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 한 Jul 23. 2023

누군가의 진실이 다른 누군가에겐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북 에세이 4



1. 제인(Jane)의 이야기

또 유령이 나오는 붉은 방에 갇혔다. 너무 무섭고 외롭다. 나를 아끼던 외삼촌이 돌아가신 후 외숙모와 그녀 아들 존 리드(John Reed)의 학대와 폭력이 더 심해졌다. 어디나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이 아닌 자들은 존재한다. 아무리 그들이 나를 괴롭혀도 어린 나는 저항할 거다. 그것이 그들의 분노를 한 층 더하고 있는 듯 하지만 그들의 폭력 앞에 비굴하게 굴복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     

그들은 로우드(Lowood Institution)라는 고아 소녀들을 위한 자선학교로 나를 보냈다. 추위, 굶주림, 체벌이 일상인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났다. 처음엔 고생스러웠지만 이제 내 옆엔 외롭고 고통스러운 일상 속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착한 헬렌과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진정한 어른, 템플 선생님이 있다. 누군가의 관심과 보살핌이 인간에게 얼마나 따스한 감정을 전달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이해를 지닌 인간으로 성장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프다. 언제나 슬픔이 반복된다. 헬렌이 며칠 째 심하게 앓다가 죽었다. 그녀가 떠난 후 몸도 마음도 아팠다. 하지만 여전히 내 곁에 계시는 템플 선생님의 사려 깊은 사랑으로 헬렌을 잃은 극심한 상실감에서 벗어나 학업에 집중하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하자. 공부를 해서 나도 템플과 같은 선생님이 되자....  템플 선생님이 결혼하면서 학교를 떠나시기로 하셨다. 축하할 일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또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나 또한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할 순간이다.     

운 좋게 손필드( Thornfield Hall)의 가정교사로 채용되었다.  아델(Adèle Varens)은 맑고 명랑해 그녀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은 그리 수고롭지 않았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긴장은 되지만 평화롭고 평안을 느낀다. 딱 한 가지 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이의 후견인 에드워드 로체스터(Edward Fairfax Rochester)다. 그는 과묵한 데다 어딘지 모르게 어둡다. 그가 간직한 비밀스러움이 그의 고통인 듯 해 자꾸만 그에게 눈길이 간다.   

   

집에 유령이 있는 것 같다. 잠결에 괴성인지 여성의 비명인지 모를 괴이한 소리를 들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나의 끝 모를 연민과 호기심은 계속 로체스터를 향하고 있다. 그 또한 내 마음을 눈치챈 듯하다.  

   

깊은 밤, 복도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존재와 마주하는 순간 내 심장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졌다.... 드디어 나와 그는 신분과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을 약속했다.... 너무나 행복했다. 하지만 난 행복을 느낄 때면 불안해진다.  

    

나와 로체스터의 결혼식은 중단되었다.  이미 불길한 징조는 있었다. 결혼식 전날 밤 그 유령 같은 여자가 면사포를 찢는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리처드 매이슨(Richaerd Mason)이 결혼식 도중 뛰어 들어왔다. 그는 의붓 여동생이자 로체스터의 전처, 버사 매이슨(Bertha Mason)이 살아있음을 폭로했다. 여러 날 동안 정체불명의 괴성과 기이한 모습으로 온 집안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것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졌다. 과거 로체스트는 광기에 빠진 아내를 다락방에 가두어 두었다. 미친 여자의 존재가 로체스터와 나의 삶을 파괴했다. 그렇다. 삶은 언제나 내게 나긋나긋하지 않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삶이 내 삶이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난 손필드를 떠났다. 우연히 길에 쓰러진 나를 발견한 리버스 가족 (Rivers)은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나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자 존 리버스(St John Eyre Rivers)에게 청혼도 받았다. 무엇보다 그전엔  일면식도 없던 삼촌이라는 분이 죽은 후 남긴 상당량의 유산도 상속받았다. 이제 나는 불행했던 과거를 잊고 살 수 있다. 리버스의 아내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날 일만 남았다.      


어젯밤 나를 부르는 로체스터의 처절한 목소리를 들었다그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인해 지옥 속에 살고 있다나는 로체스터에게로 가야 한다....          



2. 앙트와네트(Antoinette) 이야기

로체스트(Rochester)는 더 이상 나를 앙트와네트라 부르지 않는다. 나의 엄마 아네트 코즈웨이 매이슨(Annette Cosway Mason)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버사 매이슨(Bertha Mason)!!! 그가 어떻게 엄마 이름을 알게 되었을까? 난 내 남편이 버사라고 부르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미쳐 버린 엄마가 떠오른다.


