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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이야기(1)

섬에 대한 기억들

by 명재신

고향 쑥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대학 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고향 쑥섬에 대한 시와 산문들이 다수가 모여져서 지난 2021년도에 우선 제4 시집으로 '쑥섬이야기'를 출간하였습니다.


뒤를 이어서 시집에서 다하지 못하였던 이야기들과 그동안 써서 인터넷 카페나 SNS에 올려서 공유하였던 쑥섬에 대한 산문들을 모아서 ’ 쑥섬이야기-산문집‘을 계획하였으나 계속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파견근무 기회를 회사가 주어서 이를 뒤로 미뤄 왔습니다.


올해 5월에 그간의 소임을 마치고 복귀를 하면서 다시 출간 준비를 시작하였고 마침 브런치스토리에서 연재 기회를 주어서 먼저 여기에서 고향 쑥섬의 이야기들을 해 보고자 합니다.


저가 해외 파견근무를 하는 지난 13년 동안 독자 여러분은 잘 아시다시피 쑥섬은 정말 많은 변화가 있어 왔습니다. 그 덕분으로 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가시면서 많은 사진과 글들로 쑥섬을 소개하고 표현해 주시고 계시지요.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쑥섬에서 나고 자라고 매년 명절을 쇠러 고향을 드나들면서 써 놓은 시와 산문 그리고 사진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시와 산문과 사진들은 비단 쑥섬을 다녀가시고 다녀가실 분들만이 인용하는 것들이 아닌 모든 독자님들이 읽어서 공감하고 힐링을 할 수 있게 되면 하는 생각으로 써 나가려고 합니다.


현재 저가 이미 써 놓은 글들은 지난 시간 적어도 20편 정도는 되며 이 글들은 이미 다른 인터넷 카페 등에 공유를 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12월 중에 내용을 좀 더 다듬고 현재 시점에 맞게 다듬어 올려서 마무리를 하고, 내년부터는 저의 4번째 시집인 '쑥섬이야기'의 시를 소재로 해서 30여 편 정도를 새롭게 쓰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내년 중반까지 전체 50여 편을 완성해서 여러 독자님들과 함께 나누면서 그동안 저가 써 놓은 이야기 중에 오로지 저만의 생각으로 모두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야기나 표현들에 대해서는 자문이나 지적을 받아서 보완하고 수정해서 쑥섬을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분들이 아껴 읽을 수 있는 이야기 보물섬인 쑥섬의 이야기가 완성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부터 써 나갈 글들은 저만의 경험과 생각들이면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문중사와 마을의 주민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부 자료를 참고하고 주변의 이야기들을 가미해서 소설적 기법으로 쓰거나 수필 형태로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 글 속에 등장하는 ‘나’는 필자를 말할 때도 있지만 단순한 ‘화자‘인 경우도 있게 되며 모든 이야기들은 쑥섬의 풍광과 그 시절의 풍속과 그리고 이야기들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므로 저의 글들은 독자님들의 기억이나 기록과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음을 먼저 양해 말씀 드리오며 그런 부분들은 말씀해 주시면 전체 틀은 유지하면서 그 방향을 바로 잡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쑥섬 돌부처 명재신 올림.

2024. 11. 풍경선방에서.

1983년도 고향 쑥섬의 사진이다(젤 왼쪽에 보이는 섬이 쑥섬과 연결된 ‘작은섬’이고 정면에 보이는 섬을 ‘쑥섬’이라고 부르지만 둘다 그냥 ’쑥섬‘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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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땅 쉬는 곳>


아버님 머무는 곳도 해는 저물어

사위에 먹빛으로

짙게 그어진 화선지이지요?


아버님

아직도 그 고집이십니까?


사람 가는 길 저물녘 되어

헤어져 가게 되면 영원으로 가는데요

뭍으로 나오소서


섬으로 가야 하는 사람의 길이라면

지금이라도 맨발로

맨발로 가고 싶은데요

왜 이렇게 사람은 욕심의 그림자를

못 버리는 걸까요?


아버님

태산 같은 호통으로 섬으로 부르소서

겉도는 영혼을 섬으로


이제는 이곳 남의 땅이 더 편안한 것은,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섬으로 부르소서!

