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해외로 파견을 나가기 전에 본사에 근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오전 회의 건으로 경황이 없던 차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화가 누구를 아시냐고 묻는 그쪽의 음성이나 전화번호는 익은 것이 아니어서 뭔 생뚱맞은 소리냐 싶어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라고 끊으려는데 지금 자기는 당사자가 아니라 대신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라며 전화를 걸어달라고 요청한 분이 잘 듣지를 못하여 필담으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고 하고서야 '아! 해암'하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해암이었다. 서양화가 해암 최주휴 화백
여름 언젠가 벌초를 위해서 여수로 출장 갈 일이 있어 벌교 현장에 근무하는 사촌 동생과 나로도를 다녀왔었다. 나는 벌초 중에 잠시 점심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산을 내려왔고 축정항 순천식당에서 간단한 요기를 해결한 뒤에 차를 돌리기 위해 금단여관 자리 앞에서 우회하다가 문득 물양장 가에 쪼그려 앉아 화구를 펼쳐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해암을 발견하였다. 오랜만에 뵙는 모습이었다.
해암은 평생을 쑥섬을 그려 왔었다.
가서 인사를 올렸더니 알아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아팠다고, 그래서 가을 개인전을 서울 어디에서 열려고 일정을 잡았다가 취소하고 대신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내려왔다고. 그래 아직 울진 사느냐고. 해서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고. 혹여 개인전이라도 여시면 꼭 연락을 해 달라고 명함을 하나 꺼내드렸더니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잘 되었다고 그러마고 헤어졌는데.
만나자는 것이었다. 보고 싶다고.
자기는 지금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있다고. 저녁에 내려간다고.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택시로 찾아간 그곳에서 해암은 언제부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손을 잡으며 어디론가 끌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별관 지하 미술전시관이었고 홍대 서양화과 동문모임인 '門展'에 석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던 모양이었다.
'쑥섬을 그렸어. 석점 다아'
전시장에 걸려 있는 그림은 모두 쑥섬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해암의 외가가 쑥섬이었던 영향이었던가 아니면 마땅한 소재로 적당하였던 것이었던가. 그 많은 시간을 쑥섬을 화폭에 담아 왔었다.
해암은 젊어서부터 나로도항이 있는 축정에 살면서 건네다 보이는 쑥섬을 그리거나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하루종일 ‘작은섬(쑥섬에 붙어 있는 부속 섬의 이름이다)’을 그리기 위해 쑥섬과 작은섬을 잇는 '목넘에'라는 곳에서 화구를 펼쳐두고 작은섬의 '솔밑바구'를 그려 왔었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오다가다 그가 거기에 붙박혀 허구한 날 ‘작은섬’의 절벽 ‘솔밑바구’를 그려 오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는데 그와의 인연은 늦깎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출간한 제1 시집 '돌부처 도서관 나서다'에 '무명화가 해암'이 실린 것을 아버지가 해암에게 증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선 휴가 때 고향에 들를 때면 자주 만나서 해암의 그림과 나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그때서야 그가 무명화가가 아닌 유명화가로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것을 알았었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건네다 보면서 다들 이제 내 그림이 무거워졌다고. 전시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의식해선지 자기가 그린 고향섬에 대한 애착의 표현들을 그렇게 서둘러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글을 써서 '고맙다' '감사하다'라고만 했다.
우선 나를 불러주어서 고마왔고 또 석점 다 제목을 '나의 고향'이라고 해놓고 있어서 눈물이 났다. 해암이 거주하고 살아온 곳은 나로도 축정항이었지만 자신이 평생을 두고 건너편에 있는 무명의 '쑥섬'을 이제는 '나의 고향'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은 서울에서 익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감성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저녁을 하지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에 주변의 조그마한 식당을 찾아 들어가서는 간단하게 식사 겸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많은 대화를 했다. 아니 나는 손으로 글자를 써서 묻는 입장이었고 해암은 거기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궁금증은 해암의 그림이 당신의 젊은 시절에 보아 왔던 그림에 비해 사물을 표현하는데 단순해지고 무디어져 가는 경향에 대해 물었고 거기에 대한 대답은 결국 세상을 살아보니 예각은 무디어져 가고 힘이 넘쳐있던 시절에는 객기도 많이 부리고 욕심을 내기 마련인데 나이를 칠십이 다 되어가면서 그 모든 예각들이 무디어져 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자빛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가 그린 나로도 주변의 바다빛깔은 청자빛을 닮아 있다고 했다. 그 어릴 적 돛단배에 싣고 오던 항아리 빛깔이 바위 빛깔이었고 바다 색은 그 옹기를 싣고 오던 곳, 강진의 도요지에서 빚었다던 청자빛깔을 닮아있다는 생각을 전했던 것인데.