난 서인도 제도에 위치한 자메이카에 살았다우리 가족은 백인 크레올이었다. 노예상이자 대지주였던 내 친 아버지 코즈웨이는 영국인이었고 아름다웠던 내 어머니 아네트는 프랑스 인이었다.  모두 백인이지만 영국과 프랑스 본토의 백인들은 우리를 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흑인들도 백인 크레올을 경멸한다. 그들은 우리를 백색 바퀴벌레( white cockroach)라 부른다. 아버지가 죽은 후 엄마는 그가 물려준 재산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궁핍하고 외로운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본토 영국에서 온 부유한 백인 매이슨 씨(Mr. Mason)와 재혼을 선택했다. 의붓아버지 매이슨과 결혼 직후 엄마는 흑인들이 보이는 백인 크레올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들끓고 있다며 그에게 저택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자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흑인들을 말 잘 듣고 순종적인 아이처럼 여겼기에 매이슨 씨는 엄마의 말을 무시했다. 본토 영국 사람인 그는 자메이카와 이곳 흑인들을 잘 알지 못했고 어리석었다. 결국 엄마가 두려워하던 폭동은 일어났다. 그곳을 간신히 탈출했지만 우린 오빠 피에르(Pierre)를 잃었다.   

   

엄만 오빠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목소리를 무시한 메이슨의 어리석음을 원망했으며 서서히 미쳐갔다. 메이슨이 더 이상 엄마를 감당할 수 없어 외딴 오두막에 그녀와 그녀를 돌보는 흑인 몇 명을 고용했다. 코라 이모의 보살핌에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그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고통과 외로움으로 더욱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흑인 감독관은 그녀의 광기를 누그러뜨리고 그녀를 잠들게 하려고 그녀에게 끊임없이 술과 약물을 주었다.  난 문 밖으로 쫓겨났으며 그곳에서 덩치가 큰 남자 흑인 감독관이 정신을 잃은 엄마를 성적으로 능욕하고 희롱하는 것을 목격했다. 끔찍했다. 그것이 내가 본 나의 엄마이자, 미친 크레올 여인 아네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죽은 엄마는 나에게 그녀의 토지와 재산을 남겼다. 나의 보호자였던 의붓아버지 매이슨이 죽고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의 아들 리처드 메이슨이 나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 메이슨이 죽기 전 나의 짝으로 점찍은 로체스트와 나를 결혼시키려 한다. 그는 로체스터를 나의 혼처로 제안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의 칭찬을 하고 내 처지에 이만한 혼처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로체스터 또한 나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장자 상속이라는 강력한 영국의 관습 때문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지 못할 처지였다.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그의 지위를 확보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이 혼처를 주선할 때 그는 크레올 여성이 싫어도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했으며 그의 기대를 맞추고 싶었다. 사실 난 로체스트와 결혼하고 싶은 의사가 없었다.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나를 신속히 로체스터에게 넘겨주고 싶어 했다. 아버지 매이슨에 의해 억지로 주어진 나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임무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고 싶었던 듯하다. 결국엔 너무나 성급히 나를 위한 어떤 법적 장치도 마련하지 않고 나와 나의 재산을 로체스터에게 통째로 넘겨주었다. 영국의 법은 결혼과 동시에 여성의 재산은 남편에게 귀속된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나의 마음을 사려는 듯 나의 말이라면 순순히 들어주었다. 신혼 초 그는 얼마간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나의 몸을 원했다. 나 또한 그의 눈길과 손길에 서서히 길들여졌다. 난 그를 미칠 듯 사랑했다. 굳게 믿었다.... 그가 날 영원히 사랑해 줄 거라....     

어느 날 어디서 들었는지 그는 터무니없는 모함과 음해로 나를 비난했다. 내 어머니의 비극을 정신병적 광기로 몰아붙이고 그녀에 대해 거짓을 말했다며 나를 질책했다. 게다가 내가 광녀인 내 어머니의 피를 받았을 것이며 성적 정절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며 친절하고 자상한 의붓오빠 샌디와 나의 관계를 의심했다. 더 이상 그는 나의 방에 오지 않는다. 그의 사랑이 떠나고 있다. 절망적이다.    

 

그가 불같이 분노했다. 어제 흑인 하녀 크리스핀에게 가 그의 사랑을 되돌리기 위한 사랑의 묘약을 얻어왔다. 그의 술잔에 몰래 탄 것이 그의 분노에 방아쇠를 당겼다. 급기야 내 방 바로 옆에 위치한 그의 공간에서 어린 흑인 하녀와 보란 듯이 놀아난다. 옆 방에서 들리는 그들의 속삭임은 나를 미치게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야비한 행위 앞에 그럴 수 없이 당당하다. 이제 그와 나 사이엔 어떤 것으로도 건널 수 없는 광막한 바다가 놓였다. 더 이상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  난 끝없는 지옥 속에 가라앉는다.      

