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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이야기(10)

선산이야기

by 명재신


오늘은 아버지의 시에 나오는 저희 집안 선산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저가 울진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기를 10년을 조금 넘게 하고 있을 적에 쑥섬에서 노년을 지내시고 계시던 아버지로부터 장문의 편지와 위에 첨부한 글을 받은 바가 있었습니다.


장문의 편지는 한국전쟁 당시에 쑥섬 여러 집에서 운용하던 큰 목선들과 함께 징발되어 고흥 근처에 있는 포두라고 하는 포구로 가서 광주에서 밀려든 피난가족들을 싣고 거친 파도와 바람을 거슬러 여수를 거쳐 부산으로 향하다가 배에 타고 있던 피난민들과 함께 탄 사람들이 멀미가 심해 더 이상 부산으로 가지 못하고 사량도에 내려주고 다시 쑥섬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기록한, 동란 중에 도서지방에서 겪은 좀 특이한 경험을 쓴 소설 같은 수기의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식에게 남기어 당부하고자 했던 위에 첨부한 시첩이었습니다.


그 글들을 당시에 어딘가에 잘 간직한다고 넣어 두었는데 그 넣어둔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사우디에서 3년 5개월의 파견근무를 마치고 들어와서 연초에 이사를 하고 난 뒤 남은 저의 짐 정리를 하던 중에 저의 오래된 시노트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첨부의 시첩만 원본을 찾아냈습니다.


그 글은 시의 형식을 띠고 있었는데 고향 쑥섬에서 모시고 있던 저희 문중 6대조 할아버지의 선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해서 다시 또 그 글을 어디에 잘 간직해 놓는다고 하면서 또 잊어버릴 것 같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고 소개를 하면서 이에 대한 글을 조금 더 써 볼까 합니다


그러면서 위의 선친의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쑥섬의 후손들이 모셔왔던 저의 6대조 할아버지의 선산 이야기도 좀 해 보겠습니다.


요새는 인터넷에서 '쑥섬'이라고 검색을 해 보면 '꽃섬' '고양이섬' 등으로 이름을 얻어 유명해진 쑥섬을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해서 늘 많은 사람들이 탐방하러 다녀가는 섬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요. 실은 꽃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는 했지만 원시림을 유지하고 있는 당숲과 몬당에 올라서면 펼쳐지는 쑥섬 '뒷먼(섬 뒤쪽)'의 기암괴석과 특유의 멋들어진 풍광이 더 탐방객들을 반하게 합니다.


쑥섬은 예로부터 질 좋은 쑥이 많이 난다 하여 '쑥 艾(애)'와 '섬 島'를 써서 '애도(艾島)'로도 불렸고 한 때는 목포 쪽에서 오는 항로에서 보면 영락없이 소가 물 위에 누워있는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와우도(臥牛島)'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저는 '애도'라는 지명보다는 본디 써오던 '쑥섬'이라는 지명을 더 좋아했습니다. 여전히 둘 다 쓰고 있지만 다행히 쑥섬을 더 많이 쓰게 되는 거 같습니다.


쑥섬은 저희가 어릴 적만 해도 작은 섬에 약 110여 가구가 살았었고 그중에 1/4 정도가 우리 집안일 정도로 일가들이 많이 살아서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라치면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함께 큰일 작은 일들을 치를 만큼 많이 살았는데 80년대를 전후해서 대부분 도회지로 나가서 지금은 남아있는 전체 11 가구 중 그나마 우리 집안 2 가구만이 남아서 고향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남해안의 중요 항로인 좁은 물목을 사이에 두고 쑥섬과 사양도가 나로도 부속도로 이루어져 있음


여기서 저가 소개하고자 하는 곳은 쑥섬의 후손들이 모시고 있는 사진에서 보이는 쑥섬 건너편에 있는 사양도에 있는 선산입니다.


건너편 섬은 사양도 또는 내섬이라고 하는 섬인데 쑥섬과 함께 나로도 앞에 있는 부속 섬 중에 하나입니다, 쑥섬과 사양도 사이는 진도의 울돌목과 같은 물목이 아주 좁고 물살이 센 항로이고 서로 아주 가까이 있는 섬인데 자세히 보시면 왼쪽 봉우리에서 7부 능선 즈음에 살짝 평평한 부분을 보실 수가 있는데 거기가 바로 저로부터 6대조 할아버지 '日자 倫자' 할아버지를 모셔놓은 저희 쑥섬에서 매년 시제를 모셔 왔던 선산이 있는 '玉燈掛碧옥등게벽'의 선산이 있는 곳이랍니다.


쑥섬은 원체 그 크기가 작아서 오래전부터 마을에서는 붙여먹을 땅이 적은 이유로 묘를 못 쓰게 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쑥섬에는 묘를 안 써 왔고 나로도 본섬이나 고흥 가는 길목에 살아생전에 미리 땅을 구해 놓았다가 상을 당하게 되면 모시게 하거나 그리하지 못하고 갑자기 초상을 당하게 되면 초분골이라고 하는 곳이나 본섬 옆에 있는 작은섬에 가묘인 초분(草墳)으로 임시로 모셨다가 2~3년 뒤에 본장(本葬)이라 하여 정식으로 나로도 본섬이나 뭍에 다시 모시는 이중장례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양도에 있는 선산에 대한 이야기가 구전으로 저희 문중에 전해 내려오는 데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쑥섬에 집안의 한 어른이었던 '일자(日字) 윤자(倫字)'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마땅한 장지를 정하지 못하여서 집안 어른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에 마침 쑥섬에 시주를 받으러 들어오신 스님 한 분이 상중인 집안 어른들을 보고는 시주를 하면 좋은 명당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시주를 넉넉하게 해 드렸더니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건너편 사양도 봉우리 켠을 가리키면서 저기 저 봉우리 근처에 평평한 곳이 있는데 저곳이 '玉燈掛碧옥등게벽'의 명당이니 거기에 모시면 집안이 내도록 평안하고 자자손손 그 덕을 볼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대신에 하관을 할 때는 소가 세 번을 울면 그때 하관을 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는 섬을 나서 버리더랍니다.


