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나무 이야기>
꿈은 이루어진다?
이십몇 년 전이었던 것 같다.
동생과 함께 나는 고향 섬을 오른 적이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우리 형제가 고향을 찾을 기회는 설날하고 추석 명절이 대부분이니 아마도 설날을 전후한 어느 때였을 것 같다.
쑥섬이 지금처럼 꽃섬으로 거듭나서 오르고 내리는 길들이 잘 정비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나트 막 한 섬의 뒤편(우리는 그곳을 '뒷먼’이라고 부른다)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좁으나마 예전의 모든 밭으로 통하는 길이 아니었다. 길의 윤곽은 고사하고 길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오랜 세월 섬을 살다 간 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윤을 더했을 길들은 막혀 있었고 그곳에는 온갖 잡목과 가시덩굴만이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닿고자 하는 곳은 그 '뒷먼’에 있는 밭이었다. 다들 젊은이들이 떠나가고 없어 놀리고 있는 텃밭이었다. 다분히 경제성이 떨어져서 타산이 맞지 않은 그 어느 시기부터 잡초와 잡목들이 자유롭게 뿌리를 내리던 곳에 있을 '그 어떤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두고 감히 꿈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꿈이라고.
하지만 꿈이 되어버린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길도 아닌 길을 낫으로 헛헛하게 휘저으며 길을 내며 다시 올라야 하는 섬의 길.
살아가면서, 아니 객지만을 떠돌면서 소망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땔감나무로 베지 않고 뒷먼밭 가장자리에 두고 키우던 소나무 한그루였다.
쑥섬은 당산과 초분골이 있어서 아무렇게나 땔감나무를 구해서 쓰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자기의 밭자리 언덕에서 한해살이나 한해 동안 자라난 잡목들을 베어다가 군불을 때거나 밥을 짓는데 써야 했기에 나무 하나가 귀한 곳이었음에도 뒷먼밭 가장자리에 우뚝하니 자라나고 있던 그 소나무 한그루는 귀한 땔감나무감이었음에도 그걸 낫으로 쳐서 한 겨울의 좋은 군불용으로 쓰지 않고 자라나는 세 아들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렸는지 귀하게 키워내던 그런 나무였던 것이다.
자식들이 객지로 공부를 하러 나가고 공부를 마치고 직장에 나서도록 어머니는 그 소나무의 존재를 알려주고 잘 크고 있음을 전해줌으로써 객지에서도 자식들이 안심하고 하는 일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그 소나무가 이제는 뒷먼밭을 더 이상 경작하지 않고 다른 묵은 밭들 조차 사람의 접근이 허용이 안된 이후로 시간이 지나 어머니조차 뒷먼밭으로 가 보지 못한 지가 여러 해가 지났으니 우리에게는 그 존재가 궁금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십 년을 넘기도록 어찌 된 영문으로 섬을 넘어가 그 키를 대보지 못했던 소나무를 다시 보는 것이었다.
우리의 키에 맞춰 키를 키우는 나무 하나
객지를 떠돌면서 늘 나는 고향 쑥섬의 뒷먼에 내리는 겨울볕을 떠올렸고 그 겨울볕 아래에서 우리 조무래기들이 겨울해를 넘겼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유년의 그루터기에서 아직도 자리하고 있을 겨울볕 속의 소나무 한 그루 주변을 맴돌고 있는 기억들을 되새김질하곤 하였는데,
섬의 뒤편은 조무래기들의 온갖 자유가 보장되는 아지트였기에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그곳에서 하루를 소일했던 곳이었다.
그곳을 거쳐간 많은 선배들이 그랬듯이 어른들 몰래 담배를 피운다든지, 불장난을 한다든지, 나일론 밧줄을 태워 녹여 '공작’이라고 하는 작품을 만든다든지, 꿩을 잡으려고 온 밭을 헤집고 다니면서 돌팔매질을 한다든지, 당산에 몰래 스며들어가 하루 종일 간첩놀이를 한다든지를 일삼았고 슬며시 허기가 지면 남의 밭 양지에 아직 남아있던 무나 당근을 가슴이 다리도록 뽑아먹든지 남의 밭 언덕을 털어 아구가 아프도록 칡을 캐 먹든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가을 고구마를 캐고 걷어놓은 고구마순에 매달려 있던 말라비틀어진 고구마라도 입술이 시커멓도록 찌벅거려 하루 해를 넘기던 곳.
그 유년의 시절을 더듬어가는 길목을 지키며 아직도 홀로 서 있을 그 '존재’를 만나보고 싶은 것은 항상 고향 방문 때마다 첫 번째의 희망사항이었음에도 일정상, 일기상, 지형상의 이유들로 다음으로 미뤄지곤 했던 것이 하매 이십여 년을 넘기고 있었고.
