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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ea Nov 04. 2024

망한 연애를 복기해보면


 모든 성장에 앞서서 가장 빠른 방법은 자기인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상대방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경험은, 각 영혼들이 자신들이 뛰어넘을 지점들을
경험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다.
 


앞서 각 영혼적 존재들의 이별까지도, 심지어 한 몸 같았던 영혼들의 이별까지도 자신들의 온전한 선택이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우리 인간사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우리가 인간사를 살다 보면 이런 시야를 잃기가 쉬운데, 특히 인간적으로 우리가 불쾌하거나 슬픈 경험을 한다고 하면 더더욱 억울하거나 슬픈 마음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의 성장 과정 자체에는 항상 죽음이 동반된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유로움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에너지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인간의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존재이든 현재까지 자신을 살게 했던 인식의 틀이 있다. 그것을 통해 어느정도 성장하지만, 또 그 인식의 틀로서는 한계가 존재하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곧 죽어도 지켜왔던 신념'은 나의 굴레이자 족쇄가 된다. 우리가 자유로움을 원한다면, 그 틀을 완벽히 깨고 나오는 때가 필요하다. 심지어 내가 지금 이 글에서 '~~쪽이 좋다'라고 말하는 이 틀도 나중에는 내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하는 것일 거다.


 그 틀을 완벽히 깨고 나오는 때에 우리는 큰 두려움을 겪는다. 간혹 우리에게 시련인 듯 보이는 사건이 발생할때 우리가 큰 위협감과 두려움, 때로 상처까지 느끼듯이 말이다. 그러나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지금 내가 어떤 자유로움을 간절히 원하기에 이토록 위협적인 사건을 겪는단 말인가' 하고 말이다. 사실 그런 때에는 저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상황이 나를 옥죄여올 것이다. 그러나 실상 상황이 나를 옥죈다기 보다는 나의 인식의 한계가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스스로를 옥죄고 있을때가 많다.


 우리가 어떤 위협적인 상황에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요리조리 피할 길을 찾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그냥 한번 죽자'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 생존하고자 하는 안간힘을 빼고 그냥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나의 인식의 틀로 그 상황을 예단하거나, 그 상황을 피해갈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을 찾는 것도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때는 사실 정말 죽어보고 싶은 것이다. 하나 깨고 나가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낡은 것을 보내야 새 것을 받을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영혼과 에너지의 성장에도 유효한 일이다. 우리가 기존의 인식에서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다면 그 어떤 새로움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아니 난 뭔갈 버렸는데?'하는 순간도, 사실 그 인식의 틀을 완벽하게 한번 깨고 나왔다기 보다는,그저 기존의 인식의 틀 안에서 무언가를 약간 바꾼 것일 수도 있다. 말했듯 영혼의 크기는 아주 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의 뿌리도 아주 깊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 뭐 하나 넘은거 같은데, 나는 그 과제에 있어서는 이미 졸업한 것 같은데다른듯 본질이 비슷한 일에 계속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때는 '나의 인식의 경계가 이렇게 뿌리깊구나' 인식하고, 인정하고, 더 용기를 내면 된다.


 사실 한 존재가 자신의 경계를 깨고 나온다는 것은 굉장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한 생에서 이렇게 자신의 두려움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여러 번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예수님이 부활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생 안에서도 완벽히 자신의 두려움을 깨고 나올 수 있다면, 우리의 경계를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거나 다름 없다고 말이다. (그분이육체적 영생에 대해서 환상을 심어줘버리기도 했지만) 사즉생이란 말이 너무도 맞다. 실제 우리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하나를 영혼은 새로이 에너지를 받을 수도 있고, 그를 통해 성장해나갈 있다.


