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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Nov 21. 2022

비로소 나로 마주하기

가끔 제게 종교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타인에게 이를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말 실수를 하게 될까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밝혀두자면, 제 종교는 불교이자 가톨릭입니다. 불교는 철학적으로, 가톨릭은 유신론적 불가지론자이기 때문에 믿습니다. 대학시절, 불교 경전과 성경을 탐독하면서 과연 신이 존재할까를 끊임없이 캐물었습니다. 운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컸습니다. 그래서 운명에 대한 글을 지금쯤은 한 번 써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운명은 이미 정해진 인간의 처지를 대변하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그것은 결국 신의 뜻이라는 함의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과거 철학 스터디에서 '자유 의지'를 두고 이른 저녁부터 늦은 새벽까지 떠들어댄 일화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과연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것인가, 혹은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미 신의 뜻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의견인가에 대한 주제였습니다.


저는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존재 본질에 대한 의미가 명확해질 것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상대는 인간의 자유 의지 또한 신의 뜻이라는 반론이었습니다. 신은 인간이 자유를 가지게 만들지만, 그 또한 신이 만들어놓은 규칙 안에서의 자유라고 얘기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 곳이 게임 속의 공간이라면,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결국 신이 정해놓은 플롯으로 흘러간다는 의미였습니다.


맞는 말인 것도 같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인간이 자유 의지로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나의 의견은 굽히기 싫었습니다.


데카르트가 남긴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에는 자유 의지로서 사고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찰이 담겨 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이 객체가 아닌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큰 요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석가모니가 남긴 "지금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생각한 모습, 인간은 결국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생각해봅니다. 누군가가 제시하는 운명에 기대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줄여나가고 있는 존재일까, 혹은 나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가면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들어가는 삶일까에 대한 고민입니다. 무엇이 편한 삶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후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굳이 제 발로 차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언을 기다립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이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운명'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운명적인 사랑'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이별' '운명적인 비극' 등이라는 단어들이 이를 설명해줍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운명적인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운명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우리가 그에 수렴해가는 과정에 처하는 것일지도요.


그렇다면 제게 왜 가톨릭을 믿냐고 물어볼 사람도 있을 거라 봅니다. 그럼 저는 답합니다. 어딘가에 신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어떤 규칙도 부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규칙이라면 삶과 죽음이 있다는 것 정도였을지도요. 예수님이 '사랑'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도 결국 너의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라는 가르침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유 의지대로 살 수 없게 만들었다면 굳이 아가페적인 '사랑'의 가르침이 필요했을까요?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가지고 수많은 인연들을 만납니다. 그 인연의 가능성을 저는 쉽게 재단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가능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열어둡니다. 그게 누군가가 운명을 버리고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되새깁니다.


최근 많은 소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때까지 내가 어떤 이야기들을 쌓아왔는지를 정말 진솔하고 포장없이 얘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살다보니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기도 해 기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그 사람삶과 이야기를 편하게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들기도 합니다.


바라는 것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운명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앞으로 성장하고, 나아가고, 함께 만들어가는 일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신이 만든 위대한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습니다. 저는 이 위대한 가능성의 세상을 비로소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렇게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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