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섬에 대한 기록
<쑥섬에 대한 기록>
고향 쑥섬에 대한 기록이 저에게 있습니다.
1986년도 8월 20일 자로 조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창 쑥섬을 소재로 시와 소설을 쓰고 있던 이십 대 초반이었던 만큼 쑥섬에 대한 내력을 알고자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마을이장이었던 박선동 이장님께 쑥섬에 대한 기록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마을회관에서 간직하고 있던 기록을 보여주어서 이를 '동각/마을회관' 책상에 앉아 필사를 했습니다.
아마도 쑥섬마을의 마을회관에는 이 원본기록이 아직 남아 있을 성싶으며 또한 이후의 기록도 누군가 계속해오고 있다면 최근까지의 기록들도 남아있을 것입니다.
'艾島(애도) 沿革(연혁)'
여기서 '艾島'라는 지명은 '쑥섬'을 지칭하던 행정명이며 '艾(애)' 자는 '쑥 애'자로 쑥섬에 약쑥이 많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쑥섬에 들어와 씨족을 형성하여 살기 시작한 네 성씨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1611년(임해년) 광해군 3년 : 김해 김 씨가 들어와 정착하여 씨족을 형성하여 생활하였음.
* 1613년(계축년) 광해군 5년 : 밀양 박 씨가 들어와 정착하여 씨족을 형성하여 생활하였음.
* 1761년(신미년) 영조 37년 : 연안 명 씨가 들어와 정착하여 씨족을 형성하여 생활하였음.
* 1790년(경술년) 정조 14년 : 장흥 고씨가 들어와 정착하여 씨족을 형성하여 생활하였음.
김해 김 씨가 414년 전에 최초로 쑥섬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의 명 씨의 최초 입도조(入島祖/섬에 들어오신 최초 조상)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64년 전에 들어와 씨족을 이루며 살기 시작했으니 1 대를 넉넉잡아 30년으로 기준하면 8대조 이전의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처음 일가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일가가 모시던 사양리 선산의 할아버지가 저로부터 6대조 할아버지이니 그 이전에 2대조 할아버지가 더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공동시설과 행정명의 변동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 1868년(무진년) 고종 5년 : '동각/마을회관' 초가 목조 1동을 최초로 건립하였음.
* 1896년 광무 2년 : 행정구역을 전남 돌산군 봉래면 애도리(艾島里)로 정하였음
* 1912년(임자년) : 봉래면 어업개발 종주지(宗主地)로 지정되고 당시 어선이 70여 척이었음.
* 1914년(을축년) 3월 : 돌산군에서 고흥군으로 편입
위의 기록에서 보면 지금의 마을회관이 있던 자리에 초가 목조 1동을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초가건물은 저의 집 바로 옆에 있었고 저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지명으로 불리우고 있는 '쑥섬'이라는 지명이 '쑥 애(艾)'와 '섬 도(島)'를 쓴 '애도리(艾島里)'라는 행정명도 1896년도에 처음 쓰였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1912년도에 쑥섬이 어업개발 종주지로 지정이 되고 어선이 70여 척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앞으로 저의 글에서 등장하게 될 '조선기왔집 이야기'나 '쑥섬 최고의 명당이야기'도 이 즈음에 일어났을 듯합니다.
작은 섬에 어선이 70여 척이었으며 이를 부리는 선주들이 모두 쑥섬에서 터전을 잡고 있었다니 '돈섬'으로 불리우던 시절이 바로 이 즈음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 1925년(을축년) 2월 2일 : 공동우물 2개소(큰샘, 덤블샘) '대석/큰 석재'를 사용해서 사각형으로 중수함.
(마을 유지 박 효덕 씨가 후원해서 경남 하동에서 대석을 매입함)
* 1925년 5월 20일 : 애도리(艾島里) 총호를 사양리산 지번으로 변경
* 1930년 : 공동 빨래 우물(모래샘) 신설(자체 사업) 당시 이장 고대현
* 1932년 : 남부, 북부 선착장 확장 콘크리트 포장으로 중수하였음.
남부 길이 37m 폭 3m, 북부 길이 26m 폭 4m 당시 이장 고대현
* 1936년 11월 3일 : 마을 회의실을 목조 아연 부속건물 1동 신설
봉래면 갱생 마을로 지정
* 1937년 : 공동 우물을 회관 상측에 1개소 및 북부 웃끝/우끄터리에 1개소 신설
* 1946년 : 토지개혁과 수산물 수출 불능으로 경제력 위축
* 1956년 : 봉호(蓬湖) 신당(神堂) 석조 건물을 독지가 선주 등의 찬조로 새로 지음
* 1957년 : 나룻배 새로 건조
* 1963년 : 애도리(艾島里)를 봉호리(蓬湖里)로 변경, 고흥군 조래 구역 개편
* 1963년 : 석화/굴 양식장을 공동사업으로 마을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착안
위의 기록에서는 샘을 새로 파거나 다시 중수(다시 고침)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필연적으로 먹는 물과 허드레 물이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쑥섬에서 남아있는 집과 빈 집터를 헤아려 보면 약 100여 가구가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가 있는데 1 가구 당 6명으로 산정을 해 보면 얼추 400여 명이 주민이 거주를 하고 있었고 어선이 70여 척이었으니 한 척당 3명 정도 승선을 하고 있었다면 200여 명이었을 겁니다.
작은 쑥섬에 한 때는 600여 명이 상시 거주하거나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필요한 시설과 샘 그리고 회의시설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배들이 어로활동을 하기 위해 풍어와 무사무탈을 기원하고자 당산에 새로 당집을 신설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희가 초, 중등학교 때까지 쓰고 있었던 쑥섬의 또 다른 행정명이었던 '봉호리(蓬湖里)의 한자어 '봉(蓬)' 자도 '쑥 봉(蓬)'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행정명은 '애도리'와 '봉호리'를 오가며 쓰이는데 모두 '쑥섬'을 한자표기로 쓰고자 했던 관료들의 고심을 엿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이 '1946년 토지개혁과 수산물 수출 불능으로 경제력 위축'이라고 하는 기록입니다.
해방이 되기 이전에는 쑥섬을 비롯해서 인근 마을에서 잡아들인 싱싱한 삼치와 참장어 그리고 능성어 등이 모두 일본으로 직수출이 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한 선주들은 고흥군 일원에 많은 전답을 매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흥 가는 길에 쑥섬 지주 땅을 밟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다'는 말이 쑥섬에서는 있었습니다.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육지에 모든 전답들이 이때를 깃점으로 어떤 변화가 생겼던 것으로 추정이 되며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반도 남해안에서 일본으로 직수출되던 모든 수산물들의 판로가 막히게 되면서 이전만큼의 부의 창출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 시점을 시작으로 쑥섬은 '돈섬'이라는 지위를 내려놓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이때부터 흥청대던 마을의 분위기도 하나 둘 거품이 걷히고 사람들이 떠나가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한국전쟁도 큰 변화의 줄기였을 것이니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가 될 거 같습니다.
우선은 전체 중에서 일부를 여기에 소개를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