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해방이 됐으니 일본으로 징용 간 큰 오빠가 오겠구나 했지"
출생(1935년)
나는 전북 남원 노암리에서 났어. 어머니가 마흔 여덟, 아버지는 예순에 나를 낳으셨어. 두 분이 같은 띠였어. 위로는 형제자매가 5남 3녀, 다해서 8남매. 아버지가 정력이 좋으셨나봐. 어머니가 나를 낳아 놓고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셨겠어. 그러니까 뭣 하러 막내를 낳아.
아버지는 한자를 잘 알고 사람도 잘 고쳤었어. 글은 서당에서 배우셨겠지. 내 이름도 아버지가 지었지. 이름에 사내 남(男)자를 넣었는데, 딸 이름 그런 것 상관없이 그냥 지었나봐. 마흔여덟에 난 애기라 예뻐하셨어. 우리 엄마가 나를 늦게 낳아서 젖이 안 나오니까 둘째언니가 생쌀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서 끓인 암죽을 먹고 컸대. 막내라 젖을 잘 못 먹고 컸다고 불쌍하게 생각을 하셨지. 우리 올케가 준 젖도 먹고 컸대..시어머니하고 며느리하고 같이 애기를 낳던 시절이니까.
전주에서의 어린 시절(1941년~)
우리 대가족이었어. 큰 오빠는 같이 살고 둘째 오빠는 공장에서 일하고 셋째는 일본서 살았어. 넷째는 그때 아직 장가 안 가고 고등학생 이었고 다섯째오빠는 중학교 다녔지. 남원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삼베를 마포장날마다 떼다가 파는 사업을 해서 돈을 잘 벌었지. 정미소도 했는데 정미소가 너무 잘됐지. 동네에서 친절하게 잘한다고 평판이 좋은 집이었어. 정미소를 하니 머슴도 많고 쌀이 풍족했지. 우리 언니들, 이모할머니들까지 방 하나씩 다 주고 살았어. 나중에는 큰 집을 짓고 온 형제들을 다 불러 모아서 같이 살았는데 싸움 한 번도 않고 동서들끼리도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몰라.
기억하는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은 엄마가 밭에 가시면 늦게 오시는 거, 그래서 아주 그리워 하는 거. 왜냐하면 엄마가 거기, 용머리고개라 하나? 고개 너머에 밭이 있었는데 가서 영 안오시는거야. 거기서 밭 메고 풀 뽑고 농사짓고 늦게 오셔. 언제 오시나 기다리는 거야. 마루에서.
남원에 살다가 7살 때 전주로 이사왔어. 다음 해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갔지. 그때 큰 언니는 일본게다를 제작해서 판매했어. 둘째언니는 사업가한테 시집가서 강경에서 잘 살았지. 셋째 오빠가 일본서 돈을 보내주어 있는 돈하고 합쳐서 집을 크게 지었지. 해방 전이야. 모찌떡을 해가지고 주변에 나누어 먹고. 2-3학년 되니까 학교에서 산에 가 소나무 관솔을 캐 오래. 뭣에 쓰냐 했더니 일정 때니까 일본 놈들이 관솔에서 기름을 빼가지고 쓰려고 한거지. 사철나무 알맹이가 있으면 씨가 대여섯개씩 붙어있거든. 그것도 따오라는 거야. 그걸 찾아서 막 다니는 거야. 어느 집에 그 나무가 있으면 몰래 들어가서 따오기도 하고.
해방(1945년)
국민학교 3학년 2학기에 해방이 됐어. 우리 집은 정보가 빨라. 삼촌이 소방대원으로 있었고 식구가 많다보니까 그런 뉴스를 빨리 접했어. 전주시민이 전부 길로 나왔었지. 이제 해방이 됐으니 일본으로 징용 간 큰 오빠가 오겠구나 했지.
우리 큰 오빠는 운전도 할 줄 알고 장사도 할 줄 알고 술도 잘먹고 춤도 노래도 잘하는 사람이었어. 한 집에서 하나씩 징용가야된다고 하니, '남동생대신 장남인 내가 나가마' 하고 징용 가셨었거든. 셋째오빠는 열일곱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을 하셨었지.
이제 해방이 됐다하니 큰 오빠가 시모노세끼에서 한국으로 가는 귀국선을 타셨는데 배가 출발한지 얼마 안 되서 배에서 폭탄이 터진거야. 일본놈들이 배밑에 폭탄장치를 해놨었나봐. 셋째 오빠가 먼저 귀국선타는 형님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물이 솟구치고 하더니 사람들이 바다에 튀어나왔대. 셋째오빠가 바다로 뛰어들어서는 형님을 찾다가 없으니까 부서진 배 조각에서 밧줄을 끊어서 건져냈더라고. 그걸 상자에 넣어서 고향으로 부쳤지. 그걸 유해처럼 생각을 하고 그 끈을 관에 넣어서 장례를 모셨다니까. 큰 올케는 임신중이었는데 그애가 유복자가 됐지. 우리 큰 며느리가 과부가 됐다고 다 같이 울고.
나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잘했어. 해방이 됐는데 일본 선생이 나보고 자기랑 같이 일본 가자고. 내가 후미꼬였거든. ‘후미꼬상 이쇼니 이끼마시요’ 그런데 엄마 떨어지는 게 싫어서 안 갔어. 그 선생들 다 돌아가셨을 꺼야.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
어머니의 환갑(1948년)
어머니 환갑잔치가 기억이 나. 어머니랑 시장에 나가면 부자 아주머니라고 상인들이 서로 개시 좀 해달라고 했었지. 그만한 분이 환갑이 되니, 일주일동안 준비를 하고 잔치를 했어. 돼지 백근짜리를 잡고 동네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신발을 번호를 매겼어. 번호표를 2개씩 만들어서 하나는 신 임자가 갖고 하나는 신에 꽂아 놓고. “나 7번이요” 하면 신을 내주고. 한사람도 신을 안 잃어버리고 잔치를 마쳤지. 그 생각을 우리 셋째오빠가 했어. (할머닌 그때 뭐했어요) 뭣을 해. 12살 애인데 잔치니까 먹기나 했겠지. 그때 집 마당에서 식구들 다 같이 찍은 어머니 환갑사진에 우리 외할머니도 계시지. 그때 그 어른이 아흔이였나. 상할머니. 옛날에 과수원을 운영을 했던 사람이야. 그 집에 가면 창고에 과일이 가득 쌓였어. 함부로 우리도 안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