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arless Apr 12. 2021

잘못 탄 기차

미얀마 교외선 유랑기

미얀마 양곤에서의 세째날은 아침 일찍 슈웨다곤을 다녀왔다. 벌써 두 번째 방문인데, 아마 몇 번은 더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숙소에 돌아와 늦지 않게 짐을 챙겨 리셉션으로 내려갔다. 카운터의 스탭은 언제나처럼 생긋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왔다.

 

체크아웃 하려고.
어디로 가?
바간행 야간버스를 탈거야.
바간은 멋진 곳이야.
짐을 맡겨도 될까? 좀 나갔다오려고.
물론, 몇시에 돌아올 생각이야?
여섯시 쯤. 이따봐.


배낭을 리셉션 한쪽에 두고 양곤순환열차를 타러 갔다. 

양곤순환열차는 서울지하철2호선처럼 도심을 빙글빙글 돌며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기차다. 요금은 우리돈 150원 쯤. 기차안 풍경과 지나쳐가는 역들이 근사하다고 해서 미얀마 여행을 계획하며 꼭 타기로 했었다.

식민지 시절 지어진 역사는 미얀마 전통 가옥과 현대적 구성이 어우러진 형태였다. 꽤 근사해서 넋을 잃고 보다가 열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곧장 표를 사러 갔다. 

양곤순환열차는 특이하게도 역사내 창구에서 표를 팔지 않았다. 창구에서는 7번 플랫폼으로 가라고 했다. 7번이 어딜까, 일단 대합실로 들어갔다.

열심히 두리번거렸지만 7번 플랫폼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닌가. 다시 역사로 되돌아 나가 제복을 입은 직원에게 물었다.


7번 플랫폼이 어디죠?
육교를 건너 저쪽으로 가세요. 


그럼 그렇지, 대합실에서 기다려서 될 게 아니었다. 직원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육교로 올라가니 표지판이 보였다. 저기군.

무사히 티켓부스 앞에 도착했다.


양곤순환열차를 타려고 하는데요.

여기 있습니다.
열차가 언제 오나요?
곧 출발합니다.


표를 받고 플랫폼을 보니 멀리 전철이 한 대 보였다. 우와, JR이네, 저걸 기차로 쓰는구나, 신기해하며 쳐다보는데 열차가 출발했다. 한 남자가 열차를 따라 달리더니 점프해 올라타는데 성공했다. 멋지네. 박수를 치고 두리번거리며 내 열차를 찾았지만 아직 도착 전인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뒤쪽 플랫폼으로 열차 한대가 도착했다. 7번 플랫폼, 낡은 열차는 예상했던 양곤순환열차의 모습이었다.

조금 높은 발판을 올라서니 양쪽으로 좌석이 배치된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다. 좌석은 플라스틱처럼 보였지만 나무에 페인트칠을 한 것이었다. 문이 있어야 할 공간은 뻥 뚫려 있었다. 창문은 닫을 수 있는 것 같았지만 문과 마찬가지로 열려있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열차는 긴 경적소리를 울리고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곤 시내를 돌아다니며 종종 발견했던, 철로에 빨래를 말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 라인은 계속 안다니는 걸까, 열차 스케줄에 맞춰 빨래 위치를 바꾸는 걸까, 궁금해졌다.

열차는 조금 속도를 냈지만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다. 도심을 벗어나자 산업시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낡고 쇄락한 풍경들이 느릿느릿 스쳐 지나갔다.

기차는 제법 많이 흔들렸다. 때때로 기우뚱하면서 위태위태 그대로 달려나갔다. 설마 넘어지지는 않겠지, 불안하면서도 놀이공원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로 앉거나 비스듬히 기대거나 아예 누웠다. 두 남자가 자리에서, 그리고 문 앞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기차 안으로 담배 연기가 느릿느릿 돌아다녔다.

