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트는 날'-영등사리
‘개 트는 날’ - 영등사리
'이거 도깨비한테 홀렸나 보다'
친구네 아버지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나로도항에서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대에야 쑥섬으로 노를 저어서 건너가는 중에 술이 확 깨는 걸 느낍니다.
도무지 쑥섬이 가까워지지 않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게 뭔 일이여?'
나로도항에서 모처럼 기분 좋게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신 뒤에 나선 날이 음력으로 2월 그믐을 막 접어든 시기로 봄기운이 느껴져서 기분 좋게 배의 모릿줄을 거둬서 쑥섬서 타고 나온 '댄마/노젓는 작은배'로 나로도항을 출발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섬 앞 내안에서 쑥섬과 나로도항을 오갈 때 쓰거나 '도안/나로도와 쑥섬 사이 물목'에서 '매추리/모래무지'나 붕장어를 낚을 때 요긴하게 써오던 노 젓는 배였습니다.
출발하고서는 휘청휘청 노를 젓기 시작하여 나로도항이 멀어지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만취가 되었지만 노를 저어서 쑥섬으로 건너가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오십 줄에 접어든 이 나이까지 노를 저어서 나로도항을 오가고 낚시를 해 왔으니 술에 만취가 되어서도 노를 젓는 것은 익숙했던 겁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갑다'
썰물이 한창 때라 물은 사양도 쪽으로 흐르고 있을 것이니 배의 이물은 '작은섬'을 향해서 오르듯이 저어 가면 얼마 있지 않아 '건몰짝/건너마을쪽' 선창에 닿을 것인데 문제는 중간정도 건너왔을 때 생겼습니다.
저어기 저기 쑥섬에 집집마다 걸어 둔 등불들이 아스라이 보이는 지점이었습니다.
눈을 감고도 쑥섬으로 건너가는 물길을 헤아릴 수가 있어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한참을 저어 나왔고 이만하면 거진 다 왔을 거 같아 눈을 떠서 쑥섬의 불빛을 가늠을 했는데 불빛은 아직 같은 거리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술이 취하긴 취했나 봅니다.
여전히 불빛은 그대로 그만큼의 거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썰물이 세게 나가고 있어서 배가 뒤로 밀렸구나 싶어 좀 더 힘을 내서 그 불빛 쪽을 향해서 다시 힘을 내서 노를 저어 봅니다.
그런데도 불빛들은 그대로입니다.
아뿔싸 내가 술이 너무 취했나 보다 싶어서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배의 '삼/가장자리'에 발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다시 힘을 다해서 노를 저어 봅니다.
이거 잘못하면 이 밤에 배가 밀려 사양도 쪽으로 밀리면 급류에 말려서 자칫 '내섬도/쑥섬과 사양도 사이 물목'를 빠져나가 '서바닥/서바다'로 쓸려나가면 큰일이다 싶어서 손에 침을 밭아가면서 노를 힘 있는 대로 저었습니다.
'아이고야 이거 도깨비가 붙었나 보다.'
불빛이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아니 배가 꿈쩍도 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쑥섬의 불빛은 다가오지 않고 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납니다.
이거 이거 내가 도깨비한테 홀렸나 보다. 진텃산에 밤중에 도깨비불들이 오락가락하더니 인제는 나한테 옮아 붙었나 보다 싶어서 술이 아주 깨어버리는 듯합니다.
'어무니 나 좀 살려 줏씨요'
다시 한번 정신을 바투 차리고 노를 저어서 쑥섬 불빛을 향해 마지막으로 노를 젖 먹는 힘을 다해 저어 봅니다.
그래도 여전히 배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를 않습니다.
'아이구야 조상님, 이거 이거 나 좀 살려 줏씨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배를 버리고 이 추운 겨울에 바다로 뛰어들던지 해야겠다고 싶어서 술김에 물로 첨벙 뛰어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누구네 동생이 축정에서 배가 없어 건너는 가야겠다 싶어 아무리 쑥섬에다 대고 배를 보내달라고 외쳐도 배를 보내주지 않아서 옷을 벗어 머리에 둘러매고 헤엄을 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조금만 헤엄쳐 가면 안몰짝 선창 앞에 닿겠다 싶어서 술김에 물로 뛰어듭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물이 무릎까지 밖에 차지 않습니다.
바닷물이 무릎까지 밖에 차지 않고 바다의 바닥에 발이 디뎌집니다.
'아이고야 내가 도깨비한테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보다'
배는 '쩍밭/모래밭'으로 이루어진 ‘등'에 얹혀 있었던 것입니다.
'영등사리'
그래서 친구네 아버지가 걸어서 쑥섬을 건너왔다던 '영등사리' 철입니다.
이번 주부터 쑥섬을 포함해서 우리나라 남해, 서해안 모든 도서지방에서 일 년 중에 가장 바닷물이 많이 빠지져서 '개를 트는' 시기인 '영등사리' 철이 됩니다.
