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설킨 삶의 그물망
총총히 떠있는 별빛 아래.
어디선가는 밤새 풍류소리 드높겠지만,
다른 어디선가는 생의 마지막 몰아쉬는 한 숨도 있다.
같은 하늘,
위대한 생명체, 인간들
한 평생 파노라마는 저마다 다르다.
한 나라에도 미워하는 상대가 있듯이,
한 몸속에도 자기 몸을 죽이는 암세포도 공존한다.
사라지는 자는 슬프지만 등장하는 자는 기쁘다.
정복자는 통쾌한 웃음 짓지만 망하는 자는 비탄의 눈물을 짓는다.
차면 이지러지고 넘치면 덜어지게 되는 것(物極必反물극필반)이 지구, 사회, 인간, 생명체 모두에 적용되는 원리이다.
넓게 본 인간의 역사, 지구의 역사, 생명체의 순환은 오늘도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다.
세계는 양면의 공존이다
영겁의 세월 동안 지구는 태양을 돌고 또 돌았다.
그러한 사이에 산맥, 바다, 대륙이 출현하고 또 사라지기도 했다.
국가에는 흥망성쇠가 있는데 개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성공을 위해 피눈물 흘리지만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가 늘 있을 수밖에 없다.
동물은 어떠한가?
같은 햇살 아래 쫓기는 사슴과 쫓는 사자가 질주한다. 사슴이 사자의 위장에 담겨야 사자의 내일이 있다.
사슴 사냥에 실패한 호랑이는 하루의 배고픔을 감수해야 한다.
사슴은 사자의 날랜 추격 거리를 벗어나야 내일을 맞을 수 있다. 사슴은 하루의 행복을 지켜낸 것이다.
사슴이 토해낸 거친 숨결의 일부는 사자의 코를 통해 사자의 폐와 혈관을 통해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해체된 사슴의 살코기는 사자 몸 어딘가의 세포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사슴에게서 나온 공기나 세포는 주인만 바뀌었을 따름이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생존을 위해 둘 다 사력을 다한 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먹고 먹히는 적대적인 순환 자체가 생명계가 존속하는 기본 원리인 것을.
뙤약볕 아래 햇볕 쟁탈전에 살아남은 나무순은 사슴에게 먹혀 그의 피부가 되고 아름다운 뿔의 소재가 된다.
이 사슴은 호랑이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생명연장의 재료로 환생한다.
이러한 적대적인 순환 관계는 불행일까? 행복일까? 모순일까? 순리일까? 삶의 패러독스이다.
1차 포식자 2차 포식자 3차 포식자의 생태계 속에서 개별 간 관계는 죽고 죽이는 적대관계이지만
생명 시스템 전체로 보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순환일 뿐이다. 다만 먹이로 희생되는 피식자는
죽음의 슬픔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차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사슴의 목을 축여줄지 아니면 사슴 사냥한 사자의 갈증 해결용이 되는 것까지 헤아려 주지 않는다. 다만 땅 위 생명체들 간에 알아서 할 영역인 것이다.
자연은 自然 즉,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이 시간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을 따름이다. 지구 상에 전쟁의 포연과 피의 살육은 인간들 간의 문제일 따름이다.
밝음과 어두움은 빛이 있기 때문이다.
빛은 사물을 인식하게 해주는 근원이지만, 바로 이 빛 때문에
어두움도 밝음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마시는 숨이 있기에 내쉬는 숨이 있어야 한다. 숨이 멈추는 것은 생명이 멈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호흡을 한다. 호흡을 통해 산소가 몸속으로 들어가야 살 수 있다. 바로 이 산소 때문에 발생하는
활성산소가 몸을 해치게 된다.
부피를 표현할 때, 크다 작다라고 한다.
그러한 구분이 왜 발생하는가?
3차원 공간이기에 입체적인 윤곽이 있는 것이다.
만약 2차원 공간에서 이라면 규모나 오목과 볼록의 분별이 생겨나지 않는다.
다만 길고 짧음의 대소 관계만 드러날 뿐이다.
