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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less May 15. 2021

부처의 고향

네팔 룸비니로의 여행

흔히들 부처를 인도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부처는 네팔 남부의 작은 부족 국가 출신이다. 두 번째 네팔 여행을 계획하며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 룸비니(Lumbini)는 바로 부처의 고향이다.

룸비니로 가기 위해서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나 버스를, 포카라에서는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포카라 여행을 마칠 때 쯤 숙소 주인이 적당한 조건으로 차를 한 대 주선해줬는데, 예상과 달리 호사스럽고 편안한 여정이 되지는 못했다. 룸비니로 이어지는 싯다르타하이웨이는 부처의 고행길을 따라 놓인, 고속도로라는 명칭과 달리 천 길 낭떠러지를 잇는 아슬아슬한 도로였다. 맘놓고 잠이 들기는 어려운 길이었는데, 아슬아슬한 길을 따라 달리는 대형버스와 트럭을 구경하는 재미도 괜찮았다.

꼬박 반나절을 달려 도착한 룸비니는 작은 마을이었다. 소 한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장면이, 그야말로 목가적이라고 해야 할까. 룸비니의 중심가에서 숙소를 찾았는데, 대부분의 숙소가 만실이었고 남아있는 방은 생각보다 비쌌다.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자, 숙소 주인은 대성석가사로 가보라고 권했다. 들어보니, 약간의 기부금을 내면 식사와 숙박을 제공한다고, 그래서 많은 참배객들과 관광객들이 묵는다는 설명이었다.

대성석가사는 네팔에 있는 유일한 한국 사찰이다.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식사와 숙소까지 제공하는 줄은 몰랐었다.

유엔은 룸비니개발계획을 세우면서 불교 사원 지구를 조성, 각국의 사찰들을 유치했다. 대성석가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절인데, 실제로 본 대성석가사의 본당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규모에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그 규모에 비해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절 입구의 행정실로 보이는 곳에서 방문 등록을 하고 약간의 기부금을 냈다. 넓은 방은 8인실이었고, 좀 더 작은 방도 고를 수 있었다. 일행이 많지 않아, 작은 방을 선택하고 짐을 넣어둔 뒤 동네 산책을 나섰다.

절 앞 노점상에서는 처음 보는 음식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아 나중에 먹어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룸비니를 떠날때까지 노점상은 다시 열지 않았다. 그때 바로 하지 않으면 항상 후회하게 된다.

나마스떼. 인사를 건네자 길을 가던 아버지와 아들은 환한 웃음을 보여줬다.

동네 구경을 나서려는데, 사원지구를 돌아보지 않겠냐며 인력거 아저씨가 호객을 했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호기심도 생겨 얼른 인력거에 올랐다.

그런데, 타자마자 곧 후회가 됐다. 무게가 꽤 나가는 거구의 외국인이 비쩍 마른 아저씨의 인력거에 타고 가는게 뭔가 그림이 이상한 것 같고, 딱히 잘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저 자전거가 타고 싶어졌어요, 약속한 반나절치 요금을 드리고 숙소로 가자고 말씀드렸다.

대성석가사에서는 자전거를 빌려주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일하는 분들의 개인 자전거를 약간의 돈을 받고 빌려주는 것이었다. 나름 윈윈이랄까, 마지막 남은 자전거를 빌려 다시 사원지구로 향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몇 군데의 절을 돌아보고 마야 데비 사원으로 향했다. 마야 데비는 부처의 어머니로, 사원은 부처가 태어난 곳이다. 기원전 300년 경에 세워졌고, 어린 부처의 몸을 씻었다는 구룡못과 기단, 아쇼카석주가 유적으로 남아있다. 전세계 불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성지순례지이기도 해서 매년 수천만 명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사원의 곳곳에는 보리수들과 타르초가 자리하고 있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의 손자나무 앞에는 한 무리의 불자들이 경전을 외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마음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하얀 건물 안에는 부처의 발자국이 있었다. 들여다보니, 문득 싯달타하이웨이가 생각났다. 여기까지 고행의 길을 걸어왔겠구나. 아쇼카석주는 이곳이 부처의 출생지임을 밝히고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피야데시왕(아소카 왕의 다른 이름)이 20년을 기름을 부어 성스럽게 하노니, 직접 납시어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숭배를 하니 “여기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났도다” 말을 상징하는 돌로 이 석주를 세운다. 여기에 룸비니의 이 마을에서 성자가 태어났으니, 세금을 면하고, 생산량의 일부만 납입케 하라.”

여담이지만, 룸비니라는 이름은 생소해도 서역천축국이라면 들어본 기억이 있게 마련이다. 서유기에서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간 서역천축국, 그곳이 바로 룸비니다. 그래서인지 룸비니에는 유독 원숭이들이 많다.

너도 손오공의 후예냐, 어슬렁거리는 원숭이를 놀리다가 돌아보니 보리수 아래에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열살 쯤 되었을까, 소녀의 앞에는 참배객들이 모여있었다.

다가가보니 사람들이 소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소녀는 티카를 찍어주거나 손을 잡고 뭔가 축복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아이도 쿠마리와 같은 존재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소녀가 손짓을 해왔다. 무심코 다가가자 손목에 몇 가닥인가 실을 감아주며 축복을 해주는 것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 발짓하며 얼마를 주면 되겠냐 물어보니, 돈은 필요없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며칠 후 만난 한 스님으로부터 소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소녀는 마야 데비 사원에 있던 힌두교 사두(성직자)의 손녀란다. 애초에 마야 데비 사원은 수 천년 동안 힌두교 성지였는데(조금 복잡한 얘기지만, 힌두교에서는 부처도 힌두교의 수 많은 신 중에 하나로 여긴다), 유엔의 개발 계획이 수립되며 사원 구역이 불교 성지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힌두교 사두들은 모두 밀려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이 소녀가 앉게 되었단다.

네팔 정부는 이곳을 불교 성지화하기는 했지만, 힌두교 신자들의 출입이나 의식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 신자들, 힌두교 신자들, 심지어 이슬람 신자들까지 와서 각자의 종교에 따라 의식을 행하고 예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예의 한가운데에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불교 신자가 오면 염주나 실을 건네고(내 손목에 감아준 것은 아마도 인연의 실이었던 것 같다), 힌두교 신자가 오면 이마에 티카를 찍어주고, 이슬람 신자와도 손을 맞잡으며 6년 째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축복을 해주고 있단다. 여러가지 생각이, 여러가지 감정과 함께 떠올랐다.

소녀의 동생으로 보이는 소년과도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어쩐지 부처의 얼굴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에게 다시 인사하고 숙소로 오는 길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만났다. 해질 무렵, 카메라를 들고 지평선까지 뻗은 길 위에 한참 서 있었다.

부처의 고향에서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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