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딸이 어떻게 이런 집에 시집을 왔나, 동네에서 수군대는거야"
결혼(1958년)
둘째언니의 남편이랑 친하게 지내는 포수가 있었어. 꿩 같은 것 잡는 포수. 가끔 사냥하러 가자고 둘째언니의 남편을 꼬셔서 진안이나 무주로 꿩 사냥도 하고 그러거든. 그런데 전주에 한번 놀러가자고 해서 우리 집에 온 거야. 손님들 오시면 차대접도 하고, 저녁에 머리맡에 물 떠다놓고 이부자리 펴주고 그런 걸 막내아가씨니까 내가 했었거든. 올케들은 애기들 때문에 바쁘니까.
그때 눈이 많이 왔어 그 아저씨가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내가 눈 위를 뚜벅뚜벅 걸어서 들어오거든. 그러니 저 처자는 어딜 갔다 오냐고. 처제가 성당에 열심히 나간다고. 새벽에 벌써 미사에 다녀온다고. 이 양반도 천주교 신자야. 아 처제 시집 안 보내냐고. 시집 보내긴 보내야죠. 아 그러면 이리 석동에 참 열심한 총각 있는데 제대하고 지금 강원도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있으니 상견례를 한번 해볼라냐 제안을 한거야.
강경으로 나를 오래. 그때 시누이도 강경에 살 때니까 그 사람도 누님 집 방문 겸 그쪽으로 온다는 거야.
중국집에서 만나기로 했어. 거기서 첫 선을 봤지. 맘에 드나마나 껌껌한 데서 보니 번듯하게 생기고 그냥 깔끔하게 생겼더라고. 잘 생겼다기보다도 천주교 신자 아니면 시집 안 간다고 하니까. 천주교 열심히 다니고 회장이란다 하니 성당에 열심히 나간다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지. 우리 집에서도 사람도 깔끔하게 생기고 미움상도 아니잖아 이쁘게 생겼잖아. 결혼하라고 해서는 한 달 만에 결혼날짜를 잡게 됐어. 혼배날을 받아가지고. (아니 어떻게 천주교신자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결혼을 해요?) 내 주위에는 신자가 없었지. 엉뚱한 수리조합장 이런 사람들이 선을 보러 오더라고. 그런데 다 싫다고 안 하고 안 하고. 교우가 아니면 안한다고. 성당도 못 나가게 남자들이 패고 그러면 얼마나 무섭냐. 그런 것이 무서운 거야 나는. 성당에 열심히 나가는 것만 나는 좋으니까.
1958년 0월 00일날 결혼식을 했어. 이 놈의 신랑이 왜 이렇게 술을 잘 먹어. 셋째오빠가 이렇게 술 잘 먹는 놈이면 우리 막냇동생 고생시킬 상이라고, 발을 매달고 발바닥을 때리고. 결혼식마치고 이제 짐을 싸가지고 시댁으로 갔어. (친정에서 혼수 많이 해서 갔겠네) 강경언니가 부자니까. 이 천도 끊어놓고 저 천도 끊어놓고. 이것 저것 해서 보내줬지.
시댁 가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 줄 알아? 소달구지에 싣고 읍내까지 왔어. 그 집에서 소달구지를 불렀더라고. 비가 와서 땅이 질어서 덜컹거리다가 짐들이 논으로 화딱 다 쓰러졌네. 새댁 짐이 다 논바닥에 박혔으니 어쩜 좋냐고 막내 시누이 친구들이 다 달려와서 그것을 다 건졌어. 다리미질 바느질 새로 한 옷들을 입지도 못하고 다 흙물이 드니 어떻게 해. 시어머니, 동서, 고모들, 동서의 아들. 다섯 식구가 살고 있더만. 윗방을 우리 줬어. 천장도 낮아서 농도 겨우 들어가는 거야. 우리 오빠가 내가 어떤 집을 시집가는지 본다고 쫓아왔었거든. 이렇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왔다고. 그래서 새 농을 확 주먹으로 치고 그랬어. 큰 오빠의 큰 아들이 '고모야~~'하고서는 '이렇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서 어떻게 살라냐' 하고서 소리를 지르고 막 그랬었어. 버선 한죽을 꺼냈는데 시댁식구들이 동네 사람들한테 나눠주더라고. 부잣집 딸이 어떻게 이런 집에 시집을 왔나 동네에서 수군댔대.
(딸을 시집을 보내는데 그 집을 가보지도 않고 시집을 보내면 어떻게 해, 괜찮은 집인지 좀 보질 않고서)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 상대방이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면 된다. 돈이 왜 필요한가도 모르고 아주 철딱서니가 없었지. 나중에 쌀 두 가마니만 친정에서 얻어올걸 했지.
