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뭘 배우는데?
군대라고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사격, 수류탄, 화생방, 군인정신, 통제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거의 군사훈련이나 전술 같은 것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군대에서 배우는 건 뭐라고 생각하는가? 아마 위의 답과 비슷할 것이다. 군사훈련을 하며 전술을 배우는 것. 하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군대에서 배우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최대한 짧게 내가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들과 그에 대해 느낀 것을 얘기해보려 한다.
21살의 생일, 안타깝게도 나는 축하를 받아야 할 날에 입대를 했다. 부모님과 함께 논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카카오톡 프로필 뮤직을 바꿨다. 노래 제목은 임정희 가수의 진짜일 리 없어였다. 가사는 '이게 진짜일 리 없어'
내 감정은 뒤죽박죽이었지만 걱정을 끼치기 싫어 가는 내내 밝은 모습을 유지했다. 괜히 웃긴 영상도 틀어서 엄마와 같이 보고 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면서 말이다. 그렇게 어딘가 어두운 밝음을 유지하며 밥을 먹을 겸 휴게소에 들렀다. 여기도 빡빡이 저기도 빡빡이 괜히 안심이 된다. 왜, 학교 다닐 때 같이 혼나는 친구가 있으면 덜 무섭지 않은가. 큰 어려움도 함께 하면 덜 한가보다. 쟨 또 뭐야. 건너편의 빡빡이는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입대하는 날까지 일을 하는 건가? 대단하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간단히 라면을 먹고 바퀴는 다시 굴렀다. 차에서 내리는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찰나 나는 보고야 말았다.
'육군훈련소 입영심사대'
초록색 표지판 하나가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아마 엄마의 마음도 그랬겠지. 괜히 불효를 하는 것만 같다.
입영심사대에 도착 후 연병장 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제 부모님과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아들들 배웅해 주세요."
아, 진짜 가는구나.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빠, 엄마 잘 챙겨주세요. 술 너무 마시지 말고요."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연병장으로 집합했다.
"전체 차렷! 부모님께 경례!"
어설픈 경례를 하고 수많은 가족들이 서로 멀어졌다. 익숙함에 속아 잊고 있던, 소중함을 느끼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연병장을 벗어나 어느 자갈밭에 앉아서 대기를 했다. 이름을 부르면 나오라는 말과 함께 이름이 하나씩 들리기 시작한다. 내 중학교 때 친구와 같은 이름이 불리고 뒤에 바로 내 이름이 따라 불렸다.
"어? 네가 왜 여기 있어?"
중학교 때 친구와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얼굴도 같았다. 그 친구였다. 반가운 얼굴에 서로 웃음이 났지만 빨간 모자에 의해 그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그렇게 친한 친구도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는 그냥저냥 친했던 친구도 소중한 인연이다. 아마 안면만 있던 동창이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인연은 다 소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왠지 악연도 거기서는 반가웠을 것 같다. 이후로 그 친구와는 소대가 갈라져 오가다가 한 번씩 마주치는 게 다였다. 마주치는 짧은 순간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게 다였지만 그 순간이 참 반가웠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작은 안부라도 전하길 바란다. 서로의 안부를 묻던 그 짧은 시간을 생각하면 무소식보다 작은 안부가 훨씬 희소식이다.
내가 입대했던 시기에는 훈련소에서 동기들끼리의 대화도 자유롭지 못했다. 서로 반말을 사용하는 걸 들켜서도 안 됐고 수다를 떠는 것도 들키지 않게 했어야 했다. 그나마 자유로운 건 주말이었다. 물론 주말에도 눕거나 기대어 앉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외부와의 연락도 일주일에 한 번씩 5~10분간 전화를 하는 것과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외부의 소식, 뉴스 같은 건 볼 수도 없었기에 우리는 서로 유대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 네가 걔야?"
입대하는 길에 들렸던 휴게소에서 노트북으로 무언가 열심히 하던 빡빡이 이야기가 생각나는가.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나와 가장 친해진 바로 옆자리 동기가 그때 그 노트북 빡빡이였다. 휴대폰이 고장 나서 노트북으로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중이었다고 한다.
훈련소는 기초군사훈련을 통해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드는 곳이다. 우리는 군인이 되기 위해 매일매일 훈련을 나간다. 처음엔 전투복을 입는 것조차도 익숙하지 않고 훈련장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처음이 힘들지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어느 순간 전투복은 눈 깜짝할 새 갈아입고 훈련장까지 가는 건 산책이 된다. 군인이 되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는데 그 무엇이 예외겠는가? 처음에 힘들다고 그만두지 않았으면 한다.
훈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이 부분은 공감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니 읽지 않고 넘겨도 좋다. 확인하기 쉽게 표시를 해두겠다.
논산 훈련소는 훈련장까지 가는 길이 꽤 멀다.
그 말은 훈련장까지 갔다가 오는 길에 주구장창 걸으며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말이다.
나는 보통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엄마 생각은 안 났느냐 하면
훈련장을 오갈 땐 아버지 생각이,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엄마 생각이 났다.
아무래도 몸이 힘들 땐 아버지가, 마음이 힘들 땐 엄마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사실 난 아버지 생각은 많이 나지 않을 줄 알았다.
아버지는 워낙 강하고 혼자서 많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으니까
내가 걱정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부터 먼 곳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한 고생을 했을 아버지가 생각났다.
군대도 나보다 더 험한 시절이었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나이와 크게 차이도 안 날 때 가정이 생겼으며
엄마 일 시키기 싫어 혼자서 모든 걸 다 버텨 온 아버지 생각이 계속 났다.
묵묵히 우리 가족을 받쳐주는 기둥이 있었다.
그걸 마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준 먼 거리의 훈련장에게 고마웠다.
내가 이 부분은 공감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한 이유는 마찬가지로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모두가 이런 아버지를 가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정신교육 시간에 교관이 우리에게 질문을 했다.
"여기 군대 오고 싶어서 온 사람 있어? 없잖아."
갑자기 어느 훈련병이 손을 들었다.
"저는 오고 싶었습니다."
아직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 높지 않던 나는 그 훈련병이 눈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교관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건지 어이없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군대를 오고 싶어서 왔다고?"
훈련병이 답했다.
"네. 저는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에 자진입대 했습니다.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교관도 헛기침과 함께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무언가 느끼기 시작했다.
"아, 누구에게는 정말 오기 싫은 군대가 누구에게는 희망이었구나.
누구에게는 정말 돌아가고 싶은 가족의 품이 누구에게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옥이구나."
사람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때부터 내 입장만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훈련소에서 전술을 배운 게 아니었다. 내가 내적으로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것들을 배우게 된 곳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언젠가 꼭 글로 남겨두고 싶었다. 세상에 나갈지 내 서랍 속에만 보관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글로 남겨두는 것은 성공했다. 혹시 모르지. 휴게소 맞은편에서 봤던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던 빡빡이가 수많은 확률을 뚫고 나와 가장 친한 옆자리 동기가 되었던 것처럼, 나와 인연이 될 누군가라면 지금 이 이야기를 읽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