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완벽한” 것이고 땅은 "불완전"하다는 철학적 믿음
태양계의 기원은 초신성 폭발 후 생성된 성운 속에서 중력 수축에 따른 물질들의 결집에 따라 원시태양과 지구를 포함한 원시행성들의 형성으로 시작된다. 약 5십억 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이러한 과정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천동설에 근거한 태양계 모델은 멀리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지구가 중심에 위치해 있고, 태양과 기타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에는 하늘은 “완벽한” 것이고 땅은 "불완전"하다는 철학적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구상에서 보면 태양과 행성들은 언제나 지구 주위로 움직이고 있다. 정말 우리 지구는 정지해 있고, 다른 천체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러한 철학성과 직관적 관측에 의한 천동설은 이후 천문학자들의 관측에 크게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화성이나 금성 같은 행성의 운행이 굉장히 이상하게 관측됐다. 원의 둘레를 일정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느려졌다가 때로는 빨라졌다가 어떤 때는 앞으로 진행하지 않고 거꾸로 운행하는 것도 관측됐다.
당시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양과 행성들이 큰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것 외에 작은 원을 그리며 운행하는 것으로 해결 지으려 했다. 이것을 그리스 철학자 프톨레미의 이름을 따 “프톨레미 계”라 불리는데 (그림 1 참조) 문제는 행성들의 운행 자체가 너무 복잡하며 이후 천문 관측을 통해 많은 부분들이 맞지 않음을 알게 됐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제기된 “지동설”이다. 즉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 행성들이 그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여러 천문 관측과 잘 맞았으며 (모든 것이 다 맞는 것은 아니었다. 한 예로, 실제로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원을 그리며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타원을 그리며 운행한다), 무엇보다도 행성들의 이상한 거동, 즉 화성이나 금성의 거꾸로 가는 운행들이 잘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중세 교회는 교회 탄생이후 그 순수성과 거룩함을 많이 잃고 정치에 깊이 관여해 있었으며,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또한 많이 세속화 되어 있었다. 교회 이외에는 성경을 읽는 것과 해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이를 어기면 죽음에 까지 이르던 시대였다. 당시 교회는 천동설에 근거한 태양계가 바른 것이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이라고 해석해 놓은 상태였다. 교황이 가장 완벽한 성경의 해석자라는 자신들의 신념 때문에 이는 바꿀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과학이 “진리”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신념의 문제를 낳는다
성경을 볼까.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이후 창세기 본문은 창조의 과정을 마치 시간대별로 나누어 열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성경은 결코 지구가 중심이며 태양과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인간적인 해석, 그리스의 철학에 기인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해석일 뿐이며, 그렇다고 성경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말하고 있지도 않다.
성경은 성경이며 우리는 이를 과학적 해석의 도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창세기 서두를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너지 얼마와 압력 얼마로, 수소와 헬륨 원자 수백 조를 가지고 수천만 온도에서….”이런 식으로 시작하고 있다면, 이는 그것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과학적 사실 (구체적으로 용어와 재료) 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심히 과학적 자세로 성경을 볼 것이다. 성경은 과학적 사실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초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경이 과학적 탐구 대상이 아니며, 형이상적이며 신념의 근거가 됨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진리”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신념의 문제를 낳는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들의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과학이 진리를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동안 과학은 과학적 소재를 다루며 훌륭하게 과학적 현상과 사실을 다 설명해 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철학적 문제, 실존주의 문제, 관념과 이상학의 영역에 속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못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지 못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과학적(자연과학적)소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과학적 사실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념과 믿음의 근본인 성경을 갖고, 성경적 해석을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학적 현상에 자연과학적 접근을 가져야지 성경적 해석을 들이 내미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위이다. 물론 믿음의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가 자연과학적 해석을 뛰어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물 위를 걸으시는 것. 이러한 것은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야지 무리한 과학적 해석을 해서도 안되고, 사실 할 수도 없다.
성경과 과학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으며, 우리는 이 두 사이의 경계를 함부로 넘나들지 말아야 한다. 당시 중세 교회는 이 경계를 무너뜨리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그들 스스로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었다. 지동설을 강력히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33년 종교 재판에 넘겨지며, 결국 종신형에 처하게 된다. 물론 그다음 날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지만. 갈릴레이의 죄명은 “이단, 신성모독”이었다.
또 다른 유명한 종교재판이 있다. 여러분은 노아의 아내의 이름을 아는가?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노아의 아내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Joan of Arc. 우리말로 쟌다르크. 영어로 Arc가 방주(Ark) 랑 비슷한 발음이라 방주의 Joan (여자이름)이 노아의 아내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하곤 한다.
쟌다르크는 백년전쟁 당시 거의 질 뻔한 프랑스 군대를 이끌며 마침내 영국군을 프랑스 땅에서 몰아낸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는 영국 군대에 잡혀서 재판에 넘겨졌는데 죄명은 신성모독 죄였다. 구체적으로, 이단, 마녀행각, 그리고 신성함을 모독하는 남자 옷을 입고 다는 것 등등. 스스로 위선적이며, 반성경적인 행태를 보이지만 자신들의 권위에 위협되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그림 2). 갈릴레오는 마침내 그의 죄에 대한 사면을 받게 되는데, 무려 350여 년이 지난 1992년에 로마 교황청은 그가 주장한 지동설이 옳음을 인정하고 사죄를 하게 된다.
다른 얘기로, 갈릴레오와 같은 르네상스 과학자들은 그렇다면 반기독교인 들이었을까? 그들은 실제로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생각하기를 ‘이 우주가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되었다면, 분명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가 있을 것이다’ 라며 “코스모스”가 아닌 “로고스”적인 우주를 꿈꾸어 왔다. 코스모스는 어원 카오스(혼돈, 무질서)에 기인한다. 그들은 이러한 질서와 아름다운 조화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많은 과학적 성과를 이루게 된다.
10월 31일. 이날은 1992년 갈릴레오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사면을 받은 날이다. 그리고 이날은 부패하고 타락한 진정한 신성모독의 종교 권력에 진리의 못을 박는 종교개혁의 날이기도 하다.
과학도 또한 신앙을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며, 그 숭고한 가치와 위치를 폄하하며 메스(수술용 칼)를 들이대는 오만과 과오를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