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기록들
지난 여름에 쑥섬 고향집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보자기에 단단히 싸여 있는 몇가지의 기록 뭉치를 발견했습니다.
기록들은 크게 2가지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쑥섬 문중에 대한 기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할머니 유언에 따라 왜정 때 남양군도에 징용가서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유골이라도 수습해 오기 위해 태평양전쟁유족회에서 고군분투하시던 여러 스크랩과 기록들이었습니다.
여러 기록들 중에서 쑥섬 명씨 문중에 대한 기록의 일부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산'은 '사양도에 있는 저의 6대조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선산으로 저의 이전 글인 '쑥섬 이야기(10) 편 '선산이야기'에 일부 소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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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 속에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저의 모습입니다. 1989년도 9월 16일에 찍은 사진이므로 아버지의 나이는 지금의 저의 나이대인 64세이고 어머니의 나이는 58세, 그리고 저의 나이는 27세였군요.
아버지는 쑥섬 주변의 바다를 누비며 자식들을 가르치고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남도의 작은 섬에 거주하는 촌부였지만 늘 책을 가까이 하고 글 쓰기를 좋아하셨고 배낚시를 하시는 동안에도 늘 일기와 많은 글을 써 오신 쑥섬의 문사(文士)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직접 쓰신 시와 소설까지도 늘 편지에 동봉해서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에게 보내서 그 기록들이 남겨지게 했기에 아직도 저는 많은 글들을 직접 쓰신 손편지와 함께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저가 가지고 있는 글 중에는 없는 귀한 기록들이어서 쑥섬 고향집에서 읽어보면서 새삼 아버지가 문중일에 얼마나 헌신을 하시고 조상을 섬기면서 자손들의 번창을 기원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기록들 중에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사양도 선산'에 묘비를 세우기 위해 쑥섬마을에 살고 있는 문중과 고흥군 금산면(거금도) 일가들과 협업을 하면서 출향한 일가들의 참여를 이끌어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日자 倫자' 할아버지의 선산에 세울 묘비 건립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각향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일가들에게 서신을 보내느라 작성한 서신의 초안과 그리고 모금에 참여한 일가들의 이름과 성금액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여 두고 있었으며 그 전 과정을 위와 같이 표지를 만들어 편철을 해 두고 있었습니다.
마치 저에게 보란 듯이 말입니다.
언젠가는 저가 그 기록들을 보고 후세에 전달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고옵게 상자에 넣어서 보자기로 귀한 보물을 싸놓은 것처럼 보관해 놓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蓬湖里(봉호리)'는 당시에 쑥섬마을을 부르던 행정명이었으며 여기에 '蓬'자 역시도 '쑥 봉'으로 '쑥섬'을 의미하는 마을 행정명이었습니다.
저의 부친의 이름은 '明자 祚彦명조언'이며 1926년생으로 저하고 띠 동갑인 토끼띠였습니다.
이 서신은 지금과 같이 단톡방이 있으면 전국의 모든 종친들에게 일시에 보낼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모두 편지로 주고 받던 시절이라 모두 필사를 해서 연락이 가능한 모든 분들에게 동참을 호소를 하기 위해 하나하나 보냈을 것이니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가 있을 거 같습니다.
'자손 만대에 남길 이 성스러운 과업의 수행의 운동에 서로 협력이 있으시기를 당부 드리며'
조상의 묘비석을 준비하기 위해 결연한 의지와 자손들의 번영을 위해 동참을 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요청을 하고 있는 결연함을 엿볼 수가 있을 듯 합니다.
아버지가 세우려고 하는 묘비석은 바로 위의 사진의 등대 위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가 보이는 7부 능선에 있는 '6대조 할아버지'의 묘비석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보기에도 선산까지 닿는 길이 험로이고 좁은데다 매년 1~2회 정도 선산에 가기 위해 칡덩쿨을 베어내어야 하고 유실된 길을 보수를 해야 했던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제를 모시기 위해 매년 다녀오는 일가들의 보행조차도 쉽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돌로 만든 비석을 손상없이 운반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임에도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일가들과 공을 들였을지요.
그렇게 모금한 성금으로 비석을 제작하고 운반하고 그리고 제막식까지 하고 난 이후에 결산을 한 내역을 다시 전체 일가들에게 보내느라 필사를 한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서 지금의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용 내역을 살펴보면 묘비석을 제작하기 위해 많은 통화하고 묘이석을 뭍에서 나로도항으로 가져와서 다시 이를 사양도로 배로 운반하고 목도질을 하여서 가파른 비탈길을 한걸음 한걸음 옮겨가는 여정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무거운 비석을 제작하기 위해 전국의 종친들로부터 모금을 하고 제작을 하고 그리고 나로도까지 옮겨운 비석을 최종적으로 선산까지 손상없이 운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을지를 알기에 한걸음씩 나아가는 종친들의 어깨에 걸쳐진 비석의 무게를 알만도 하였습니다.
묘지 제막을 하고 보낸 감사인사의 필사본입니다.
막연했던 여정을 구체화하고 그 과정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리고 공유하고 보고하고 그런 기록들을 다시 후세에게 전달하기 위해 잘 보존해 놓은 아버지의 놀라운 결단력과 예지력에 새삼 감탄을 하면서 그 기록들의 보따리를 그곳에 그대로 두고 왔습니다.
혹여나 저가 가지고 있다가 분실을 하기 보다는 고향집이 존속하는 한 쑥섬에 그 가치있는 아버지의 기록들이 고향집에 보존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위의 사진은 묘비석을 세우고 난 뒤에 금산 일가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보입니다. 아마 편지로 동봉해서 묘비제막 사진을 보내주고 여분의 사진이 있어서 남겨둔 것으로 보입니다.
왼쪽에 두번째가 아버지이고 아래에 왼쪽에서 세번째가 저의 어머니이며 당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던 분들의 사진입니다.
그리고도 끊임없이 문중 일을 해 나가면서 주변 일가들과 협업하고 단합하며 의사를 결정해 나가는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진은 묘비석이 번듯하게 세워져 있는 1992년도 겨울에 동생과 함께 찾은 선산의 모습입니다(동생은 왼쪽, 오른쪽이 필자)
'통정대부 일자 윤자의 묘'로 합장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에 사용된 문관(文官)의 품계 중 하나로, 정3품에 해당하는 관직 등급으로 저의 6대조 할아버지이므로 30년을 1세대로 보면 1780년대에 관직에 계시다가 낙향하시어 쑥섬에서 여생을 보내고 돌아가셨던 분이십니다.
명씨 성을 가진 최초의 입도조는 1761년(신미년, 영조 37년)에 쑥섬에 정착한 것으로 쑥섬의 기록에서 확인이 되므로 아마도 그로부터 2대가 지나고 난 뒤에 벼슬을 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퇴직을 하게 되면 저 또한 낙향하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쑥섬 이장을 하면서 고향 선산을 돌보고자 꿈꾸었으나 어찌하여 아직까지 타향을 전전하면서 생업전선을 떠나지를 못하고 있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그 기록들을 열람하면서 '쑥섬 이야기'를 쓰면서 잊혀지고 묻혀져가는 기록과 기억들을 세상에 꺼내놓는 일을 할 수 있는 것 만으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