 그렇다면 영혼이 두려워 하는 것이란 대체 뭘까? 우선 우리 인간의 두려움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대부분의 두려움은 '육체'안에 우리를 한계지을 때 발생한다. '


우리는 애초에 영혼적인 존재로부터 출발했다.
우리의 육체 또한 스스로가 창조한 것이다.
우리의 삶도 영혼적인 우리가 스스로 창조한 것이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무슨 특별한 사실도 아니고, 비밀도 아니고, 그저 우주의 진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잊고 있는 진실이기도 하다. 잊고 있는 것조차 이유가 다 있다. 지구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위해 이 사실을 그저 잠궈 둔 것이다. 그마저도 스스로의 영혼의 힘으로 잠궈 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알게 된다면 우리가 인간의 삶에서 가질 수 있는 수많은 두려움들이 어느정도 해소가 된다. 죽음은 무섭지만 딱히 그렇게까지 무서울 일은 아니게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두려움,  다른 시야로 바라보기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두려움에 대해서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우리가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는 것은 바로 '돈'에 대한 것일 것이다. 사실 돈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이고, 그만큼 함축하는 것이 큰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돈에 대해서 그렇게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첫번째로는 '육체적인 생존 본능'을 직접 건드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살면서, 우리는 이 인간적 육체의 소멸에 대한 많은 두려운 사건들을 겪어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육체 안에만 우리를 가두어 놓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도 아주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혼적으로 갖고 있는 두려움, 영혼적인 목표성과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느끼는 여러 두려움들이 영혼적으로는 어떤 목표성을 띄고 있는지 몇가지 정리해보았다.


돈에 대한 집착 ->           '돈'이라는 한정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의

                                   창조력 상승에 대한 갈망


직장에서 잘리는 것 ->      타인으로부터, 혹은 더 큰        존재로부터 인정욕구로부터의 자유


경쟁에서 밀려나는 것 ->   상대성으로부터의 자유,

                                   온전한 '나만의 빛'을 다시 회복하고, 그것을 발휘하고자 하는 갈망


팬데믹, 경제위기, 이념의 갈등 등 외부로부터의 큰 흐름에 삶이 흔들리는 것 ->

                                                   외부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어떤 것'을 찾아가고자 하는 여정,

                                                   '삶은 온전히 내 에너지로부터 창조된다'에 대한 온전한 이해


크나큰 배신 ->                                         '나'의 경계를 완벽히 한번 깨고 나가기 위한 이벤트


가까운 사람과의 끝없는 갈등과 반목->           더 깊은 자기 이해를 통한 사랑의 영역 확대



무수한 예를 들 수 있겠지만,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단지 '영혼적 사고를 어떻게 인간적인 삶에 적용하는지'에 대한 적한적 예시이며, 모든 존재가 같지는 않다는 것은 분명히 해 두고 싶다. 같은 상황에 대해서 영혼이 백명이면 백가지 목표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을 저렇게 해석할수도 있겠다'정도의 관점으로 봐 주시면 될 것 같다.

  다만 큰 방향성은 이것이다. '내가 어떤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 자유를 원하는가?' 하는 부분인 것이다. 때문에 인간적으로 설령 실의에 빠질 법한 일을 겪더라도, 영혼적인 시야에서 그 부분을 해석한다면 돌파구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올 수 있다.


인간과 자신의 영혼이 삶의 방향을 함께 잡을 때 우리는 불필요한 헤맴을 줄일 수가 있다. 우리 영혼의 삶의 방향성을 강물이 흐르는 방향이라고 하자. 그 강물 안에서 노를 젓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강물의 흐름을 역행해서 노를 젓는다면? 금방 힘이 빠져버리고 말 것이고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 것이다. 반면 강물의 흐름을 잘 탄다면 우리는 한결 수월하게 우리의 길을 갈 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를 복기해보자


우리가 과거의 망령에서 허우적댈 필요는 없지만, 내가 살아온 삶도 내 에너지의 중요한 데이터라서 완전히 갖다 내버릴 수는 없다. 앞서 우리의 영혼이 인간의 삶을 스스로 창조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치 우리의 영혼이 전지전능한 조물주와 같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혼 자체에 한계점이 있다. 영혼 자체가 발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 영혼 자체가 창조한 우리의 인간적 삶 안에는 영혼 자신이 뛰어넘고자 하는 바가 펼쳐져 있다. 영혼 자체의 에너지가 삶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영혼의 지혜도 펼쳐져 있고, 영혼의 한계도 삶에 펼쳐져 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 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를 복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모든 상황이 우리가 창조한 것이라는 데에서는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비극적인 일인 듯 보이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반복되는 어떤 사건 속에서, 내가 특히나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면(감정이 격해지거나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하여간에 이성을 잃을 만한 상황이나 상대) 그 부분을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저 부분은 다시 말하면 내가 갖고 있는 카르마의 지점이다. 내가 갖고 있는 극단성의 지점이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자, 내가 가장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며, 내가 간절하게 뛰어넘고 싶어하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대부분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가족 관계가 아니라도 자신이 주로 중점적으로 새로이 창조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 마주하는 부분이 많다.


