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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이야기(35)

동백꽃 필 무렵

by 명재신

'동백꽃 필 무렵'


희자네가 갑자기 무섬증을 느낀 것은 물동이에 물을 다 채우고 '떠바리'를 머리에 올리고 난 뒤였다.


동백숲에서 문득 무슨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고양이겠지' 싶었다.


괜히 이 오밤중에 물을 길으러 혼자 왔나 싶었다. 큰 딸 희자를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고 년이 '우끄터리'만 가자고 하면 기를 쓰고 안 오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두고 나왔는데 괜히 후회가 되었다.


우끄터리 샘은 사람들이 사는 부락에서 한참을 걸어서 와야 있었다. 원체 섬에 물이 귀하다 보니 허드렛물이나 빨래를 위해서는 여기로 와야 했다. 먹는 물은 부락 안에 있는 샘에서 길어다가 먹지만 빨래는 집집마다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쓰던지 '빨래샘/지금의 쌍우물'이라고 부르는 우끄터리 끝에 있는 이 샘까지 와야 했다.


희자네는 물동우 안에 담쟁이넝쿨 이파리를 꺾어서 띄웠다. 가는 길에 출렁이면서 물이 넘치는 것을 막아줄 거였다.


새 날갯짓 푸덕거리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고양이 소리도 들렸다. 고양이가 새 둥지를 터는 소리인지 잠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이 겨울이 가고 있었다. 동백꽃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동백꽃이 이제 마악 피어나기 시작하면 곧 화전놀이도 시작될 거였다. 화전놀이는 이 동백꽃이 흐드러지면 동네 마당에서 몇 날 몇 일을 장고를 치며 노는 잔치였다. 모든 것은 이 동백꽃의 시작으로부터 마을의 모든 생산활동은 시작되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동백꽃들이 입술을 열고 바알갛게 불을 밝히는 거 같았다.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 후박나무, 개후박나무, 팽나무, 산뽕나무까지 우거진 우끄터리 동백숲 속에서 부엉이 소리가 갑자기 뚜욱 그쳤다. 쑥섬에서는 이 동백숲을 '초분골'이라고 불렀다.


밤에는 좀처럼 오지 않는 길이었고 샘이었다.


사방이 고요해지는 듯싶더니 푸더덕하고 새가 나무를 박차고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용케도 고양이의 발톱으로부터 벗어난 모양이었다. 어둠 속으로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 소리가 들렸다.


희자네는 얼른 떠발이 위로 물동이를 머리에다 들어 이고 '빨래샘'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끄터리 초분골 길로 접어들었다.


겨울을 지나면서 마을 안에 있는 큰샘, 동각샘, 덤플샘 물도 가물어서 물이 귀한 탓에 제한급수를 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우끄터리 '빨래샘' 물이라도 길어다가 써야 했다.


왼쪽은 바닷물이 오른쪽으로는 '초분골/동백숲'이었다. 길은 좁으나마 모래를 얹어 그나마 평탄한 길이었다.


갑자기 초분골안에서 썰렁한 바람이 불어 나왔다. 희자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초분골길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네 '함씨/할머니'들이 밤이나 이른 새벽에 초분골에서 '애기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밤에는 물 길러 가지 마라고 하는 소리를 떠 올렸다.


'게으른 여자가 되지 말어라' 하는 소리 정도로 알아 들었었다. 발정난 고양이의 울음소리였거나 ‘해달/수달’의 밤울음일 거였다.


하지만 집에는 허드렛물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아침 절에 내나로도에 있는 봉남리 친정에 잠시 다니러 갔다 온다고 나선 길이 지체되었고 집에 '막배/마지막 나룻배'를 타고 건너왔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허기진 아이들 목구멍에 뭐라도 해 먹이려고 허둥대다 보니 '물 독아지/항아리'에 물이 다 떨어진 것을 못 봤다. 알었다면 저물기 전에 먼저 물 한동이라도 길어다 놓고 밥을 했을 것인데 싶었다.


당장 먹을 물도 제한 급수라 내일 아침이어야 길을 수 있을 거였다.


'엄마하고 우끄터리 샘에 좀 같이 갔다 오자'


큰 딸 희자를 등불잡이로 데리고 갔다 올 요량이었는데 초등학교 육 학년인 희자는 숙제를 핑계로 기를 쓰고 안 가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혼자 나선 길이었다.


'……'


처음에는 무슨 바람소리 같았다. 동백꽃들이 피어나고 있는 동백숲 안에서였다.


'………!'


어디선가 엄마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샘에서 나와 마을 쪽으로 향하는 길로 꺾어지는 곳이었다. 거기 동백숲에는 '독단불'들이 있는 곳이었다.


'독단불'은 쑥섬에서 낳다가 죽거나 크다가 죽은 아이들을 묻은 '아기무덤'이었다. 수백년 묵은 동백나무 아래거나 후박나무 켠에 흙을 파고 묻은 뒤에 갯돌들을 주워다가 그 위로 쌓아서 만드는 일종의 '돌무덤'이었고 지금으로는 ‘수목장‘인 셈이었다.