사진에서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쑥섬에서 배를 타고 사양도 선창까지 가서 도보로 그 7부 능선까지 그냥 가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당시에 길을 내면서 상여까지 메고 장지까지 가야 했으니 얼마나 어려운 길이었을지요. 그곳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집안이 평안하고 후손들이 그 덕을 본다는 말씀에 문중의 모든 분들이 함께 나서서 온 힘을 다해 그곳까지 길을 내면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렵게 망자를 상여에 태워서 장지까지 모시고 가서 미리 집안 장정들이 만들어 놓은 묫자리에 하관을 준비를 했는데 문제는 '소울음소리가 3번이 들리면' 하관을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원래 쑥섬은 한때의 지명이 와우도라는 지명이 이유였던지 소가 먹을 풀들이 넉넉하지를 않았는지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사양도와 함께 소를 키우지를 않았기에 '소울음'을 기대할 수가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어쩌지를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는데 그때 마침 윗녘(목포 방면)에서 아랫녘(여수 방면)으로 가는 풍선(돛단배)이 쑥섬과 사양도 사이의 좁은 물목을 지나가면서 북을 둥둥둥 치면서 지나가더랍니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기적소리를 내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좁은 물목을 지날 때는 맞은편에서 오는 배하고 부딪히는 것을 막으려고 서로 북을 치거나 나팔을 불면서 지나갔는데 지관어른이 그 북소리를 듣고는 저 북소리가 바로 소울음이다. 북은 소가죽으로 만든 것이니 소울음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하관을 하자 그러더랍니다.


쑥섬과 사양도는 남해안의 주요 항로이면서 좁은 물목으로 되어 있어 물살이 매우 세게 지나가는 곳임


이렇게 해서 '일자 윤자' 할아버지의 선산이 어렵고도 극적으로 그곳에 조성이 되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후로 매년 쑥섬에서는 자손들이(저도 중학생 때까지는 매년 따라다녔습니다만) 나름 성대하게 시제를 모셔왔습니다. 당시에는 주변 인동에 사시는 집안 어른들도 모두 의관을 갖추시고 오셨고 집안의 젊은 며느리들은 머리에 함지를 이고 젊은 장정들은 지게에다 지고 올라가서 가을 시제를 모셨는데 특히 금산도에서도 매년 갓을 쓰신 집안 분들이 다녀가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선친의 글에서도 보이듯이 그곳이 등잔형국의 명당이어서 그곳에 서면 건너편 나로도 본섬의 동산에 일출이 일면 제일 먼저 햇살이 와닿고 달이 떠도 제일 먼저 그 달빛이 닿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선산 바로 아래 켠에 배들의 길잡이가 되고 항로를 밝히는 등대가 들어서서 오랫동안 뱃길을 잡아 주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하여 70년대에는 쑥섬으로 건너가는 송전선로의 송전탑이 세워져서 쑥섬에 환한 불을 밝히우게 하니 우리의 성씨인 明(日+月)의 의미와도 맞아떨어지는 명당이라고 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의 선친은 바로 그런 이치로 후손들이 그 선산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살펴야 세상을 이롭게 하고 밝게 밝히는 광명이 후대에 넉넉할 것이다고 유언을 하신 듯합니다.


하지만 그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저를 비롯해서 쑥섬의 후손들 대부분이 중학교를 나로도에서 마치고 고교 진학을 위해 출향을 한 후 모두가 도회지에서 배움을 더하고 직장으로 나아가고 자식들 키우느라 객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다 보니 어느 사이 60을 넘기고 말았기에 마음은 늘 선산에 가 엎드려 죄송함을 고하는데 몸은 아직도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난 8월에 선산에 다녀올 거라고 작정하고 내려갔는데 묵은 길은 없어지고 장마로 잡목이 왕성하여 진입조차 불가하여 나중에 이른 봄철에 다시 한번 올라가 살펴볼 거라고 쑥섬에서 건너다보면서 잔만 올리고 왔습니다.


이렇게 쑥섬의 선대 어른들이 지극정성으로 잘 보살펴 오던 선산의 할아버지는 이제나 저제나 자손들이 왁자지껄하게 이고 지고 몰려 올라오는 모습을 오늘도 기다리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지난 8월에 쑥섬에 내려가 선산에는 못 올라가고 쑥섬에서 잔만 올리고 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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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유배지마다에 나으리 까칠한 수염마냥

돌옷 입으시고

뒤틀려도 좋은 선 귀인貴人의 평생이

성城을 이루고 있습니다. 들어올 적 혼자였다가

시름시름 많기도 하여라 돌로 올려

호화별궁 초가 한 동棟 넉넉하게

장다리꽃 보기도 좋아라 육자배기 한 가락

훨훨 장성長城 너머 한양을 바라시더니

나으리 잠드실 땅 한 평 하늘 한 마지기

손수 장만 하시더니 들어올 적 혼자였다가

나가실 적 기억 못 하시는.


이 시는 쑥섬 입도조 할아버지를 기려 1985년도에 쓴 시로 1993년도 첫 시집

'돌부처 도서관 나서다'에 실렸던 시이며 제4집 '쑥섬이야기'에도 다시 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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