셀프체크타임

Q. 내게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내가 분노하게 되고, 이성적으로 판단이
    어려운 사건(대상) 무엇(누구)입니까?


예를 들어 그것이 연애나 결혼생활에서 발생된 사건이라면, 어떤 특정 상대와 그런 부분을 반복했을 수도 있고, 상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거다. 물론 시시비비를 가리는 싸움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의 명확한 경계지점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서로의 영혼이, 왜 이런 사건사고를 기획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의 영혼이, 한걸음 더 자유로움으로 향하고 싶은 영혼이라면, 이런 사건사고를 겪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상대 역할을 해주고 있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자유를 원했을까?' 하는 것이다.


 정말 아주 쉬운 언어로 표현하면 그냥 자기고집 꺾으면 된다. 그러나 굉장히 어려운 경우가 있다. 각자의 고집이, 사회에서 '맞다'고 하는 통념과 맞아 떨어질 때, 이게 맞는거다 혹은 '이게 사랑이다'하고 내가 상대에게 표현했던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 굉장한 역풍으로 돌아오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어떤 도덕관을 지닌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도덕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 통념적으로 대부분 맞다고 하는 방향이다. 그래서 '이게 맞는거야'하고 상대방한테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백명한테 물어봐도 그것이 '맞다'라고 말할 만한 어떤 부분이다. 그것을 상대방이 어겼을 때, 백명의 판관에게 물어봤더라도 그것은 상대방이 틀리고 당신이 옳다 라고 말하는 어떤 상황이 있다고 해 보자.
 나는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야 이게 맞는데 너는 왜 자꾸 그걸 어기니, 백명에게 붙잡고 물어봐, 너가 잘못된거지 나보고 잘못됐다고 안그래' 라고 말할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한다. 상대방은 끊임없이 내 말을 안듣는다. 같은 상황은 반복된다. 상대방은 고쳐지지 않고 나와 감정의 골은 깊어져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속박을 끊고 자유로움으로 향하고 있다' 를 이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보면 될까? 나는 도덕관에 심취해있는 사람이니, 그것을 다 무시하고 한번 막나가보면 되는 걸까? 나의 원래 성향과 완벽히 정반대로 나아가 보는 것은, 내 에너지의 반동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반동적인 에너지를 발현해보면 나와 상대가 딱히 다르지 않다는 아주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지만, 또다른 반동에 휩싸일 수도 있다.


 사실 위의 예시에 등장한 사람이 자유로움이 없는 부분은, 그 도덕관 자체가 아니다. '그 도덕관만이 맞다, 그것을 곧 죽어도 지켜야 한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는 그 자체가 집착인 것이다. 부차적인 문제로는 '무결함에 대한 집착' 일 수도 있고, 어떻게든 상대를 내 곁에 두려는, '상대 자체에 대한 집착' 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를 돌아볼 때 가장 1단계로 중요한 것은, 그동안 내게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내 집착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곧 죽어도 이거 아니면 안된다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이 본인이 집착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고
자유를 찾고 싶어 하는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신념을 통해서 크게 무언가를 이뤄 본 사람들이 무언가 허전해 하고, 갈 길을 못찾는 듯한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살게 해준 신념은 또한 내가 어느 순간은 깨고 나와야 할 것이기에 그렇다.