난 로체스터에게 귀속된 나의 재산 일부만이라도 달라고, 그에게서 떠나겠다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의 돈에 대한 집착은 너무나 완고하다. 당연히 그가 나와 결혼한 목적은 돈이었으니 한 푼도 내게 줄 리 없다. 게다가 그는 정돈되지 않는 무질서한 상황을 극도로 싫어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를 앙트와네트가 아니라 버사 매이슨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나를 엄마처럼 미친 여자로 보거나 아니면  나를 정말 미친 여자로 만들어야 했다. 의도적이다. 그래야 나를 다루기 수월 해지기에... 아름답지만 아프리카의 야생적 자연을 닮아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강렬한 천성을 지닌 나의 모습을 그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그 야만적 아름다움이 남자들을 끌어들인다고 비난한다. 나를 성적으로 헤픈, 미친 여자라 비난하면서도 떠나겠다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제 그는 내가 하는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나도 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여기에 남고 싶다는 애원에도 영국으로 가는 배에 나를 실었다. 손필드 저택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미쳤다며 맨 꼭대기 다락방에 나를 가두었다.....   

       

3. 누군가의 진실이 다른 누군가에겐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제인 에어 Jane Eyre는 1847년 유명한 브론테 자매 중 첫째인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 1855-1861)가 커러 벨(Currer Bell)이라는 필명으로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다. 19세기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성임을 숨기고 필명을 사용해 작품을 출시했지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제인 에어』는 한 고아 소녀가 용감한 여성으로 독립적인 삶을 이루기까지 경험하는 고난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다. 알다시피 당신 보수적 영국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 달리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했다. 행복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로 결정되었으며 여성은 가정과 남성에 헌신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이 그 당시 많은 호응을 얻었던 이유는 19세기 사회가 원하는 남성에게 순종적이며 참한 수동적인 여성이 아닌 저항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면서 분명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인에어라는 인물은 19세기 판 걸 크러쉬, 파이터라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혹자는 왕자를 만나 사랑을 이룬 신데렐라 이야기로, 혹자는 용감하고 독립적인 여성이 안타깝게도 다시 남성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 가정을 꾸리는 현실적 한계를 그린 잔혹 동화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린 시절 학대받던 고아 제인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현명하고 주체적 여성으로 잘 성장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제인은 다른 좋은 선택지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행하고 처절한 시기를 보내는 로체스터를 스스로 선택했다. 현재도 우린 자신의 사회적 지위 유지와 상승을 위해 배우자의 지위와 학벌을 따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19세기를 사는 제인의 선택들은 지금과 비교해도 용감한 결정이라 볼 수 있다. 결국 그녀는 버사 메이슨이 낸 화재로 잃었던 남편의 시력도 회복시키고 그와 사이에 아이까지 얻게 되며 그야말로 완벽한 해피엔딩을 그녀의 손으로 이룬다.


하지만  『제인에어』에서 제인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지워졌지만 버사 매이슨의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제인에어라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독자들의 눈에 버사 매이슨은 광녀, 악녀이다. 버사 메이슨은 역경을 이겨낸 고아 소녀 제인과 신사계급인 로체스터의 낭만적 사랑을 파괴한 미친 여자에 불과하다. 독자들 또한, 제인의 연애 감정에 동화되어 로체스터를 아픈 과거를 가진 츤데레적인 연인, 낭만적 연인으로 오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제인에겐 진짜고 일부 진실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그 이야기는 악랄하게 조작된 진실이 된다.

지워진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를 박탈당한 버사 매이슨에겐 할 말이 없었을까? 1966년에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스 바다 Wide Sargasso Sea』를 쓴 진 리스(Jean Rhys 1890 – 1979) 높게 평가받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쁘게 잘 꾸며진 백인 고아 소녀의 성장 소설 아래 짓눌린 또 다른 진실이 있지 않을까? 작가 진 리스는 자신이 크레올 여성이었기에 평소 경험했던 부당함과 부조리함을 바탕으로  『제인에어』 속 미친 크레올 여자의 이야기를  독창적인 그녀만의 방식으로 다시 쓰기 했다. 진 리스는 어떤 것이 불편한 이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 존재도 지워지고 목소리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앙트와네트 코즈웨이 메이슨(Annette Cosway Mason) 이 자신의 목소리로 담담히 자기의 이야기를 하도록 함으로써 『제인에어』속 목소리가 지워진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매이슨(Bertha Mason)의 목소리가 복원된다. 마침내 독자는 『광막한 사르가소스 바다 Wide Sargasso Sea』에서 앙트와네트의 이야기를 통해 제인에겐 진실이지만 버사에겐 진실이 아닐 수 있는 것들을 목격한다.     



 참고문헌

Wide Sargasso Sea,  Jean Rhys, Modern Classics, 2000.      

작가의 이전글 집 나간 ‘몰입’ 되찾기 : Flowing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