실 자신이 진정으로 극단성을 줄이고 좀더 지혜롭게 발전하고 싶었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게

'너때문이다'라고 해버리면 영혼의 계획이 굉장히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영혼은 '적당히 괜찮은'정도를 원하는 때도 있지만, 좀더 욕심을 내서 '계속해서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 작지만 끝끝내 못 넘고 있는 그 한 포인트' 를 뛰어넘고 싶어 한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과 밀도있게 자꾸만 그런 사건들을 겪고 있다면, 그 영혼은 아주 타이트하게 자신의 무언가를 잡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너무도 화가 나고 괴로울 수 있다. 왜냐면 나는 내가 착한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사람인데 이런 이상한 모습이 발현된 건 너 탓이었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주머니 속에 송곳은 언제건 드러나기 마련이다.



숨기고 숨기고 숨기다가 겨우겨우 , 가까운 사람을 통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것일 뿐이다.그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까지 수 생을 돌고 돌았을 수 있다. 자기 인정이 그렇게 어렵기 때문이다.


  특정 사건을 통해서, 혹은 특정 인물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을 빠르게 인정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보통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에 인정이 싫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하는 자괴감에 빠질수도 있다. 그것을 발현하게 한 상황과, 세상과, 상대방도 너무 밉고 말이다.


 당신과 상대는 매우 용기있는 사람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속속들이 알아가는 과정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어떤 수렁 같은 패턴에 계속 빠져 있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 단지 당신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좀더 조화로운 상태를 만들어나가는,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좀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내가 외면했던 내 모습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굉장히 큰 힘을 가진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 만큼, 나는 상대방도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수 생을 돌고 돌아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를 드디어 마주하고, 그것에 대한 지혜를 얻게 되었다면? 그것이 심지어 쌍둥이불꽃과의 이별을 만든 나의 극단성이었다면? 혹은 쌍둥이불꽃에 준하는 상대와의 이별을 만든 나의 극단성이었다면?


 나의 이 극단성을 확인하게 해 주고, 새로운 지혜를 알게 해준 사건을 같이 겪어가고 있는 지금 내 옆의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아주 용기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맨얼굴을 마주하는 아주 용기있는 존재인거다. 물론 상대방도 나와 비슷한 총량의 극단적인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반동으로 나와 그런 일들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상대역을 해 준다는 것은 큰 용기와 사랑이 필요한 일이다. 인간적으로는 설령 물고뜯고 죽이고 싶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영혼들이 원하는 길은

  나부터 나의 극단성을 확인하고 인정하고 균형과 조화점을 찾는 것이 상대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상황 전환이 빠르다. 나를 얼마나, 어디까지 인정하는가? 그리고 균형과 조화에 얼마나 다가갔는가? 이것이 사실 새로운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나의 경계를 스스로 온전히 확인하고, 정확한 나의 경계 지점을 깨뜨려서 내 옆의 누군가와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한쪽이 그저 참는 것과는 다르다. 견뎌 주는 것과 도 다르다. 해당 부분에 있어서 좀더 자유로움을 찾아갔다는 이야기이다.

 

 "내 경계를 깨고 새로운 조화로움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앞서 맨 처음에 이야기한 '우리가 기억하는 근원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사실 [우리가 '사랑이라 인식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영혼들이 가고 싶은 방향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주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
 이를테면 쌍둥이불꽃들이 함께 했을때의 완전하고도 온전한 기억,
모든 존재가 탄생되었을때우주가 나를 품어주었던,
엄마의 품 같은 기억은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느꼈던 그 순간 바뀌어있었다.
우주는 멈춰 있지 않으니깐 말이다.


 우리가 사랑이라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이 어느순간에는 지극한 사랑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이 전혀 사랑이 아니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근원적 사랑'은 인간적으로는 각자 자신의 고집과 관념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집단화되면 사상이 되고, 종교가 되고, 이념이 된다. 그래서 '자신이 곧 죽어도 맞다'생각했던 것에 대한 관념을 깨고 유연한 인식과 사고를 갖는 것은 우리 각자의 관계성에서도 꼭 필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와도 연관이 깊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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