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꽃 이야기
'바다꽃 이야기'
들어봐.
배를 부릴 때나 뱃사람 되어 바다에서 살아야 할 때는
노상 호주머니에 목숨을 챙겨 다녀야 하는 모양이야.
만선을 꿈꾸는 뱃사람들에 잿빛 잿빛 구름 떼 그물 가득
걸려들면 미련 없이 목숨을 내주어 버렸던 모양이야.
파선 뒤에 자취처럼 남는 주검 없는 장사葬事도 상관 않고
애오라지 죽음 하나만을 위해. 선선히 그래.
더 들어봐.
내 유년의 기억 어디쯤 칠성바다 조기잡이 나갔다가
회항한 할아버지는 풍선風船 고물에 싣고 온 주검 여덟을
가리키며 동아줄에 꽁꽁 허리가 묶여 있던 넋들 거두면서
바다꽃 피었다. 바다꽃 피었다.
표류하던 여덟 생명이 뭍이 보이지 아니할 때 묶었을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묶었을.
먼저 잠든 주검 옆에서 스스로 매듭 풀지 않아
꽃 이파리 하나 피고 꽃 이파리 하나 피고
여덟 이파리 바다꽃은 그렇게 피는 거야 그래.
하늘에서 새가 되어 바다를 내려다봐.
눈을 감고 눈을 떠봐.
여덟 이파리 바다꽃이 보일 거야 그래.
쑥섬은 남해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고무신짝만 한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필연적으로 바다를 생계의 터전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날이 좋든 궂든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갯것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배를 타는 것을 업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해서 바다에서 불의의 해난사고로 불귀의 몸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까운 선배 중에 한 분이 그랬고 하모니카를 잘 불던 이웃집 형님 한 분도 원양 선원으로 나섰다가 쑥섬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개가 운항 중에 만난 예기치 못한 돌풍이었거나 운항 부주의로 암초에 부딪혔거나 아니면 배들끼지 부딪혀서 일어난 해난사고였습니다.
아니면 배를 이루는 본체에 탈이 나서 침수로 인한 침몰의 경우와 기관실이나 조리실에서 발생한 폭발이나 화재사고도 왕왕 있었을 겁니다.
기상예보를 수시로 검색해서 알 수 있고 통신시설이 잘 갖추어진 지금도 해난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낚시배가 운항 중에 기관실 화재로 구조선이 도착하기도 전에 침수가 되었고 바다로 뛰어든 낚시꾼들을 구조를 했는데 저체온으로 몇 분은 안타깝게도 병원으로 가는 중에 사망 했다고 보도가 나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바다에서의 기상상태를 오로지 바다물색과 구름의 움직임과 주변 바다새들의 동향으로만 내일의 날씨를 점쳐야 했던 옛날에는 오늘 날보다 해난사고가 더 잦았을 것입니다. 조난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주변에 알려서 구조를 요청하지를 못해서 함께 표류를 하면서도 망망대해에서 그저 지나가는 배라도 있기를 기원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참 막연했을 그 상황을 생각하면 처연해지고 또 안타까워집니다.
'헛장'이니 '초분'이니 하는 장례문화가 생겨난 것들도 어찌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헛장'은 주검 없이 유품만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말하고 '초분'은 장지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바다에서 돌아가신 고인의 주검을 임시로 모신 무덤입니다. 쑥섬에서나 남해 서부 도서지방에서 이루어져 왔던 이중장례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유년시절에는 '초분골'은 늘 두어 채의 '초분'이 있었고 '작은섬' 밭자락에도 '초분'이 들어섰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형제 분 중에 한 분도 바다에서 돌아가시고서 시신을 결국 찾지 못했던지 '헛장'을 썼다고 했습니다.
밤나무뿌리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뒤에 거기에 옷을 입혀 유품과 함께 무덤을 썼다고 하는 산소가 나로도 엄남부락의 언덕에 있어서 매년 명절 때마다 들러서 잔을 올리고 성묘를 했습니다.
쑥섬 뿐만 아니라 도서지방에서의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가 아이들의 생일이 같거나 비슷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고 제사날이 같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생일이 같은 것이야 먼 바다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주기가 같아서 생길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고 제삿날이 같은 경우는 같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함께 조난을 당해서 불귀의 몸이 된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부모자식이나 형제들이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불문율 중에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배가 어떤 이유에서든 침몰을 하게 되면 무어라도 부력이 있는 것을 붙들고 뛰어들어야 하며 배에서 맨 먼저 바다로 뛰어든 사람이 맨 먼저 죽고 맨 나중에 뛰어든 사람의 생존확률이 높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은 외삼촌의 경험담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남중국해까지 기선저인망, 일명 대구리배를 타고 조업을 나섰다가 귀항하는 길에 큰 파도를 만나 침몰하는 중에 무선사였던 외삼촌은 마지막까지 선실에 남아 무선으로 구조요청을 하고 맨 나중에 바다로 뛰어 들었는데 먼저 뛰어든 사람은 다수가 죽고 나중에 뛰어든 외삼촌과 몇 명은 구조되어서 생환을 하였다는 무용담은 그걸 말해 주었습니다.
'금방 흩어져 버리니 구조하러 배가 오더라도 찾을 수가 없어요'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살아야 하는 섬사람들에게는 생과 사의 경계는 바로 배 바닥 나무 두께의 한 장 차이였을 뿐이었습니다.
그 경계는 언제 어느 때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경계였습니다.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 뱃사람들은 바로 주검이라도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마지막 염원으로 함께 돌아가기를 바라는 기원으로 서로를 밧줄로 묶었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함께 살아 돌아가고 죽어도 함께 죽어 집으로 돌아가자는 마지막 염원이었을 겁니다.
'바다꽃'
안타까운 꽃입니다. 그렇지만 참 아름다운 목숨 꽃입니다.
바다에 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