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시각을 통한 예술감상

by 아그배나무


인간의 감성은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풍부해진다.

시각이 주된 통로이다. 눈을 통해 전달된 시각정보는 뇌 속 예술영역의 감성판을 울린다. 예술작품의 면면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지지만 때론 깊은 울림은 눈을 감았을 때 더욱 고양된다. 여기서는 일본 여행지에서 만난 건축물과 한국의 사찰을 보면서 들었던 예술적 느낌을 전한다.


눈을 감았을 때 더 선명한 금각사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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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킨카쿠 절(金閣寺)

금빛 찬란한 자태로 유명한 금각사(金閣寺)는 일본 교토 북쪽에 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 1358~1408년)가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절이다.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면서 많은 선종 사찰들이 오닌의 난(1467~1477년) 때 불타 없어졌으나, 이 금각사는 살아남았다. 안타깝게도 1950년에 이 절에 머물던 한 미친 사미승이 불태워 버렸다.

몇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지붕 꼭대기에는 금박의 불사조가 있으며, 3층으로 되어 있다. 모두 독특한 양식이다. 1층은 11세기 귀족 저택을 본뜬 것이다. 미닫이 문을 통해 빛이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2층은 중국식으로 무사의 집 양식이다. 3층은 중국 선종 양식이다.

멀리서 보이는 금각사.

화려함의 극치이다. 멀리서도 눈부시도록 보이는 금박의 향연.

어쩌면 엄숙함과 전혀 거리가 먼 황홀한 금색.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건축양식에 놀란다. 금박이 그리도 정교하게 입혀진 것에 또 한 번 놀란다. 한국의 절은 깊은 산속 명당터에 자리 잡고 있다. 그와 다르게 이 일본 사찰은 편안한 동산에 수목과 함께 꼭 호수가 있다. 화려한 금각사가 위에도 있고 물속에도 있다. 사진 속에서 물에 비친 금각사의 잔영을 보라.

황금빛 금각사를 보면 눈이 깜짝 놀라고 뇌가 번쩍인다.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하게 떠 오른다. 눈에 강렬하게 들어온 금각사 전경은 눈 감으면 찬란한 황금빛 잔영으로 머릿속 깊숙이 파고든다. 가만히 두 눈을 뜨고 고요한 수면을 향하는 순간, 고양된 마음은 이내 평정해진다. 호수 군데군데 있는 한 두 그루의 수목들이 마음의 중심을 잡아 준다. 들뜸과 가라앉음이 함께 하는 곳, 금각사. 정지된 건축물이 움직이는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금각사 전체를 바라보면 무심코 벗은 여체女體 를 바라보다 깜짝 놀란 느낌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감정.

하지만 물 위에 가만히 서있는 나무들이 그 부끄러움을 감춰주겠다는 듯, 헛기침을 하는 것 같다.

가까이 볼수록 뿜어져 나오는 금각사의 황금빛 기운을 주변 수목이 감당하기 힘들어서일까. 바로 앞 호수의 맑은 물기운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배치이다. 황금빛 건축과 맑고 서늘한 호수의 기막힌 궁합이다.

호수에 비친 금각사와 땅 위의 금각사.

서로 물을 경계로 대칭이다. 땅 위의 금각사는 현실의 세계이고 수면에 비친 금각사는 피안의 세계인가. 수면 위로 보이지만 만져지지 않는 또 다른 세계. 금각사는 자연물을 이용해 종교적 의미를 담뿍 담아냈다.

찬란한 금빛과 칠흑 같은 검은색, 어둠과 밝음의 모순적 조화. 그러기에 금빛의 강렬함이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2층, 3층의 불전은 옻칠을 한 뒤에 금박을 입혔기에 금빛 찬란하다. 지붕은 검은색으로 서로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일본문화는 국화와 칼로 집약된다. 아름다움과 사무라이.

이 금각사도 금빛의 찬란함 속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20150109_160532.jpg 금각사 지붕 꼭대기에 있는 봉황


금각사 지붕 꼭대기에 번쩍이는 봉황이 있다. 날개를 펴고 있으나 날지 않고 가만히 서있다. 살아 있는 새들은 날갯짓으로 훨훨 공간 속을 날아가지만 이 봉황은 영원의 시간 속으로 나아간다. 한국 사찰의 지붕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지붕의 맨 끝에 봉황이 있다니. 봉황은 상상 속의 동물이요, 절은 현실 속의 존재이다. 봉황은 날아서 사라질 수 있으나 절은 그 자리에 머물어야 한다. 절은 수행터요, 봉황은 수행자의 오락가락하는 번뇌가 끊어지고 굳건한 신심으로 잡은 상태가 아닐까. 찬란한 금빛은 수행으로 도달한 높은 경지일 게다. 속세로부터 떠난 사찰에 가장 세속적인 황금빛 조형물. 하지만 그 황금빛이 수행으로 얻게 될 성과라면 얼마나 고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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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봉정사 (2018년 6월 30일)


해 질 녘, 산사 마루에 걸터앉아 자연의 공연을 본다.

