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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 유목민의 여정

가자, 지상으로

by 안태현

EP.4-1 월세 유목민의 여정


서울에서는 영끌을 해 자가로 집을 구하지 않는 이상, 전월세 유목민 신세를 피할 수 없다. 물론 서울을 제외한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서울의 집값은 유독 극악과도 같아서 더욱 그렇다. 전세로 살게 되면 그나마 월세로 나가는 피 같은 돈을 아낄 수 있기도 하지만, 내가 깡통 전세로 대표되는 전세 사기의 피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돈이 피 같다면, 최대한 혈액부족으로 내 서울 살이가 마무리되는 건 피해야 했다. 그래서 전세를 알아보던 나는 그냥 월세 살이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룸의 경우 전세 사기를 당하기 딱 좋은 계약 구조들이 많아서 안전함을 택하기로 한 거다. 게다가 어차피 서울에서는 딱 1년만 더 버텨보자고 생각했던 거여서, 굳이 전세 대출까지 받아서 이리저리 골치 아플 필요는 없었다.


보증금은 기존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고, 월세는 50만원까지를 마지노선으로 정해뒀다. 방 평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최대한 컨디션이 좋은 방이면 됐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로 가는가’였다. 과거부터 유목민들은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기 좋은 환경을 향해서 늘 거처를 옮겨 다녔다. 월세 유목민인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월세를 적게 내면서도 생활환경이 적당하면서, 도보 10분 거리 내에 지하철 정거장이 위치하면 됐다. 또한 도보 10분 거리 내에 적당히 상가들이 구축돼 있다면 문화생활도 충분히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네이버 지도를 켜고, 총 세 군데의 후보지를 선택했다. 한 곳은 신림, 또 한 곳은 미아삼거리, 또 한 곳은 수유였다.


모든 계획을 세웠으니, 이제는 실행에 옮겨야 할 때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2019년 7월의 시점, 나는 땀을 흘려가며 다시 한번 부동산 중개업자들과의 무수한 발품 팔이와 네고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내게 남은 유일한 수유의 풍경


“어디든 좋습니다, 반지하만 아니라면.”


부동산 중개업자들에게 가면 늘 듣는 말이 “어떤 방을 구하세요?”였다. 사실 이 질문은 거의 용산전자상가에서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와 같은 맥락이다. 방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싸면서 넓고 깨끗한 방을 원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보다 우선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지상’이었다. 내 몸에서 나는 반지하 냄새를 탈피하고 싶었기에 나는 만나는 모든 중개업자들에게 “반지하만 아니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소설 <오발탄>의 철호처럼 “지상, 지상으로 갑시다”라는 말만 읊어댔다. 중개업자는 그런 나를 보고 <오발탄>의 택시기사처럼 “어쩌다가 재수 없게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려버렸다”라고 혀를 끌끌 찼을까? 그건 나도 모르는 영역이다.


처음 방을 구하기 위해 찾은 신림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특히 첫 번째 중개업자는 지상을 찾는 내게 계속해서 지상 같은 반지하방을 추천했다. 세상에 ‘지상 같은 반지하방’이라니. ‘2인분 같은 1인분’ 달라는 진상 손님과 같은 말을 하는 그 중개업자를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지상 같은 반지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원래 지하방을 지상처럼 만들어놓은 게 반지하 아닌가. 그래서 적절히 첫 번째 중개업자와의 오붓한 데이트는 첫 만남의 설렘으로만 남겨두고 이별을 고해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중개업자와 함께 찾은 신림 역시 그다지 마음에 드는 방을 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신림은 이 시기의 나와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강북을 향해 진로를 돌렸다.