외부적인 조건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살펴보기

 때마다 유행하는 사조가 있다. 그 생각의 다양성은 우리의 관점을 넓히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 각자가 가진 문제를 너무 일반화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때마다 유행하는 어떤 사조를 따르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집착을 살펴보고 그로부터 나의 에너지를 다시금 정렬해나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내 환경 또한 나의 에너지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나의 경계를 보여주고, 깰 만한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라면 그 당시에 자기자신을 돌아보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나의 경계를 깨는 것은 말 그대로 '나'자체가 와장창 깨질 것만 같은 상황이라서 내가 손상되거나 잘못되거나, 또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사실 그 모든것들을 내가 원해서 겪었다거나, 내가 창조한 것이라는 말도 잘 위로가 안될 것도 같다. 나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불행의 모든 원인을 내 삶의 다양한 모든 것에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것은 정확히 같았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방법들로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도무지 용서가 안되던 스스로에 대해서 더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저, '자기자신을 더 사랑하세요' '적일수록 용서하세요'같은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런 말들을 가장 가식적이라 여겼었다) 사실 내 자신이 곧 죽어도 용서가 안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며, 적은 적일 뿐이고 잘못은 쟤가 했고 나는 억울해 죽겠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는가? 나는 딱히 그렇게 대자대비하고 착한 애도아닌데 말이다.

나의 영혼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하고,사랑하는 것은 단지 감정적인 이해 뿐 아니라, 이성적으로도 납득이 가는 과정이었다. 마치, 어떤 수학 공식에 대해서 '그냥 외우세요'가 아니라, 그 공식이 만들어진 증명 과정을 쫙 펼쳐놓고 '이제 이해가 가니?'하는 것 처럼, 나 자신의 전개도를 주욱 펼쳐놓고 스스로 납득해가는, 아주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일련의 과정들, 영혼의 이야기와, 우리의 여정과, 우리의 삶이 창조되는 과정을 이해하고 나니 많은 퍼즐이 짜맞춰지면서, 나는 나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고, 나를 알아가고, 사랑할 있게 되었다.


나에 대해 인정한다는 것


나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간다 함은 문자 그대로, '내가 몰랐던 나' '나의 영혼적인 모습'까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더 날것의 거친 스스로를 마주해야만 했었고, 선과 악의 개념을 넘어선, 그 자체로 스스로를 좀더 이해해가는 과정이 있었다. 나 자신을 마주하고, 내가 해왔던 모든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사실 가장 어려웠고, 현재도, 앞으로도 가장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도 그 부분이 가장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맨얼굴은 때로 마주하기가 힘이 든다. 그러나 마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나' 또한 나다. 그 부분만 삭제하고 외면해버리고, 사랑해주지 않고 싶은가? 그 부분은 자기자신이 아니라는 것일까? 나는오랫동안 그랬다. 그냥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삭제하고 외면해버리고 싶었다.

 개인적인 존재적 특징으로 본다면,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를 외면한다는 것은, 곧 쌍둥이불꽃을 박차고 나와버린 내 모습과도 같았다. 좀더 확장해서 보면 내가 인정하고 싶은 세상만 보고,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과 같았다. 마치 없는 세상인 것 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보고 싶지 않고,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세상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관념'이 현실을 왜곡했던 것 뿐이다. 그것은 세상의 절반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았다. 나 자신의 절반만 사랑한다는 것과 같았다. 내가 삶에서 겪었던 낮은 자존감의 문제들은 거기서부터 기인하는 것들도 아주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나와, 그것이 확장된 내 영혼적인 모습까지 사랑한다는 이야기이고,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용서한다는 이야기이고, 내가 스스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한 만큼 세상 만물에 대해서 더 깊이 사랑하고 이해할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우주의 무한함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간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래서 자기인정이라고 하는 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방향 '경계를 깨고 자유를 얻는다'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 말도 있는 만큼, 이것은 처음에는 매우 쉽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이 자꾸 외부로 향하기 때문이다. 어떤 잣대로 시시비비를 끊임없이 가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들이대는 어떤 잣대는, 내가 스스로에게 걸고 있는 강력한 제약일 수 있다. 내가 세상에 어떤 가혹함을 계속 뿜고 있다면, 같은 잣대로 내가 제약이 걸릴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이벤트의 강도를 줄이는 방법