1986. 3


이 시는 아버님 회갑연을 하시기 1년 전이었던 1986년에 우리 집의 세 번째 낚싯배를 진수하던 해에 지어서 아버님께 편지로 보내드린 시입니다.


이 시를 다시 베껴서 사진 앨범에 끼어 두었는데 늦은 대학 진학을 하고서 대학 내 문학동아리였던 한놀문학회에서 시 작업을 하면서 동인지에 실었다가 다시 제1 시집 '돌부처 도서관 나서다'에 실었던 시입니다.


쑥섬을 포함해서 나로도와 인동의 모든 섬들의 한결같은 현상은 자식들을 중학교까지 섬에서 보내고 고등학교부터는 여수나 부산으로 보내야 했는데 자식들을 먼저 보내놓고 부모들은 고향집을 정리를 하고 아예 이사를 가버렸는데 주로 부산 쪽으로 많이들 이사를 갔습니다.


우리도 부산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읍소를 했지만 아버님은 완고하셨습니다. 선산을 지키면서 고향에서 죽는 날까지 살 거라는 말씀이셨습니다.


< 나의 섬>

1. 푸른 바다 위의 고은 섬들아

태고의 조화 속에 뿌리를 내린 다도(多島)야

거기 떠 있는 것이냐 물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냐


2. 안개가 끼면 보이지 않다가

밤이 되면 볼 수도 없구나

그러나 태풍이 불고 파도가 몰아쳐도

끄덕도 않고 거기 버티고 있구나


3. 남의 자랑을 억만년 빛내는

너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비바람이 불면 너를 의지하여 피항하고

안개가 끼면 너를 찾으려고

애를 썼던 그 시절이


4. 그 무슨 까닭으로 너를 사랑했는가

반세기 바다 생활 너를 의지하면서

낚시하고 고기 잡든 두터운 정이

지금도 남아 이 마음 그리워한다


5. 이제 나이 70 우리 마을 산에 올라

멀리 떠있는 그 섬들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갈 수 없는 마음에 섬을 생각해 본다

얼마나 너희들을 안고 지냈는가

이제 이 몸이 이 세상을 떠나도

힘껏 견뎌라 태풍이 불고 파도가 몰아쳐도


6. 그리고 거기에 묻힌 영혼을 간직하고

거기 사는 천민을 보호하니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히 굳세게

무너지지 말고 거기 떠 있어라

영원히 뿌리박고 파도와 싸워라

이 시는 1996년 겨울 고향 쑥섬에서 아버님이 쓰신 것입니다.


70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살아오신 아버님에게는 쑥섬과 그 주변의 섬들은 각별한 의미였을 것입니다. 홀로 바다를 항해하면서 된바람을 만나거나 물 때를 기다리기 위해 바람이나 파도를 피해서 피항을 하면서 섬마다의 내력과 고마움을 그렇게 써서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저 또한 객지에서 살아가면서 늘 바다에서 낚시업을 생업으로 삼아 자식들을 키워 내신 아버님을 떠올리고 그 절대고독과 그 바다 한가운데서 노래하고 계실 아버님을 떠올리면서 관련된 시와 산문 작업을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그 고독 속에서 섬은, 여러 가지로 아버님에게 절대적인 위로였을 것이고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섬들에 대해 그리움을 기록하면서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허허로이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아버님이 불러 내렸을 노래들을 생각하며 그 작은 메모지에 시를 써서 편지로 울진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아들이 고향하고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울진으로 들어가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언젠가는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섬으로 돌아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고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이 지켜내었던 섬에 대한 애정과 미련과 그리고 애착을 그렇게 정리해서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쑥섬 몬당에 있는 ‘간내산포’에 올라가 그동안 시나브로 다녔던 섬들, 손대(손죽도), 너프리(광도), 무새기(무학도), 꼭뒤(곡두여) 그리고 평도를 건네다 보면서 술독에 빠져 살고 있던 큰 형님을 구제하려고 어머니를 먼저 올려 보내고 뒤따라 서울로 올라오시기 전에 죽도록 쑥섬에 남아 섬을 지키려고 했던 섬과 함께 살아가려고 했던 심경을 그렇게 시로 써서 둘째 아들에게 보내 주었던 것입니다.