쑥섬에서는 마을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당숲'을 만들어 산 자들의 만복을 구원하게 했고 북쪽에는 '초분골' 숲에 죽은 자들의 세상을 만들어 명복을 기원하게 했다. 쑥섬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금단의 숲' 두 군데를 관리해 오고 있었다.


'아이구머니나 엄니!'


돌뿌리에 채었는지 잠시 중심을 잃고 물동이의 물이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물이 출렁이면서 머리로 어깨로 넘쳐 흘렀다. 희자네는 다시 한번 정신을 수습했다. 거기는 초분골 돌무덤 아래에 쑥섬의 어린 목숨들이 잠들어 있는 바로 앞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메 이거 뭔 일이다냐'


희자네는 아는 염불을 주워 외며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모든 게 헛것일 거였고 환청일 거였다.


초분골 길에 접어들면 ‘애기들이 물동이 물 반은 묵어 버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지금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방지방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잰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발길에 피다가 떨어진 애동백 꽃들이 발에 밟히고 있었다.


'엄마 나, 물 좀 주고 가'


환청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했다. 젖먹이로 젖도 떼기 전에 어미 곁을 떠나 이 차디 찬 돌무덤에 묻혀 있었으니 얼마나 배를 곯았겠는가 싶으니 애닮기도 했다.


'애들아 와서 물 많이 묵고 가거라, 여기와 물 많이 묵고 가거라'


강단있기로 소문이 난 희자네도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있었다. 어린 아기들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얼마나 이뻤겠는가. 바알갛던 입술은 마치도 이른 봄 동백꽃잎 같았으리.


동백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열에 들뜬 듯이 동백숲으로 건너와 아이 이름을 부르며 동백꽃잎에 입마춤을 했을 것이고 그 꽃들을 꺾어다가 화병에 꽂아두고 몇 날 몇 일을 곁에 두고 함께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물 많이 묵고 가거라, 물 많이 묵어라. 아이들아'


희자네가 마을 입구에 있는 첫 집인 두천이네 집에까지 무슨 염불 외듯이 ‘물 많이 묵고 가거라‘를 외면서 걸어 오는 소리가 들렸는지 두천이네가 문 밖으로 나와서 희자네를 맞아 들였다.


'오메 오메 어찌사꼬 이 밤중에'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둠 속에서 불쑥 나온 희자네를 두천이네가 대신 물동이를 받아 내려주고 감싸 안아 주었다. 희자네가 왜 우는지 어쩐 이유로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마냥 그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며 빠져 나오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짤라고 이 밤중에 혼자서 거길 갔더랑가 오메오메'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고 머리와 어깨 그리고 등으로는 땀인지 물인지 흠뻑 젖은 희자네는 한참을 두천이네에게 기대 안겨 있었다.


희자네가 다시 정신을 수습해서 집에 돌아와 물동이를 내려놨을 땐 물은 절반 밖에 남어 있지 않았다.


'아기들이 물을 반이나 묵고 갔구나'




'동백꽃 필 무렵'


붉은 동백꽃만 보면

나자마자 강보에 싸여 떠나가던

막둥이가 생각이 나


동백꽃만 피면 동박새처럼

시누대 빨대로 동백꿀물 빨며

놀던 초분골이 잊힐리야


세상에 나왔다가

너는 거기 숲에서 꽂이 되었고

나는 여기 사막에서 모래바람이 되었다


너는 거기서 돌옷을 입고

나는 여기서 작업복으로 산다


동생아

막내야


세상 돌고 돌아

금방인 것을 어쩌자고 떠났더냐


동백꽃 피었다 지고

동백 달았다가 떨구도록

엄마를 부르고

형제를 찾았더냐


붉디 붉은 꽃 입술

마지막 길이 어제만 같구나

돌무덤 이제

흔적도 없어졌구나.

제4시집 '쑥섬이야기' 중



동백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곁에 쌍우물이 있고 이곳에 동백꽃이 피면 온통 붉은꽃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희자네가 이곳을 지나면서 아기들이 물 좀 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을 듯 합니다. 지금은 이곳이 동백꽃길입니다.
쌍우물에서 물을 길러 나오면 첫 번째로 맞는 애기 동백나무입니다. 이 동백나무는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입니다.
동백꽃길입니다. 이 길을 통해서 쑥섬의 아기 엄마들은 무수히 물을 길러 다녔습니다.
사연도 많고 애환도 많은 우끄터리길이 지금은 동백꽃길로 조성되어 수많은 탐방객들의 힐링코스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백꽃이 피기 시작하면 쑥섬의 아이들은 동백꽃물을 빨아먹기 위해 이 나무들을 타고 다녔습니다.
쑥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쌍우물'입니다. 많은 사연이 있는 '빨래샘'이지요 1930년도에 만들어졌답니다.
동백꽃길에 떨어져 있는 동백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입술 같은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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