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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이야기(2)

겨울쑥섬

by 명재신


<섬 전설>


아버님 평생고집 섬으로 남고

유채꽃 알알이 씨되어 한으로 몽그는데

뭍을 건넌 바람이

시누대 살(矢)되어 가슴에 와 박히었네


아버님, 뭍으로 가야 하나이다.


산은 산으로 남고

섬은 섬으로 남아

동백은 꽃피워 동박새 부르고

바위는 이끼 피워 세월을 부르는

노루바구 평널이 바람솔솔 솔밑바구가

신선으로 환생하는

섬전설 모두를 내가 심었는데


섬은 섬으로 남아야지.

1989. 4


아버님을 나로도에 모시고 다시 고향섬인 쑥섬으로 들었을 때 나의 손에는 캠코더가 들려있었다.


애초에는 살아생전의 아버님 모습을 담아 놓기 위해 부담을 무릅쓰고 새로 구입을 하였던 것이고 돌아가시기 이 주일 전에 울진에서 가족들과 함께 인천 산곡동으로 올라와 아이들과 어울리는 당신의 생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놓아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리 가족들의 모습을 찍어놓은 그런 캠코더였는데 출상날은 날이 하도 추워서 오동작을 하는 바람에 인천서 고흥까지 내려오는 과정은 담지 못한 그런 캠코더였다.


나는 고향섬에 들어가서 아버님의 체취가 묻어나는 그런 대상들을 주로 찍었다.


제일 먼저 담긴 것은 고향 빈집에 홀로 열매를 맺어 그 살을 키워 익어있는 밀감나무였다. 아버님이 심으셨고 내도록 그 정성을 받아먹고 키를 키우던 밀감나무였는데 이제는 내릴 만큼 뿌리를 굳건히 내렸는지 이태째 아버님의 잔손질이 없었음에도 태풍을 넘어 주렁 거리도록 매달려 아버님을 뺀 나머지 우리 가족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에 담은 것은 시간과 무관한 돌담이었고 한 계절이라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으면 천지를 모르고 머리를 풀어헤치는 잡초들로 가득한 화단이었고 사람이 집을 떠나면 보름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버려버리는 비어있는 화분들이었다.


비어있는 빨랫줄도 화면에 담았다. 손수 잡은 생선이 매달려 있던 빨랫줄을 담으며 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부분까지 따라갔다.


나는 지나치듯 건너섬인 사양도에 있는 문중의 입도조(入島祖) 선산을 담았다.


혼자 타고 나선 배의 프로펠러에 끌고 가던 새우잡이 끌그물이 감겨 그걸 풀려고 늦은 가을바다 물에 들어갔다가 몸이 굳어 다시 배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살아생전 공을 들인 사양도 선산을 향해 '할아부지 나 좀 살려줏시요'하고 탄원하자 갑자기 큰 파도가 쳐서 아버지를 뱃전으로 밀어 올려주었다던 입도조 할아버지의 사양도 선산을 향해 나는 지나치듯 가슴에 그 모습을 담으며 여기 당신들이 늘 굽어 살펴 주시던 이를 떠나보낸다고 잘 좀 받아들여 달라고 읊조렸다.


자식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고 허허로이 고향집을 지키며 긴긴 겨울밤을 이파리 다 지고 없는 뒤란 감나무의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지나셨을 그 뒤란 감나무도 카메라에 담았다. 해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달렸다가 누구 하나 따먹는 이 없어서 무수히 뒤란 빈 터에 떨어져 녹아내린 감들의 흔적과 아직도 빈 가지에 붙어 있는 감들도 함께 찍었다.


화단에 심어 놓은 동백나무가 어엿하게 키를 키워서 꽃을 피워 물고서는 왜 이제야 왔느냐며 아버지는 언제나 오시냐며 그 고은 입술로 겨울을 밝히고 있었다. 빈 집에 피었다가 지기를 얼마나 해서야 인기척이 일고 묵은 전등에 불이 켜질 것인지 묻고 있었다.


나는 그리고 집 앞에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내는 물결도 함께 찍었다. 어둠이 내리면 그 잔물결 소리는 여과 없이 담장을 넘어 마당을 건너 집안까지 넘나들면서 이제는 바다로 나가야 할 때라는 시그널을 주고 하던 그 물결소리는 시나브로 아버지의 기척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겨울 쑥섬을 가슴에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살아생전 동선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면서 모든 시선들을 아버지의 시간 속에 투영을 시켜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따라와서 겨울 쑥섬을 노닐다가 가셨을 아버지에게 이제 그만 떠나가셔도 될 거 같다며 가슴에 품어 한 세대가 다시 아버지의 살아생전의 동선을 이어 갈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했다.


돌아와서 그 테이프를 되돌려 티뷔의 큰 화면으로 들여다보면서 내가 의도하고 찍었던 대상들보다도 그 피사체 뒤에서 흘러드는 빛줄기의 아름다움에 빠져 버렸다. 아니 가슴이 저려 내렸다. 돌담 사이로 수백 년 묵은 당산나무 사이로 그리고 섬을 에워싸고 있는 바위들의 군상들 뒤에서 흘러드는 겨울쑥섬의 겨울빛깔이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으며 그 감도가 더할수록 아버님의 체취들은 무장무장 더 진하게 나를 섬으로 이끌어 들이는 듯했다.


겨울, 쑥섬


꿈꾸듯 지나간 어느 겨울날의 섬에 대한 느닷없는 방문은 아버님의 추모와 다시 시간 속에 묻기 위해 이루어졌지만 그 일로 아버님은 생시와도 같이 그 물상들과 빛깔들과 시누대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통하여 더 진하게 나에게로 다가왔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아닌 느닷없는 시간과 계절에 다시 한번 고향섬을 찾을 일이다. 거기 겨울쑥섬에서 느끼지 못했던 더 아름다운 빛깔들이 여전히 살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 여전히 아버님이 남기고 간 돌담들이 시간과 무관하게 남아있어 내내 묵언의 일갈들을 가슴에 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아버님과의 교감을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이리라.



1987년에 아버님의 회갑연 때 찍은 사진이 마치 엊그제 찍은 사진같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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