아버님은 그렇게 섬을 떠나셨습니다.


어떻게든 홀로 쑥섬에 남아 여생을 섬과 함께 하려고 했던 의지는 어머니 혼자 먼저 올라가서 큰 아들을 술독에서 건져 올리고 다시 직장을 잡아서 일상을 회복시키려고 고생하고 계시는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두어 해 더 쑥섬에 남아 계시다가 일 년에 서너 번은 오가려면 집과 조상들이 있는 선산과 그리고 쑥섬과도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서울 창신동에 있는 조그만 월세방으로 합류를 하였습니다.


< 창신동의 섬>


항상 시작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끝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주저앉아

술병까지 얻어 오줌까지 싸대는

장남을 위해 기저귀를 채우고 다시

걸음마를 익혀주고

벌써 일백을 헤아리는 작은아들의 손녀딸을

건네다 보며

하나부터 시작하자고 하였습니다


봄비가 내립니다.


비린내 모두 건져내고

대신 창신동 흙을 담은 아이스박스

그 섬에

여린 상추를 심어

돌보고 있는 아버님의 등에서


파아란 바다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2000. 5. 29


젊어서 고향을 지키겠다고 굵은 팔뚝으로 굳건하던 아버지는 IMF 때 며느리하고 갈라서서 홀로 술독에 빠져 살던 큰 아들을 위해 어머니와 합류하면서 섬을 떠나 서울 창신동 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젊어서 지켜온 바다와 섬과 그리고 미련들 모두 버리고 창신동 낙산 그 끝자락 골방에서 주저앉아 술병을 얻은 큰 아들에게 힘을 주고 다시 일을 나다닐 수 있도록 무던히도 애를 써서 당시에 은행에 차압되어 있던 인천 산곡동 형님집을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까지 서울살이를 하였습니다.


창신동의 섬은 어느 해 울진에서 부모님을 뵈러 쑥섬으로 가는 대신에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 낙산의 그 작은 단칸방으로 찾아 들어가던 날 내리던 빗줄기를 맞으며 저희가 준비해 간 울진 죽변에서 구입해서 가지고 올라간 생선 아이스박스를 비우고 흙을 담아 상추 모종을 옮겨 심고 있는 모습을 서울서 울진으로 내려온 길에 썼던 시입니다.


아이스박스와 섬 그리고 쑥섬.


아이스박스에 담은 흙에 상추 모종을 심고 계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주저앉은 자식을 위해서는 당신들의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도 다시 일으켜 세워 주고자 했던 아버님과 어머님의 헌신 덕분으로 형님은 다시 건강을 되찾고 인천 산곡동 집을 되찾아 들어가서는 섬으로 돌아가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님은 그러고서 몇 해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인천의 형님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돌아가고자 했던 섬, 평생을 함께 했던 쑥섬의 빈집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겠다며 건강을 되찾으려고 무진 애를 쓰셨지만 갑자기 찾아든 기관지암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팔십도 되시기 전에 섬을 떠나셨습니다.


당시에 저희는 울진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돌아가시기 1주일 전에 병문안을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출상을 하여서 고향 마을까지 찾아 들어가서 쑥섬이 건네다 보이는 나로도 항에 잠시 운구 행렬을 멈추고 잔을 올려서 생전에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 했던 고향 쑥섬을 둘러보시라고 했습니다.


< 삼동의 섬>


다시

섬으로 가셨습니다


그 삼동 살애는 추위에도

섬으로 가고 싶으셨든지

소풍 가는 마음이셨든지


목숨 하나 떠나면

목숨 하나 구한다더니

들뜬 얼굴로

웃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다문 입술을 열어

크게 웃으실 듯이

오랜만에

편안한 얼굴이셨습니다


하얀 파도로 축복하는

삼동 섣달 초하룻날


다시

섬이 되셨습니다

2003. 1. 13


감성호는 우리를 대처로 보내놓고 혼자서 낚시를 하면서 자식농사를 지으셨던 세번 째 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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