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환상으로 두는 일

by 김경민

어릴 적 티비로 봤던 미지의 세계는 나에게 낭만을 심어주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내가 언젠가 가볼 수 있을까?‘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던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낭만, 그리고 환상.


눈을 감으면 그려지는 아름다운 그곳.


나는 밤마다 두근대는 심장과 함께 잠들 곤했다.

갈 수 없었지만, 가 볼 수 없었기에 가졌던 설레임.


그렇게 시간이 지나, 수많은 생채기에도 무심하게 된 나이가 되었을 무렵에, 나는 깨달았다.


환상은 환상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내가 꿈꿔왔던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유명한 사람과의 대화, 바랐던 일의 성취.


그러나, 바라온 환상을 직접 마주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환상일 수 없었다.


현실.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을 마주했던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곳은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고, 기대했던 인물은 그도 사람이었으며, 꿈꿔왔던 성공은 지나고 나면 그저 미지근한 일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꿈꿔왔는가.


현실과 마주한 순간, 내가 느낀 건 슬픔이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실망감을 넘어선 허무감.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는 초콜릿 상자를 기대감을 가지고 열었는데, 그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공허했다.


그렇다면 열어보지 말걸.

뒤늦은 후회는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곤 했다.


환상을 환상으로 남겨두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환상을 모두 현실화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에 흥미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인간이 흥미를 잃지 않은 채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빛.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 세상은 슬프기만 하다.


나의 삶의 이유.

내가 살아가게 만드는, 가보지 못한 지점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


이것을 위해, 환상은 환상으로 남아야 한다.


‘환상은 환상일 때 가장 아름답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자, 가장 처절한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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