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다 때때로, 개인주의가 만연해진 사회를 응시하며 새삼스레 쓸쓸함을 느끼곤 한다.
사람 간의 유대가 일어설 자리를 잃고, 그 자리를 개인주의가 차지해버린 시대.
좋은 말로 하면 개성의 시대, 나쁜 말로 하면 무정한 시대.
사람들은 타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말로 지금껏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약속되어온 상식적 행동을 무시하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집단적 형식주의는 자신을 구속하는 불편한 겉치레인 것처럼.
집단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사고해야만 우리가 갖출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의’와 ‘융통성’, 그리고 ‘정’.
그리고 개인화된 한국 사회에서, 이 모든 것들은 소실되어 간다.
집단에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가치들은 ‘공감’에서 출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이 사라진 시대에서는 명분화된 원칙만이 판단의 잣대가 된다.
‘예의’는 규칙대로만 행동하면 되는 것.
‘융통성’은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되는 것.
‘정’은 모르는 타인에게 굳이 줄 필요없는 것.
사람들은 규칙이라는 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다.
사회적 문제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러한 개개인들의 사고 속에 사회는 삭막해져만 갔다.
그토록 바라던 개인주의가 사회의 중심에 떠올랐음에도,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하다.
실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안부 인사가, 온기 어린 배려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
그러나, 결코 마음의 문을 열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지금껏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집단주의에 대한 반항으로써 현재 개인주의에 대한 갈망과 해소가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사람 간의 유대가 단절된 사회는 마음의 병이 생겨난다.
아무리 의사가 좋은 약을 처방해주고, 심리치료를 받는다해도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공감이 결여된 사회에는 고독과 외로움만이 만연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주의를 씁쓸해하면서도, 가슴 한켠에서는 그 필요성 또한 공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차가운 사회를 무조건 해결해야될 심각한 숙제로 여기진 않는다.
한국보다 저발치 앞서 선진화를 이룬 유럽도 몇 백년씩이나 거쳐왔던 문제를, 후발 주자인 한국은 지금에서야 개인화 문제의 단계로 들어왔을 뿐이다.
그러니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오히려 단기간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오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 개인주의 사회에 도달했고, 그 병폐 또한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 내재된 슬픔들이 마냥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이것도 일종의 성장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성장통은 우리를 분명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끌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양단의 선 위에서 한국 사회는 지금도 균형을 찾기 위해 천천히, 그러나 분주히 움직인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지점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