 이로서 우리에게 발생한 일들이,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 서로 창조한 일' 이라는 데에 대한 이해가 어느정도 생겼을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강력하게 남아 있는 습이 있다. 우리가 '이거는 영혼의 자유를 위해 서로 창조한 일이야'라는 걸 알았다손 치더라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동시에 상대방에게도 그걸 알려주고 싶다는 거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이건 영혼이 창조한 일이니 너도 너 자신을 돌아보라'라고 말해주기 전에, 그냥 나 자신부터 바꾸는게 가장 빠르다. 왜냐하면 저 문장 또한 새로운 제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용-반작용 적용해보기


 예전에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를 벽과, 벽을 미는 힘으로 표현한적이 있다. 손바닥으로 벽을 밀면, 동시에 벽도 같은 힘으로 손바닥을 민다.벽을 세게 밀면, 벽도 손바닥을 세게 밀 것이다. 또다른 예시가 있다. 벽에 공을 쎄게 던지면 다시 나에게 쎄게 돌아온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인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어떤 극단성의 부분(집착)이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다른 극을 창조한다. 따라서 자신의 극단성을 줄이면, 그와 쌍인 반대 극단의 사건도 줄어들게 된다. 이것을 알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더라도 헷갈리는 지점이 있을 수가 있다. 보통은 '나의 극단성을 줄여보자'하면 표면적인 행위부터 바꿔보게 된다. 상대가 발끈해도 대응하는 것을 참아본다거나, 말을 부드럽게 본다거나 하는 부분 말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유효할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마법처럼 상대가 바뀔 수 있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도로아미타불인 순간이 오는데, 그때는 좀더 의식의 뿌리 깊이, 영혼 깊숙한 곳까지 내 집착의 어떤 부분이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행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어떤 나의 인식의 한계를 깼다면, 그것을 완전하게 보완해 주는 것이 그것을 직접 삶에서 실천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식이 설령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행위로 표현해보는 것이 참 쑥스럽기도 하고 용기도 필요하고 안하던 짓을 해보는 것이 쉽지 않은 행위이기는 하다. 행위라고 하는 것은, 내 바뀐 인식을 완성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행위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행위적으로 바뀌어 봤는데도 뭔가 반복되는 느낌이라면, 더 깊은 의식 속에, 영혼에 박힌 집착의 뿌리를 캐기를 영혼이 간절이 원하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면, 그와 관련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고, 그정도로 충분하다 생각되면, 해당 부분에서 당신은 해방될 수 있다.


반대가 꼭 반대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비슷한 사람 사이에서도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보통은 서로 다른 모습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쟤는 나랑 너무 반대라서 이해가 안 가' 하는 부분 말이다. 그러나 위에 설명해두었듯이 작용-반작용 을 적용해보면, 서로는 서로의 극이 창조한 사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꼭 정반대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쪽의 극은, 다른 한쪽의 극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수철을 한 쪽으로 누르면 그 용수철에는 반대쪽으로 향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고, 공을 쎄게 던지면 나에게 다시 쎄게 돌아오는 것과 같다.

 실제로 많은 영혼들이 극과 극을 오가는 방식으로 성장해오기도 했다. 내가 한쪽 극이 너무 심하게 있다, 하면 그 다음 생에는 그 다음 반대 극의 삶을 경험하면서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고 경험치를 쌓아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내가 이쪽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대 성향은 갖고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나도 언제든지 저리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당히 유익했던 방법이다.

 나랑 반대되는 성향의 존재에게 무어라 들이붓고 싶다면, '내가 전생 어느 때에 저렇게 살았는데 뭔가 문제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주고 싶기 때문인' 경우도 있다. 모두가 전생의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나랑 반대라 느껴지는 사람, '나는 절대로 저렇게 안될거야'했던 사람의 입장에 나 또한 언제든지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우리가 상대에게 그렇게 날을 세우는 데 있어서 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나의 예로 들어보자면, 나 역시 '올곧은 인간에 대한 상'이 매우 강력했었고,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 굉장히 가혹한 시선을 갖고 있었는데, '그 올곧은 인간상'에 대한 가혹한 잣대로 스스로 도마 위에 오르는 경험을 해왔고,  또 나만의 기준을 모두 빗겨나가는 경험을 이번생에 해 왔다. 그런 잣대에서 많은 부분 벗어난 지금(완벽히 벗어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나는 많은 부분 편해졌다. 나를 대하는 시선도, 세상을 대하는 시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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