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당신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언젠가 화면에서 강연자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화면을 끄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란 단어에 희망과 긍정, 에너지의 메시지를 담는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옳은 답’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 나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으니, 행복할 자격이 있어. 난 행복해야 해.’
하지만, 나는 행복에 관한 강연을 들을 때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거부감과 저항심을 느낀다. 왜 그럴까.
이럴 때면 모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삶의 이유와 지향성에 대해 나는 유일한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생각에 고독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스스로 되뇌인다. ‘내가 이상한 건가?’
그렇지만, 결국 다수의 군중 속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제자리에 그대로 멈춰서고 만다.
나는 행복이 버겁다.
인생이 항상 행복한 순간만 가득하다고 한다면, 행복은 결코 버거운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은 늘 순간마다 아픔의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가.
하루아침에 행복이 고통으로 바뀌는 순간은 그 어떤 칼보다도 벼린 칼날이 되어 나의 마음을 도륙낸다.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 공포스럽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행복이란 단어는 들을 때마다 거북스럽고, 피하고 싶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나는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불만족의 요소와 만족의 요소는 다르다. 불만족의 요소가 제거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만족한 상태라고 보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고통이 없는 삶이 주는 평온함 또한 누군가에겐 행복이 될 수 있다.
나는 온탕에 들어갔다가 무방비 상태로 냉탕에 몸을 빠뜨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온탕에서 냉탕으로, 냉탕에서 온탕으로 가는 삶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언제나 온탕의 옆에 있는 미적지근한 탕 속에 몸을 푹 담근 채 어떤 희열도, 어떤 기쁨도, 어떤 웃음도 가지지 않으리라.
그저 온몸을 감싸는 미지근한 평온 속에서 나는 기다릴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냉탕으로 내 몸이 빠질 순간을. 어느 순간 찾아온 냉탕의 차가움에 아픔과 슬픔을 견딜 수 있도록. 견뎌내어 무던하게 다시 허무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나는 거리를 걸어다니는 수많은 미지근한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