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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Dec 11. 2022

모르는 게 많아지기

오랜만에 고향집에 다녀왔습니다. 학업을 위해, 또 일을 위해 본가에서 나와 오래 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제 방은 창고가 됐습니다. 지금은 창고 대신에 조카가 지내는 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제 방의 한 면을 채우던 책장은 사라졌고, 그 속에 꽂혀있던 책들은 박스에 넣어져 베란다 붙박이장 안에 넣어져 버렸습니다. 고향집에 다녀온 김에 박스에 넣어진 책들을 정리했습니다. 버릴만한 건 버리고, 팔 수 있을 만 한 건 팔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장 지금 서울에 있는 제 자취방의 책장도 포화 상태이기 때문에,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책들을 박스에서 꺼내 분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내 책이 아닌 것들을 먼저 골라냈고, 이후에는 정말 소중하게 읽었던 책, 추억이 담긴 책, 한 번 읽고는 방치했던 책, 이제 아무도 읽지 않을 책들을 분류했습니다. 소중하게 읽었던 책들은 몇 번이고 읽었던 시집이나 소설책, 혹은 이론 서적이었습니다. 골라보니 삼십 권 남짓이어서, 이건 차차 가져가자고 생각하고 도로 박스에 집어넣었습니다. 추억이 담긴 책은 영화 공부를 하면서, 혹은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읽었던 책들입니다. 그 중에서 정말 닳도록 읽었던 책들은 버리기가 아까워서 도로 박스에 넣었습니다. 세어보니 이건 스무 권 남짓 됐습니다.


이제 한 번 읽고는 방치했던 책들을 골라냈습니다. 정치 서적이나 종교학과 관련된 이론 서적들이 많습니다. 꽤 비싸게 주고 샀던 것들이라 아까워서 버리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일단 두고 나중에 팔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박스에 넣었습니다. 이것도 스무 권 남짓이라서 팔아봤자 막걸리 값이나 나올 것 같았습니다. 이후에는 정말 이제 아무도 읽지 않을 책들을 골라냈습니다. 철 지난 영화 잡지, 문학 계간지 등입니다. 이건 정말 버리자 싶어서 바로 테이프로 묶어 폐지로 버렸습니다.


결국 정리하기로 했지만, 다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책들을 정리하면서 추억에 잠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책들을 읽었을 당시 적어두었던 메모들도 살폈고, 책을 읽었던 이유들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은 대개의 이유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 때문이 컸습니다. ‘이걸 읽으면 새로운 걸 알게 되겠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한 번 읽었지만, 그 문장들이 모두 내게 저장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언제든 궁금하면 다시 펼쳐봐야 할 것을 알아서, 굳이 미련하게 다 읽은 책들을 붙잡아뒀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남겼던 메모를 읽으면서는 부끄러움도 느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책 한 권을 읽고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생각했더라고요. 하지만 메모들의 시점이 점점 지날수록 적힌 글들에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차츰 깨달아가는 모습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국 읽으면 읽을수록, 알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더 미련해집니다. 불안정하고 부족한 나의 지식 대신에, 책이라는 물질적인 표상이 책장에 꽂혀 있다면 나의 지식도 현물처럼 안정감 있게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미련입니다.


본가에서 서울 집으로 돌아와 저의 책장을 바라봤습니다. 정말 중구난방으로 책들이 꽂힌 책장에는 그 미련들이 가득 묻어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해놓고도 미련을 놓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책들을 사서 꽂을 공간이 점점 부족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는 조금 비워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느낍니다. 미련만 가지고 있다 보면 결국 새로운 책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저의 지식이 부족함을 알기에 욕심이 생깁니다. 이렇게라도 ‘내가 이걸 읽었다’라는 걸 제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 가지고 있고 싶은 건 일단 꽂아두려고 합니다.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선뜻 내줄 수 있지만, 아직도 저는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붙잡아두고 있는 책들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더 모르게 될 것 같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완전히 비우는 것도 결국 채워져야지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책장에 꽂힌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앞에 조금은 어울리는 깨달음인 것 같네요. 책장이 완전히 꽉 차면 이번에는 정말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다시 책장을 채워가는 재미도 알고 싶네요. 그리고 정말 소중한 책들을 골라낼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요. 그날을 위해서 또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지금은 책장을 채운 책보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이 너무 설렙니다. 더 모르는 게 많아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알아가겠습니다. 책이든, 사람 사이든, 그게 무엇이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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