세 번째 역에서 수박을 파는 행상아주머니가 열차에 올랐다. 우리돈으로 300원. 아주머니는 수박 한조각을 네모나게 잘라 긴 꼬지와 함께 비닐봉지에 담아주셨다. 

사람들이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새 열차 안은 수박냄새가 가득찼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여름날이었다. 규칙적으로 덜컹이는 기차의 리듬에 맞춰 차창밖을 보고 있으니 슬그머니 눈이 감겼다. 다리를 길게 뻗고 자리에 누웠다.

잠깐 잠든 것 같은데 눈을 뜨니 한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어느새 멈춘 객차에는 혼자뿐이었다. 다시 머리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구글맵을 켜보니 양곤 남동쪽의 어느 곳이었다. 지명이 써있기는 한데 버마어라 읽을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 난 누구? 가방을 챙겨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객차간 연결통로가 없어서 플랫폼에 내린 다음 다른 칸에 타야하는 구조였다.) 뒷 칸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실례. 네들 중 누가 영어 하니? 

여학생들이 일제히 남학생 하나를 가리켰다. (ㅋㅋㅋ) 

이 열차 양곤 가니?
가는데요. 

남학생이 대답했다. 휴우, 다행이다. 돌아가기는 하는구나.

여기서 얼마나 걸리니?
한 시간요. 

여학생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다른 학생들이 일제히 아냐, 더 걸려, 진짜? 토론을 시작했다. 

두 시간요. 

잠시 후 다른 여학생이 대답했다. 합의에 도달한 것 같았다. 식은땀이 났다. 애초에 세 시간 정도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가려고 했는데, 소요 시간이 네 시간 반으로 늘어나있었다.

이 열차가 순환열차 맞니?
아뇨, 교외선인데요.

헐. 열차를 잘못 탄 거였다. 어쩐지 순환선이 자꾸 스위치백을 하더라. 어쩐지 도심이 아닌 것 같더라. 시간을 계산해보니, 다행히 야간버스는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한숨을 쉬고 학생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다.
별 말씀을요.

손을 흔들고 학생들의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내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아 억지로 웃음을 지으니 그제서야 다시 자기들끼리 얘기에 빠져들었다.


어쨌든 풍경은 아름다웠다. 순환열차는 타지 못했지만 교외선을 탄 덕에 열대의 농촌 풍경을 보게 됐다. 이제와 조바심을 내봐야 소용 없었다. 풍경과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기차가 다시 도심으로 접근할 때 쯤 스콜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이 열려있으니 비가 그대로 열차 안에 들이쳤다. 비가 왼쪽에서 들이치면, 사람들은 오른쪽 좌석으로 옮겨 앉았다. 오른쪽으로 비가 들이치면 사람들은 왼쪽으로 다시 옮겨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났다. 내가 낄낄 웃자, 눈이 마주친 건너편의 아이가 따라 웃었다. 폭우속을 덜컹거리며 열차는 양곤역으로 향했다. 

양곤역에 도착했을 때 비는 그쳐있었다. 예정보다 한시간 반 늦은 시간, 택시를 불러 숙소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짐을 찾고 팁을 주는 것도 잊고 서둘러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조금 빨리 가주실래요? 택시기사님의 터프한 운전 덕분에 버스 출발 30분 전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런데, 말이 터미널이지 벌판에 띄엄띄엄 작은 건물들이 모여있고, 각 건물들에 버스회사가 있는 식이었다. 통합 시스템이 아니라 그냥 아무데나 내리면 자기 버스를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불빛도 거의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티켓카운터(로 보이는 곳의) 직원에게 바우처를 내밀었다.

네 버스는 한시간 반 뒤 거네? 저기 대합실에서 기다리렴.

헐. 이번에는 버스 시간을 착각한 것이었다. 오늘도 역시 대단하네, 허탈한 웃음이 났다.

잠시 터미널을 구경하고 바간행 버스에 올랐다. 

당분간 안녕. 멀어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이전 09화 아난다 사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