옛날부터 민간에서는 음력 2월을 영등달이고 부르는데, 정화수를 떠놓고 빌거나 제를 올리며 평안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영등은 바람을 일으키는 신으로 영등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천계에서 살다가 음력 2월 초하룻날 내려와서 23일에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음녁 2월 그믐과 보름(사리 물때)께 ‘영등사리’가 일어나면 “영등 내린다”라고 하고 23일(조금 물때)에 영등할머니가 올라갈 때는 모든 안 좋은 것들을 몽땅 씻어서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1년 중 백중사리(음녁 7월 15일)와 함께 영등사리 때인 음녁 2월 1일과 15일이 7물로 조수간만의 차이가 가장 큰 시기입니다.
진도에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시기가 바로 이 때입니다.
한 햇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바다밑이 드러나는 시기이기 때문에 섬과 섬 사이에 수심이 매우 낮아지거나 드러나는 이 때가 지역민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시기가 됩니다.
쑥섬과 나로도 사이도 물목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심이 매우 낮아지거나 특정지점에서는 수면으로 드러나는 '모래등'이 존재를 하였습니다. 나로도항에서 바라보았을 때 썰물 때 등이 드러나는 ‘칫둥/칫등‘ 부위가 바로 그곳입니다.
영등사리철에 간조가 되어 ‘갯것’을 하거나 ’개불’을 잡으러 ‘칫둥’에 끝 부분으로 나가보면 그 부위에서 나로도항 쪽으로 수심이 매우 낮아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쑥섬을 걸어서 건넜다'는 말이 있는데 괜한 허언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이야 매번 항로로 유지하기 위하여 뻘이나 모래를 제거를 하는 준설작업을 하는 까닭에 수심이 일정 깊이를 유지를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자연조류 상태에서는 그런 '목'이나 '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네 아버지가 술을 자시고 건너오시다가 배가 그 얕은 등에 얹혀 뛰어내렸는데 물이 무릎에 밖에 차지 않아서 걸어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괜한 술김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개 트는 날'
이 시기가 바로 '개 트는 날'입니다.
'개'는 '갯바탕'을 말합니다. '갯바탕'은 바로 굴이나 바지락이 서식하고 있는 바닷가 또는 갯가를 의미합니다. '튼다'는 말은 '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쑥섬에서는 이 시기를 '개를 튼다'라고 해서 굴이나 바지락 등을 채취할 수 있는 날로 지정해 두고 있습니다.
'개를 트면' 1 가구 1인으로 해서 다함께 시작해서 재량껏 '갯바탕'에 나가서 굴과 바지락(주로 살조개)을 채취할 수가 있습니다.
'계를 타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름하여 '개를 트는 날'에 잡은 굴이나 바지락을 팔아서 돈을 만질 수 있는 날이니 '계를 타는 날'인 겁니다.
바로 '개를 트는' 때가 바로 정월 대보름을 지내고 난 지금의 시기인 영등사리 철입니다.
이번 주부터 쑥섬사람들은 '칫둥'으로 '우끄터리'로 나아가서 함지 가득 굴이나 바지락을 채취를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쑥섬에는 두어 해 굴을 길러 모았다가 한번에 채취를 하게 합니다. 바지락은 일반 ‘무늬 바지락‘이라고 하는 일반 바지락도 많이 채취를 하지만 특히 ‘살조개’라고 하는 껍질 두께가 두껍고 살이 실한 바지락을 캘 수가 있습니다.
저희같은 사내아이들은 주로 개불이나 해삼을 잡으러 쏘다녔습니다. 한햇동안 드러나지 않고 있던 물밑이 수면에 잠시 드러나는 시기인지라 개불 구멍을 찾지 않고 그냥 호미로 대충 긁어파도 개불을 주워 담을 수가 있을만큼 ‘영등사리’ 때에는 ‘물반 개불반‘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삼도 ‘몰팍지/바다몰' 주변을 잠시 잠깐 더듬으면 한 바구니를 잡을만큼 지천이었기 때문에 추운 겨울이 마악 지나는 이 시기는 쑥섬은 ‘푸지게/풍성하게‘ 해산물을 캐거나 잡아서 먹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객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은 쑥섬에서 보내준 싱싱하고 실한 굴과 바지락을 받아 먹을 수 있어서 은근히 이 시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이 시기에 아예 휴가를 내서 쑥섬으로 들어가서 늙은 부모님을 대신해서 갯바탕으로 나가서 1인 가구의 몫을 캐서 오기도 하였습니다.
더러는 쑥섬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이 시기에 쑥섬에 들면 얼마간 먹을만큼 채취해서 가져가는 것도 허락을 했습니다. 물론 동네에는 조금의 성의를 표하는 댓가를 지불하는 예를 갖추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이 참에 영등사리철에 캐어온 싱싱한 굴과 쑥향 가득한 쑥을 넣어 끓인 쑥섬 굴국을 한번 먹으러 가야할 것 같습니다.
때를 같이 해서 우끄터리 동백꽃길에 동백꽃이 피어나고 있을 겁니다.
혹시 또 압니까?
쑥섬을 걸어서 건너가게 될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