이 또한 점의 세계로 들어가면 크고 작음, 길고 짧음, 멀고 가까움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삶은 패러독스이다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
분명 역사는 진보하고 있으며, 문명은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진화된 문명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반문명적 행태 또한 상존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향한 수많은 걸음이 있었으나 반인권, 반민주적 작태 또한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삶은 비선형적이다. 예측가능한 전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변수가 많다.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
세상살이는 한 방향이 아니다.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좌충우돌한다.
삶의 여정이 첫 단추가 부터 마지막까지 제대로 끼워지듯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경우가 그렇지 않다.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집단, 개별 관계들이 혼잡되어 밀치고 당기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나의 불행이 상대방의 행복이 되는 것이 부지기수이다.
전쟁터에선 패자의 주검 위에 승자의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암환자의 몸속에 암세포의 증식은 또 다른 나의 확장이지만 나의 죽음을 앞당기고 있다.
세상의 모습은 어떠한가?
서로 다른 성질이 섞여서 어느 시기에 어느 조건에 따라 특정 성질이 두각을 나타내어지는 것이다.
자연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역사가 그렇다.
살다 보면 큰 어려움들이 있다.
개인에게 질병은 어떤 것인가? 삶속에서 질병 또한 함께 하고 있다. 면역력이 강하면 잠재되어 있을 따름이나
약해졌을 때 발병한다. 인체의 모든 부위가 생명활동에 기여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갈등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이다. 한 사회가 해체되지 않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다른 개별 주체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이다.
우리 몸속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내 한 몸에도 몸을 지키는 세력과 망가뜨리는 세력이 시소 타기를 하면서 수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몸을 지키는 면역체계에는 매크로파지, T-세포, B-세포, TNF-알파 등 여러 면역세포가 있다. 그리고 균 중에서도 몸에 좋은 대장균과 같은 유익균이 장 속에 서식하고 있다.
몸을 망가뜨리는 세력에는 호흡과정에서 생겨나는 산소의 부산물인 활성산소, 박테리아, 그리고 해로운 균들이 있다. 당장 우리 입속이나 손바닥 등을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이런 균들이 득시글하다.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해로운 균들이 왕성해져서 시신이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행복으로 나아가는가
삶은 불행, 파괴, 죽음, 소멸이 분명 존재한다.
이것이 존재하기에 살아 있다는 자체가 값진 것이다.
행복감은 절망의 나락 속에서 벗어났을 때 더욱 배가 된다. 풍요로움 속에서는 행복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비극의 나락 깊숙이 빠졌다가 헤쳐 나올 때의 기쁨은 더욱 큰 것이다.
만인에게 감동을 주는 문학작품, 예술 작품은 비극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많다. 행복의 울림통은 비극이 클수록 더 커진다.
각고의 고통을 견딘 예술가나 문학가의 명작은 그렇게 탄생되는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었던 베토벤이나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그래서 더 위대한 것이다. 문학작품도 평범한 러브스토리보다는 비극적 사랑을 다룬 로미오와 줄리엣이 더 큰 감동을 주는 이유다.
이 순간에도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이 있다
암수가 만나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난다. 인간인 경우는 아들 또는 딸인 것이요, 동물인 경우는 암컷이나
수컷이요, 식물이면 종자가 될 것이다. 탄생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생명체 순환의 그물망에서 서로가 먹이사슬로 만날 수 있다.
생명체의 생존은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체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이 지구 상 생명 순환의 본질이다.
사람도 어떤 임무를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나,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사람끼리 원수가 될 수도 있고 은인이 될 수 도 있다.
탄생 자체는 기쁨이나 세상과 어떤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 축복일 수도 있고 재앙일 수도 있다.
전쟁, 살인, 강도, 사기, 폭행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요,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고
수렁에 빠진 사람을 살려내는 것도 사람이다. 지구촌의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
다행히 사람은 합리적 이성이 있으며 실천력이 있다는 면에서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있다.
이 아니 행운인가?
지구촌이 아귀다툼이 끊이지 않는 지옥이 될지, 행복의 미소가 번져가는 파라다이스가 될지는 모두 인간의 실천에 달려 있다.
잘 화합되면 오케스트라 명연주가 될 것이요, 갈등 대립만 지속되면 아귀 지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