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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버텨야 산다 : 좌절

by 안태현

EP. 3-2 서울, 버텨야 산다 : 좌절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 이외수는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존나게 버텨라”라는 말을 남겼다.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버틴다는 것도 두 가지의 방향성이 있다. 신화 속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처럼 그저 현실의 짐을 내내 버티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굴러오는 돌을 계속해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버티는 방법이 있다. 이외수 작가의 말은 두 방향성 모두에서 버텨야 하는 것일지, 아니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버티라고 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라고 뇌까리면서 잠에서 깼다. 신촌 반지하의 계약 만료가 두 달 남은 시점이었다. 낮인지 밤인지 모를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버티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반지하는 가장 맨 아래에서 건물을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장 최하층에서 나는 아득바득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반지하나 나나 가장 밑에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진리 같았다. 어느 날 통장 잔액을 봤다. 2년을 일했지만 내 통장에 있는 잔액은 300만원 남짓이었다. 허투루 쓴 것도 아니었다. 한 달 용돈이라고 해봤자 50만원이었고,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저축을 할 수 있는 돈은 고작 30만원뿐이었다. 50만원에서 생필품, 먹거리를 모두 해결했다. 인스턴트 음식에 찌들어갔고, 어쩌다 술자리가 잡힐 때에는 모아둔 돈에서 5만원을 야금야금 빼서 썼다. 그래서 남은 돈이 300만원이었다. 보증금 300만원이 있었으니 28살의 나는 겨우 600만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즉각 깨달았다. ‘아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패망이다’라는 걸.


반지하에서 눈을 떴을 때만큼이나 현실에 눈을 떴을 때도 어두컴컴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제자리였다. 시지프스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나 했지 아틀라스처럼 제자리에 앉아서 변하는 것 없이 버티고 있는 건 형벌이나 마찬가지였다. 늘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나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지, 이 영화가 <쇼생크탈출>일지는 몰랐던 거다. 그래서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내가 서울에 올라와서 2년 동안 한 건 버틴 게 아니라 시간을 버린 거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후에 난 바삐 생활하던 환경을 조금씩 정리해 갔다. 그리고 나만의 성으로 기어들어갔다. 몇몇 주변 친구들에게는 “그냥 고향 내려가서 다른 걸 준비해야 할까 봐.”라는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성의 벽을 걸어 잠글 준비를 했다.


신촌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수많은 기회는 수많은 위기


서울에 살면서 느낀 건 ‘서울은 기회의 도시’라는 거였다. 그만큼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지방보다는 훨씬 많았고, 그 기회라는 것이 어디에서든 솟아났다. 하지만 기회가 많을수록 유혹도 많은 법이었고, 좌절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대학생 시절부터 나는 꽤나 바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1학년 때는 등록금 시위를 하다가 갑자기 2학년에 들어설 무렵 총학생회 선거를 돕고 있었고,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을 때는 학과 학생회 일을 했다. 그동안에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했고, 단편영화를 찍었으며, 몇몇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을 하기도 했다. 부끄러워 말은 못 했지만 단역으로 영화 촬영에 끼여서 현장 구걸을 하면서 어떻게든 영화라는 꿈에 가까이 살고자 했다. 그 경험을 살려서 학교에서 진행하는 사업으로 영상업체 스타트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 좌절이었다. 영화와 영상을 다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이제 그 좌절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던 차였다.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으니 이곳에서만큼은 뭐라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2년 동안 남긴 것이 뭐냐고?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일을 마치면 팟캐스트 녹음을 했고, 친구와 단편영화 연구를 하고 편집을 했다. 영화를 피해 도망 왔는데, 영화 기자로 알음알음 영화 글까지 썼다. 그런데 남은 게 통장 잔고 300만원이라니. 이것보다 더한 절망은 없었다. 반지하라는 나만의 성 안에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냥 내려가면 모든 게 편해지지 않을까라고. 어차피 계속 절망만 안고 사는 것이라면 혼자 버티는 건 포기하고 가족들 곁에서 버텨보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 좌절감과 우울감을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하지만 술은 좌절과 우울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용도가 아니다. 오히려 더 심각하게 그것들을 내게 몰고 온다. 그래서 그 시절 나는 많이 사무쳤다. 어디에 가도 혼자인 것만 같았다. 실제로 혼자였지만, 그걸 느끼는 게 싫었다. 그러면 뭘 해야 할까? 술을 마시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어떻게든 무리 속에 있을 때면 혼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다시 어두컴컴한 반지하로 들어올 때는 여전히 혼자였다.

신촌 집 근처에는 이런 풍경이 있었다


혼자라는 성을 짓다


나는 그 ‘혼자’라는 성을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외로움으로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누군가 그 공간을 침범하려 들면 더 앙칼지게 반응했다. 나는 고독해야 했고, 그 고독은 외로운 나를 위한 최고의 변명거리였다. 당시 만나던 여러 이성친구들과 주변 친구들에게 그래서 더 혹독했다. 조금이라도 내 심리적 장벽을 넘으려 들면 바로 더 높게 벽을 쌓았다. 이 시절의 인연들이 완전히 나를 지킬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나라도 나를 지켜야 했다. 나는 고독이라는 성의 가장 완벽한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반지하 계약 만료를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고향으로 내려갈 것인가, 서울에 더 머무를 것인가라는 일생일대의 기로에 나는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00만원을 들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300만원까지라도 모은 게 어디인가 싶었다. 원래 이야기에는 탄탄한 서사가 쌓이면서 변화되지만, 삶에는 딱히 서사가 필요 없다. 그저 한 순간의 선택으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고독이라는 성의 완벽한 주인이 되고 있었던 내가 갑자기 성을 뛰쳐나오고 싶은 욕구를 느낀 것도 찰나의 감정이었으니깐 말이다.


그 찰나의 감정 속에서 나는 단순히 삶을 아틀라스처럼 버티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내 나름의 방식으로 돌을 굴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주변에서 끊임없이 지지를 해주던 친구들이 그 찰나의 불꽃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계속해서 “생각보다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라는 막연한 응원들이 내 장벽들을 넘어왔다. 나 역시 조금 성 밖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에 공성전을 펼치는 주변의 지지 덕분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아니 들고 싶었던 백기를 드디어 들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1년만 더 버텨볼까"


맞다. 이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왕 망한 인생, 1년 정도 더 조져놓는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다. 일단 내 주변을 둘러보면서 정리할 것들을 정리해 나갔다. 집안 가득 쌓인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고 나는 이사를 준비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도 있지 않나. 나는 이사를 결심했다. 이 외로움과 고독함의 성에서 벗어가고픈 마음도 컸다. 어둠 속에서 살았던 삶을 청산하고 딱 1년만 햇빛을 받고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고 싶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마지막 1년이 최고의 발악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부동산 중개업자들과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성을 뛰쳐나온 성주(城主)의 여정이 강북으로 향하는 시점이었다.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개인 사정으로 연재가 늦어졌습니다. 앞으로 다시 매주 수요일, 일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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