그리움의 대상은 그렇게 시 한 편을 만들게 하였고 그리하여 그 소나무를 만나러 가고 싶어서 이 시를 당시에 울진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던 때 시 작품을 올리곤 하던 '가족방’이라고 하는 곳에 올렸는데 답글들이 그곳에 한번 다녀오셔야 할 것 같다. 다녀와서 얼마나 키를 키웠는지 좀 사진을 올려 주라고 했던 소나무 한 그루.
소망이 꿈으로 바뀔 즈음 그 해는 정말 큰맘 먹고 다른 일정을 버리고 형제는 잘 갈린 낫을 치켜들고 그 머나먼 시간대에 존재하는 그리움을 찾아보러 섬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나무는 정말 키를 얼마나 키웠을까?
우리 형제가 나이를 먹는 것에 비례하여 키를 키우던 비례법을 버린 어느 순간부터도 키를 키웠을 소나무는 아직도 겨울볕의 그 온기를 누리며 독야청청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그곳에 당도했을 때는 그러나 너무나 허망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수많은 잡목수림으로 뒤덮인 그곳에는 적요하게 양지볕이 내리고는 있었지만 사람이 움직이지를 못하도록 칡덩굴로 뒤덮인 그야말로 내버려 두어 그 어떤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꿈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언제 어느 시간대에 그 소나무가 명을 잃고 그곳으로부터 형체를 감추게 되었는지를 모르겠지만 그 시간에도 내 꿈속에서는 키를 키워내고 있었던 독야청청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명을 다하고 흙으로 내렸던 것일까. 아님 그 누군가 사람의 손을 타서 뉘 집 재목으로 쓰일 요량으로 베이게 되는 운명이었던 건가. 아니면 함께 키를 키우던 이들을 그리워하다가 어느 날 자진해 버렸던 것일까.
아아, 그대로 꿈속에 담아놓고 있을 걸.
우리 형제가 내려오는 길은 오를 적보다 훨씬 수월하였지만 더디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무엇으로 남은 시간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겨울 내내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그 따뜻하리라던 겨울볕은 이제 어디에 내려서 겨울을 노닐다가 떠나게 하게 할까? 우린 남아있는 시간대에 무엇을 다시 꿈을 만들어 그리워하게 될까?
뭐 그런 것이었지 싶다.
그 소나무만을 그리워하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않았던 그리고 잡목림으로 싸잡아 버렸고 그 시절 온갖 땔감목으로 베어져 그 존재도 드러내지 않았던 동백나무며 물푸레나무며 팽나무며 가시팽나무며 가이내 나무 등이 그 자리에 자리 잡아 나름의 형상을 키우며 사계절을 채우게 되어 어른 키를 넘기게 되는 그 어떤 시절에 다시 찾는 꿈을 갖게 될는지
고향과 꿈,
쑥섬과 독야청청 그 소나무,
나는 여전히 이 시절을 지나면서 쑥섬 뒷먼밭 그 자리에 남아 겨울을 나고 있을 소나무 한 그루와 겨울볕을 그리워하며 내 지친 일상을 넘어가고 있다. 아직도 그 소나무가 키를 키우는 겨울볕의 양지를 넘어가고 있다. 여전히.
꿈은 꾸는 걸까? 이루는 걸까?
정작 그날 그 섬에 다녀온 것이 꿈이 아녔을는지…
<뒷먼밭 소나무>
며칠 바람이 불고 불더이다
늘 푸른 잎으로 가득하던
쑥섬 뒷먼밭 소나무 한 그루
마른 갈비들을 잔뜩 떨구어 놓았을 터
어머니 내 소싯적 땔감나무로 베지 않고
내 키를 키우듯 그 키를 키워 주었던
이름하여 독야청청 소나무 한 그루
아름아름 키를 키워 외롭고 굳건하더니
털면 아무것도 나올 것 같지 않던
홑 소나무 저도 외로워라
저 혼자 떨구어 내었을 시간의 더께들이
갯바람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있으리
다시 바람은 떠나가고 흔적도 없이
그 많던 시간들
깨끗하다 못해 말끔하다 다들 어디로 흘러갔는지
바람이 언제 있었냐는 듯 고요한 쑥섬 뒷먼밭
독야청청 소나무 한 그루
다시 푸르다 못해 겨울빛깔 청청하리.
- 1996년도 ‘가족방’ 카페에 발표되었으며 2021년 제4 시집 ’쑥섬이야기‘에 실렸음.
이 시는 1996년도 울진에서 시작활동을 하던 때 쓴 시이며 2021년도 제4 시집 ’쑥섬 이야기‘에 실렸다. 여기 소나무는 쑥섬의 다른 언덕에 있는 소나무 사진이며 이 시화는 2024년 여름에 쑥섬에서 개인 걸개시화전을 할 때 걸었던 시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