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기억되고 싶지 않은 날이 트라우마로 남아 나를 변화하게 만들었고 세상의 문을 닫으며 살아오게 했다
나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이렇다
같이 사는 엄마가 `새엄마'
4학년 초등학교 하교시간에 모르는 여자분이 아빠 친구라며 학교 앞 떡볶이를 사준다는 말에 아무 말 없이 따라가게 되었다
맛있게 먹고 있던 나에게 여자분은
"내가 너의 엄마야"라고 얘기했다
믿을 수 없는 말하기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여자분은 나와 함께 서울을 가고 싶어 했고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 쓸쓸해 보였고 외로워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내 순간적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껐고 그의 모습을 보고 다짐하는 마음으로 부리나케 따라나섰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물어보지도 않은 채 바로 가버린 엄마가 나를 버린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생을 원망하고 그리워해야만 하는 존재가 생겼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매번 하교시간에 기다리며 엄마가'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고 떡볶이를 사줬던 곳을 가서 그날을 회상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
갑작스럽게 나는 서울로 전학 가게 되었고 엄마의 생각을 서서히 잊혀가는 그때 어른들의 얘기를 유심히 들어 보니 엄마는 나를 버린 게 아니라 쫓겨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같이 살고 있던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 새엄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때 엄마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나에게을 흘렀다
사실을 알게 되니 새엄마가 나에게 못되게 대했던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새엄마라는 사람은 나를 때리기도 하고 온갖 구박과 차별을 했었다.
속절없이 맞으면서도 아무도 막아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너무 미웠다
집을 나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나가 지도 못하 공
조금만 늦게 들어가면 혼내시는 새엄마가 너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이 생겼고 그래서 난 중학교 때 아르바이트를 휴식처로 선택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월급은 얼 마되 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현실은 난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소흘 해지는 학교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는 저렇게 잘 태어나서 공주 대접받고 사는데 난 이리 지지리 궁상맞게 태어나서 공주대접받고 사는데 난이리 궁상맞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내가 하고싶은것다해보지도 못하고 학원 하나도 가고 싶은 것도 가지 못하는 나 자신이초라 하게 느껴졌었다.
나의 욕심은 대학교까지 가는 목표 정하여 우등생은 아니더라도 성실한 학생으로 남아 초선을 다해 배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목돈을 모을 수 없는 월급으로도 턱도 없는 대학등록금 등록금을 해줄 수 없다는 단호함에 결국 포기를 해야만 했다
노력을 못한 나의 잘못인가를 계속 탓하며 며칠을 지새웠다
며칠을 지새우면서 나는 나에게 물었다
계속 나를 채찍질을 하게도 면 나는 언제 아물 것인가?
처음에는 답이 나올 수도 있다는 희망에 나에게 물음표악마처럼 나에게 물었었다 하지만 내 방법이 옳지 않았다는 답을 내렸고 나는 나를 위로하기로 했다.
'그래 난 언제 가는 성공하는 사람이 될 거야 '
위로 아닌 위로를 하기도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토닥여 주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이제는 돈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은 3시간만이라도 충분했고 한 가지 일은 만족하지 않아'여러 가지 일들을 찾으며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했었다
분명 이렇게 돈도 벌고 하면 잘 사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내 삶에 번아웃 생겨버렸다
나는 돈이라는 것을 삶의 목표로 설정했었고 그것을 잡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삶의 이유를 잃게 도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몸도 마음도 이미 많이 지쳤기에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다
모든 게 부모를 잘못 만나 내 삶이 변한 걸까 싶은 원망과 절망이 왔었다
나를 벗어나 내 주변사람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각자의 삶이 있기에 나의 삶까지 얘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연히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고 나를 위로해 주던 그 사람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사람을 믿지 않았던 나와 온마음을 다해 애정을 주고 사랑을 할 연인사이가 되었고 이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을 바랄 수 있다고 믿었다
첫아이를 가지면서 나는 순간적인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행복은 소소한 것으로부터 찾아야 했었고 가정으로 인해 깊은 사랑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정을 공유를 하는 그 힘은 대단했었다
좋든 싫든 모든 2배가 되는 감정이 되어버렸다
좋은 감정으로만 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 그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좋아진 나의 행복한 하루들이 소중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결혼 후 IMP가 터지고 남편은 실직에 아이는 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난 드라마를 보면 " 아줌마 밥 주세요 "하고 부잣집에서 살면서 부모님들과 행복해 보는 걸 보며 나도 전원주택에 사는 사람한테 시집가서 일 안 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전원주택은커녕 내 집하나 없어사는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져 갔다
아이들을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당시에 가장 역할까지 해야 했으니 일에는 충실해야 된다고만 생각했었다
우리에게 아이를 돌봐주신다던 시어머니와 아픈 시동생까지 챙겨야 했었다
혼자 일하면서 가족들을 챙기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나는 과거로 지금이나 멀티 안 되는 하나의 욕심만가지게
돈 것이 문제였던 거 일지 모른다
하늘은 정말 날 도와주지 않는 비통함을 어디에 얘기를 할 수도 없었다
힘들 때마다 엄마가 보고 싶은 나 자신이 바보 같았지만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되었지만 나는 엄마가 필요했고 나도 누군가의
딸로 사랑받고 싶었다
엄마의 향도 모르고 뒤도라서는 모습만 기억에 남아있기에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엄마의 이름은 대단한 거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의 포근한 품에서 한 번이라도 안고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를 온전히 품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그만한 좌절감은 없었다
부모라고 믿었던 남편과는 다시 이어질 수 없는 싸움이 번져갔고 그대로 아이들을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불안과 공포연기에 도망쳐나갔지만 정신을 차러 보니 내 주변엔 친구가 있어 주었다
단칸방에 살면서 돈을 벌어서 좋은 곳으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상활비에 월세는 감당할 수가 없이 늘어만 갔었다
밤에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한참을 울었다가 잠이 들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또다시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돈은 항상 마이너스였었다
그러다가 미용실 같이 일하던 언니로부터 돈을 빌려 옷가게를 하였고 매일 동대문 시장을 휘젓고 다니며 사업을 하고 동대문에서도 친구들을 알바를 시키며 같이 일도 하고 유행도 따라갔다.
친구들하고도 일하면서 노는 것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장사를 하다 보니 삶의 노하우도 생기고 많은 것을 배웠다
통장에 돈은 0원이 찍힐 때도 수드륵 했지만 하루 먹고 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통장에 마이너스로부터 시작하였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적으로 하루를 살더라도 하루를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계속적인 노력으로 일을 했지만 빈 잔 고였던 것은 나의 씀씀이의 문제도 해결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