내 짐이 소달구지에 싣고 온 짐이 쳐박혔을 때 사람들이 수군거렸대. 저 새댁 해로 절대 못할거라고. 그래도 내가 참고 살았지. 남편은 돈 버는 것은 아예...그래서 내가 새끼들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겠다, 해서 어떻게든 했지. 그래도 끝까지 내가 남편 임종지키고, 남편 죽는 모습까지 저기하고 유골까지도 내가 완전 정리했잖아. 내 할 일 다 한거지.
첫 출산(1959년)
1958년 1월에 결혼을 했는데 첫 딸을 1959년 2월 1일에 낳았으니까 주1)주2) 결혼하고 몇 달있다가 바로 임신이 된거지. 밥을 못 먹으니까. 벌써 애 가졌나보다고. 보리밥을 영 못 먹겠더라고. 보리밥을 먹는데 보리냄새가 싫고 밥 먹고 토하고, 멘스도 안하고 (의사가 ‘임신입니다’ 확인해주고 그런 건 없었던 거죠?) 그런 것은 요새나 있는 거지. 임신해도 지금같이 검진 받는 것은 없고 그냥 가지고 있는 거야. 애기를 갖고 3개월 됐을 때 강원도 양구로 이사 갔어.
양구로 가서 몇 달 살다가 첫 애를 낳았어. 의사가 집으로 와서 애기를 받아줬어. 밤9시에 저녁기도 하고 나니까 양수가 터지네. 양수가 터지면서 금방 배가 아프지 않다가 배가 아프기 시작을 해. 서울의원이라고 병원이 있었어. 거기 의사가 왕진 와서 애를 받아줬지. 산바라지를 그 최요한씨라고 그분 어머니가 미역국 끓여주고 그랬어. 산바라지를 그렇게 잘 하시더라고. 친하게 형제간처럼 지내니까 능히 형제간처럼 해주었어. 애기가 뒤집는 것도 백일날 딱 뒤집고 그러데. 양구 읍내 가서 애기 백일사진도 찍어주고.
주1) G가 첫 번째와 둘째아이를 출산했던 1959년과 1961년의 영아사망률에 대한 수치는 없다. 정부수립 후 영아사망률에 대한 최초의 전국단위 조사는 1962년 서울대 보건대학원과 서울대 예방의학교실이 시행한 조사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강원지역의 영아사망률은 천 명당 61.5로 6.1%를 넘는 수치였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G의 아이들은 모두 생존했다. 1950년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베이비붐 현상이 일었던 때로 인구증가율도 연 3%를 기록하던 시기이다. 1959년부터 10년간 연간 100만명대 출산이 이루어졌고 이 추세는 1971년에 끝나게 된다. G가 첫 출산(1959년)부터 마지막 출산(1971년)을 한 시기가 이 시기이다.
주2) 관련기사 : 밝혀진 영아사망률 (1962.11.14. 동아일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영아사망률에 대한 믿을 만한 전국적 통계자료가 없었는데 이번에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과 동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연구생 등 91명이 동원되어 약 3년간에 걸쳐 연구조사 결과 처음으로 이와 같은 귀중한 통계자료를 얻게 되었다 한다. (중략) 서울을 제외한 9개도에서는 제주도가 93.0으로 제일 높았고, 경기도가 71.5로 제일 낮았는데 전국 농촌의 평균 사망률은 82.9였다. 도별로는 강원 81.5, 충북 78.4, 충남 75.9, 경북 87.2, 제주 93.3 등 (중략)
1957년에 조사한 세계 각국의 영아사망률(출생 천 명당)은 다음과 같다. 미국 26.4, 영국 23.9, 카나다 30.9, 자유중국 35.7, 일본 40.0, 멕시코 80.1, 칠리 20.4, 인도 114.0 (중략) 가장의 교육정도가 영아사망률에 현저한 영향을 주지 못하는 반면 어머니의 교육정도는 현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머니의 교육정도가 높으면 사망률은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다. 산모연령과 사망률도 관련이 있다. 25-29세 사이가 제일 낮은 사망률을 보이고 있으며, 19세 미만과 45세 이상의 분만에 있어서는 높은 사망률을 보이고 있다. 사망 전 가료상황도 조사되었다. 전 사망아의 44.2%가 가료를 못받고 죽었다. 병원에서 치료받은 것은 불과 21.%뿐이었다. 병원치료를 더 많이 받는다면 앞으로 영아사망률은 차차 더 낮아질 수 있는 것이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