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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자 Sep 11. 2024

세상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 준다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

 궤양성 대장염의 치료에 진전이 없어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게 된 후로, 얻었던 용기들은 사라지고 다시 우울한 날이 지속됐다. 그 와중 류마티스 질환 중 하나인 강직성 척추염까지 내게 왔다. 그런데, 왠지 좋은 소식이 있었다.

 "궤양성 대장염과 강직성 척추염을 함께 진단받았기도 하고 강직성 척추염의 상태가 나쁜 수준이라서 생물학적 제제인 주사제 치료로 바로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렇다. 소화기 내과에서 진료를 볼 때 보험 정책이 바뀐 이유로 넘어가지 못했던 그 주사제 치료다. 내가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했던 이유 말이다. 면역억제제의 부작용이 두려웠던 내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실제로 나는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고부터 감기와 독감은 달고 살았고 몸에 힘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궤양성 대장염에는 분명히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주사제 치료의 보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강직성 척추염을 진단받은 지금은 면역억제제를 끊고 주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평생 관리해야 할 병이 하나 더 늘었음에도 우울하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주사치료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더 세세한 조건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드디어 주사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복용하는 면역억제제의 용량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에 맞춰 내 몸도 점점 예전의 상태를 되찾았다. 하지만 다시 용기를 내는 것이 힘들었다. 몸의 병에 비해 마음의 병은 극복하기가 힘들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책 어린 왕자의 구절처럼,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내면은 보이지 않기에 치료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내가 키운 닭을 닭장으로 보내게 된다.


 닭을 닭장으로 보내야만 했던 이유는 내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완치되지 않는 병에 걸려서? 내 병의 특성상 갑자기 아플 수 있어서? 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녀야 해서? 아니다. 그저 내가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언젠가 다른 것도 보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역시 회사를 다니기엔 무리였다. 생각을 바꿔보자. 회사를 다니기 어렵다면 내가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렇게 나는 입주청소를 배우게 된다.


 입주청소는 내가 병원을 가야 하거나 증상이 나타나 아픈 날에는 일을 잡지 않고 쉴 수 있으니 괜찮은 방법이었다. 두 명이 한 팀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의 특성상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나와 함께 일을 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처음엔 어려웠다. 우리에게 일을 주는 업체로부터 돈을 못 받고 연락이 끊기는 날도 있었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인해 내 병의 증상이 도지는 날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소홀히 여겼다. 일을 소홀히 여기는 만큼 가진 건 다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닭이 세상을 떠났다.


 닭이 죽는 걸 막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무능했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소홀히 여겼다고 했는데, 사실 일을 시작하고 몸이 아팠던 건 딱 한 번뿐이다. 주사제 치료가 시작되고부터는 일반인과 다름없는 수준이기도 했다. 그저 '또 아프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에 병을 앞에 내세우고 그 뒤에 숨은 것뿐이었다. 닭은 겁쟁이인 주인 때문에 죽었다.

 내가 이러려고 용기를 내고 다시 일어섰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또 주저앉는다면 어렵게 냈던 용기는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난 닭이 죽은 날, 용기를 낸 나는 두고 무능한 나를 닭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닭도 무능한 나와 정이 더 들었을 테니 말이다.

 무능한 내가 죽은 날부터, 나는 더 이상 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지 않는다. 현재까지도 말이다. 어쩌면 나는 궤양성 대장염이 아닌 마음의 병과 싸워왔던 걸까? 돌이켜보면 몸이 아팠던 순간보다 정신적 고통을 받는 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사건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닭의 죽음으로 의미를 찾았다.


 세상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 준다는 말은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견딜 수 있도록 힌트를 준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말의 의미가 완전히 바뀐다. 내 경험에 따르면 세상은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힌트를 준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을 했다. 고통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그저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삶이 고통인 우리를 위해 세상은 여기저기 힌트를 뿌려놓았다. 누군가에겐 닭을, 누군가에겐 가족을, 누군가에겐 사람을 주었다. 당신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그게 세상이 뿌려놓은 힌트다.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고 해도 분명 의미가 있다. 여태껏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 이유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깨달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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