사찰 주변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나무가 보여주는 무용이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청아하다. 새들의 합창이다. 산속 산사에서 자연이 보여주는 공연이다.

한국의 봉정사와 일본 절을 비교해보자.

일본 절의 모래 조형은 인위적인 배치로 마음을 안정 속에서 침잠하게 만든다. 눈을 뜨고 하는 참선 같은 무게감이 있다. 한국 안동 봉정사 툇마루에서 바라보는 풍취는 다르다.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의 물결은 나무들의 무용이요, 산 새소리는 합창이다. 봉정사의 절 공간을 무대로 자연이 벌이는 공연에 스르르 빠져든다. 일본 사찰의 모래 명상과 달리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는 깊은 마력이 있어서 좋다.



'禪의 정원'(Zen Garden), 용안사 석정

용안사 석정.jpg 용안사 석정


"이 정원은 무슨 의도로 이렇게 만든 것일까. 용안사 석정은 바라보는 정원이 아니라 선禪 자체를 정원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공空, 비어 있다는 것. 불변不變, 변하지 않는다는 것. 지止, 머물러 있다는 것. 관觀,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명상冥想, 고요히 마음을 성찰하는 것. 추상적인 선禪을 돌과 백사를 통해 형상화시킨 것이다. 현대적 조형 개념으로 말하자면 추상미술이기도 하고 설치미술이기도 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일본편4 교토의 명소)


정원은 일본 정원 미학을 잘 드러내 준다.

용안사처럼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 등에 의해 산수의 풍경을 표현하는 정원 양식을 가레산스(枯山水)라고 한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용안사는 '선禪'을 정원을 통해 가장 잘 형상화했다. 흰모래 위에 이끼 낀 돌 배치만으로 정원을 꾸몄을 따름이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인공으로 조성했지만 인간 사유의 깊은 세계를 자연미를 통해 잘 드러냈다. 정원에는 다만 흰모래와 15개의 돌,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담장이 있을 뿐이다.


20150109_140500.jpg 일본 용안사 방장 마루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무념무상에 빠진 관람객들



500년이 지나도록, 보는 사람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보는 사람마다 깊은 울림을 준다. 조용하지만 적적하지도 않으며, 단순하지만 질리지 않다. 비어 있는 듯하면서 비어 있지 않다. 움직임이 있는 듯하면서 멈춰 있는 듯하다. 정원이 담백한 만큼 바라보는 마음은 깊어만 간다. 방장 마루턱에 고요히 앉아 있는 관람객들을 보라. 굳이 참선하는 결가부좌 같은 어려운 자세가 아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앞 뜨락을 바라본다. 그저 편안히 걸터앉아 무심코 앞 뜨락을 바라보고 있다. 번뇌 망상을 잊으려 함이 아니다.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대학생이나 일본인,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마음이 가라앉는다. 적막함, 고요함, 안정감은 깊은 산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옆에 누가 앉아 있든, 일어나서 걸어가든, 옆에 다가오든 모두 무심無心아니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이다.



앞마당에 가지런히 정돈된 모래, 군데군데 마치 섬처럼 놓인 돌들. 이끼 바닥에 누워 있다. 일정한 간격이 아니다. 한 켠에 작은 돌들이 몰려 있고 다른 켠에는 큰 돌이 누워 있다. 돌이 섬 모양을 연상시키는 것일까? 돌 아래 이끼가 마치 섬을 에워싼 수목들 같다. 어쩌면 이렇게 작은 소품이 큰 느낌을 주는 것일까? 꽃과 수목이 울창한 것보다 때론 소박함이 더 울림이 더 크다. 규칙성 없는 배치 속의 정적이 오히려 마음이 모였다가 이완되면서 느껴지는 동적인 안정감을 유도한다. 오른 켠에 모여 있는 작은 돌 세 개를 바라보면 주의 집중이 되었다가 중앙과 왼켠에 따로 뚝 떨어진 돌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치 툭 트인 수평선을 바라볼 때의 시원함 같다. 모래가 물인 듯, 돌이 섬인 듯 고요한 바다를 보는듯하다. 물이 하나도 없지만 모래 결을 따라 물결이 이는 듯하다. 다시 정신 차려 보면 일렁거림은 없고 내 마음의 들고 나옴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내 정적인 정원에 빠져든다. 절로 심파心波가 고요해진다. 어려운 수행 원리를 떠나 자연스레 수행자가 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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