플랜 B였던 미아사거리를 찾자마자 나는 한 부동산 중개업자와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비유다. 이 중개업자는 40대의 아저씨였는데, 어딘가 모를 푸근한 인상과 말을 할 때마다 풍겨대는 니코틴과 카페인 5대 5 배합의 냄새가 인상적이었다. 이 분과 나는 처음에 미아사거리 인근의 집 두 군데를 돌아보다 다시 부동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매물이 적다는 게 이유였다. 그분은 부동산 앞에 차를 세운 뒤 다시 한번 니코틴을 충전하고 내게 이렇게 얘기했다. “사실 미아사거리보다는 수유가 더 나을 수 있어요, 아까 두 방도 별로였는데 수유로 가보실래요?”라고. 그 플러팅에 나는 바로 넘어갔다. 날씨가 너무 더웠기에 발품 팔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플랜 C까지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다니 아저씨의 플러팅에 나도 한 번 마음을 열어보고자 한 것도 있었다. 그해,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다.


수유 자취방 이사 첫날의 풍경, 극심한 미니멀리스트였다


내 한 몸 누울 공간만 있다면


반지하에서의 생활 후 느낀 것이 있다면, 방의 사이즈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였다. 사람에게는 제각각 최소 생활여건이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사는 집의 사이즈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사는 집의 위치가 될 수도 있다. 그 순간 나에게는 방의 크기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나 혼자 사는 집이었기에, 내가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즈라면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침대 하나, 책상과 책장, 그리고 빨래건조대를 놓았을 때 움직임에 무리가 없을 정도만 필요했다. 혼자 사는 사람의 집이 크면 청소하기가 굉장히 번거로우며, 그렇다고 너무 좁으면 움직일 때 힘이 든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는 사람이 청소를 할 수 있는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시간이 다소 빠듯한 인간에게는 간단한 청소 시간은 최대한 10분 내여야만 했다. 그래야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중개업자 아저씨와 방을 보러 다닐 때도 그런 점에 중점을 뒀다. 매물로 나온 방에 들어가자마자 머릿속으로 미리 가구들을 다 배치했고 이동 동선, 청소 시간까지를 다 구상했다. 또 여기서 가장 중요했던 건 무조건 책상과 옷장이 옵션으로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당시 나의 계획은 ‘서울에서 1년 버티기’였기 때문에, 굳이 새 책상을 사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또 옷장이 없으면 굳이 옷을 걸어놓을 행거를 샀어야 한다. 하지만 행거로 옷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으면 햇빛에 옷이 상할 수도 있고 미관상에도 깔끔하지 않기 때문에 옷장이 필수 옵션으로 필요했다. 그렇게 꼼꼼하게 집을 보고 돌아다니다가 여섯 번째 집 만에 서울에서 내 두 번째 자취방이 될 곳을 만날 수 있었다.


위치는 수유역에서 도보 12분 거리의 주택가에 위치한 원룸. 층수는 1층이었고, 2018년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신축이었다. 방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약 4평 남짓이었지만 햇빛은 아주 잘 들어와 만족이었다. 게다가 책상과 옷장이 옵션으로 들어가 있었으며 나는 내가 몸을 눕힐 수 있는 침대만 구입하면 됐다. 그렇게 나는 아주 재빠르게 중개사 아저씨와 계약서를 작성했다. 모든 게 정말 좋았다. 이제 반지하에서 탈출해 1층으로 왔으니 다음 집은 2층으로 가고, 그렇게 계속 이사를 해서 언젠가 80층 펜트하우스에 살게 될 것이라는 무궁무진한 꿈까지 꿨다.


하지만 꿈은 언제나 깨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꿈을 깨운 게 알람 소리가 아니라 윗집의 소음이라는 거였지만. 그래서 이제 이 이야기는 습기, 벌레, 어둠과의 싸움을 벌이다 수유로 도망 온 나에게 윗집과 옆집이라는 새로운 빌런이 등장한 대서사시로 흘러가게 될 예정이다. 왜냐? ‘혼자 산다’고 정말 나 혼자 사는 게 아닌 ‘이웃과 함께 산다’라는 소중한 교훈을 깨우치게 해 준 장엄한 ‘층간 소음’의 이야기가 곧 펼쳐지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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