해암께서 내게 물었다.
시작업은 계속하냐고. 첫 시집이 나온 뒤로 10년이 넘었는데 두 번째 시집이 나왔느냐고 물었지만 시 작업은 계속하고 있으나 시집 출간은 아직 못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러지 말고 묵히지 말고 끊고 지나가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나는 그 말씀을 가슴에 담았다. 그렇구나. 혼자만 좋다고 하는 시보다 독자를 향한 마음이 담겨야 비로소 시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무튼 그날처럼 오랜 시간을 그와 많은 이야기를 그것도 해암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 가면서 많이 나눴던 기억이 없었다.
밤이 이슥해서야 둘이서 술 한 병을 비우고 서울역에서 헤어졌다. 밤 열 시 반 용산발 순천행 야간열차를 타고 가신다고 하였다. 헤어지는 길에 뭐 좀 사 드시면서 내려가라고 만 원짜리 두 장을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어드렸더니 눈을 홉뜨시면서 출발하는 시내버스에서 어쩔 줄을 모르시며 떠나갔다.
그 해 육십 여덟. 그 옛날 나로도라는 외진 섬에서 서울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서양화가 해암 최주휴 화백. 열병을 앓아 귀가 멀어져 작품활동을 한창 하여야 할 젊은 화가가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천착한 섬. 나로도 그리고 그의 그림의 본향 쑥섬의 작은섬.
해암은 그로부터 며칠 뒤에 또다시 남의 손을 빌어 서울로 전화를 해와 잘 도착했노라고 일부러 전화를 해왔었다.
눈을 감아보면 우리가 어릴 적부터 쑥섬에 와서 그림을 그리던(아마 그때가 사십 대 중반 정도였을 듯) 해암을 지나가면서 그가 어쩐 일로 작은섬에 천착하는지 궁금해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서울이라는 곳에서 함께 저녁을 하고 그 만남이 못 잊혀 남을 시켜서 전화까지 하게 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에 감격해하고 가슴이 찡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모를 일이다. 인연이라는 것.
<서양화가 해암(海岩)>
섬으로 드는 길목에서 해암을 만났다. 누가 그림 한점 건네주었더니
호가 무어냐고. 화가가 호 하나 없어서 되겠냐며 해서 얻은 수석 한점
海岩. 밀물이 석양처럼 드는 밀물다방. 파도소리를 그리고 앉았다.
소리도 듣지 못하면서 평생을 쑥섬만을 그리고 앉았다. 나로도 본섬은
앞에 두고. 뜨내기손님 공짜 커피 한 잔에도 나로도항 인심은 아직 살아
있다며 가슴 한껏 부풀린 파도소리 해암. 파도만 그리면 되었지 무엇으로
소리까지 그리려 하냐면.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이요 예술가. 허공에다
소리를 그리고 있다. 이제는 소리조차 파도 같은 서양화가 해암.
출처 : 명재신 제1 시집 '돌부처 도서관 나서다(1993)'
이 시는 원래 1993년도 제1 시집 '돌부처 도서관 나서다'에 실린 시이다.
이 시집을 아버님이 해암에게 증정하면서 해암과 돌부처(저의 필명)는
쑥섬을 소재로 해암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이 시는 제4 시집 '쑥섬 이야기(2021)'에 다시 인용되었다.
3점 모두 쑥섬을 그러서 출품하셨다. 왼쪽은 쑥섬의 ‘웃끄터리’의 동백꽃길 모습이고 오른쪽은 나로도 축정항에서 건너다 보는 쑥섬의 ‘건몰짝’ 풍경이다.해암께서 포즈를 취하시고 계시는 그림은 쑥섬을 ‘작은섬’에 있는 ‘마당널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리하고 그린 ’평널이‘ 쪽 그림이다. 위의 글에 등장하는 3점 중에 1점이다.
해암 화백과 함께 개인전에서 뵙고 사진을 찍었다. 위의 글에서 뵐 때는 2005년이었고 다시 개인전을 2006년에 갖으셨는데 그때 뵙고 찍은 사진이다.
2006년도 개인전을 다시 열었을 때 가족들과 함께 전시장이었던 광화문 ’서울 갤러리‘ 앞에서 찍어 드린 해암의 모습이시다.
이 시는 위의 글에서 뵙고 난 이듬해 ‘쑥섬’ 개인전에서 뵙고 드린 헌시이다. 제4시집 ‘쑥섬이야기’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